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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후기: 제4장 (전반부)
namu / 2017-05-20 / 조회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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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후기: 제4장 (전반부)



지난 세미나에서는 아즈마가 설정한 괴델적 탈구축(논리적-존재론적 탈구축)과 데리다적 탈구축(우편적-정신분석학적 탈구축) 가운데 전자에 관하여 논하였습니다. 이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고불가능한 것을 자기 언급적으로 파악할 때,‘불가능한 것’을 단수화하는 부정신학적 사고와 결부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발제를 하면서 모호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찌하여 존재자는 있고, 오히려 무가 아닌가?”_하이데거

 

하이데거는“무無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카르납(논리실증주의)은 자연언어에 대응하는 논리적 표현의 관점에서 이러한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존재’를 명사(사고대상=명제변수)로서 다루는 것으로, ‘존재’를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오류는 명제형식과 명제변수, 즉 구문론적 형식과 명사의 혼동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요컨대 구문론적 형식을 물상화(명사화)했다고 비판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1921)에서 세계=사고의 한계(‘불가능한 것’)를 논리형식으로 끄집어내어, 존재양화사(술어논리를 뒷받침해주는 장치들, 즉 양화사quantifier나 진리함수의 연산자 등)는 존재카테고리로서 사고를 규정하는 형식이지 결코 사고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세계=사고의 내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지요. 또한  명제의 진위와 명제의 존재〔명제 자체의 근거물음〕라는 이 두 위상의 구별을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이 신비다”라는 언명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실상 하이데거도 “어찌하여 존재자는 있고, 오히려 무가 아닌가?”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지요.

 

▣ 하이데거의 개념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는데, 하이데거 철학에는 거의 맹탕인 저로서는 몹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형이상학이란 무었인가(1929)』로 대표되는 전기와 『숲길(1950)』로 대표되는 1930년대 이후의 후기 사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 사상은 현존재 분석을 통해 존재로 나아가는 실존론적 탐구이고, 후기는 역으로 존재(은폐성)에서 존재자(현존재)로 나아가는 존재론적 탐구의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괴델적 탈구축을 설명하는 아즈마의 ‘논리적’,‘실존론적’ 구분, 그리고 두 쌍의 도식화에 대응합니다.

 

우선  제가 요 며칠 간 이해한 기본 개념들을 스스로 복습하는 의미(논의의 편의를 위하여)에서 정리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자’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동, 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들(돌, 나무 따위)을 일컫습니다. 물론 동물로서 인간도 포함되지요. 그렇다면 ‘존재’는? 다시 말해 ‘나무’라는 존재자의 존재나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존재’ 말입니다. ‘존재’는 존재자 일반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그 자체 내에 다양성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통일성이랍니다. 뭔 생뚱? 아무튼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이데아, 신, 물자체 따위, ‘본질’, ‘예지계’에 관련된 사항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 너머, 그야말로 초월적인 것들이니까요. (그럼에도 자꾸 신을 연상하게 되는데, 저는 그 관념을 떨쳐버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존재는 존재일 뿐, 신이 아니라니까!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자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존재사유를 할 수 있는 특이점이라는 점에서 ‘현존재’라고 한답니다(아즈마의 표현으로 ‘이중주름Zwiefalt’. “그런 특이한 존재자‘현존재Dasein’를 통해 한계에 대한 사고가 간접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존재자에 대해 사고하고는 것, 즉 그것을 사고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대로 동시에 사고형식(존재)에 대한 물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본능에 따를 뿐이지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존재자 각자는 불교의 ‘인드라망의 비유를 빌리자면 각자 인연에 따라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세계-내-존재‘입니다.)로서 출생에서 죽음이라는 ’시간성‘의 존재이며 이미 과거에 '피투'되고 미래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기(획하고)투(사)'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하는 장래성’의 존재이지요. 다시 말해 스스로의 존재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이데거 사상의 전기 사유로써 현존재 분석을 통해 존재로 나아가는 실존 철학적 탐구입니다. 존재사유를 할 수 있는 현존재의 ‘이중주름’.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대 하이데거의 전회라고 불리는 ‘부름Ruf’에서 ‘존재의 목소리’로 할 때의 이 두 말뜻의 의미입니다.

 

“『존재와 시간 』에서 ‘음성적 은유’인 ‘부름Ruf’은 나의 바깥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내 안에서 더구나 나를 넘어서aus mir und doch  über mich’ 울려 퍼진다”. 저는 이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던 건데요. 이때 ‘영혼의 목소리’라고 하는 이 ‘부름’은 ‘양심’이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일상 쓰는 도덕적인 위반과 관련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할 때의 양심과는 다른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 하이데거적으로  ‘양심’은 ‘비본래적 실존’을 영위하는 ‘세인世人das man’의 나태와 권태, 시기 질투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찾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컨대 참된 자기를 살아라,는 것이지요. 양심의 목소리는 말없이 우리를 부르면서 우리에게 본래적인 실존가능성을 개시하고 보편적인 실존가능성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기 사상에서의 ‘존재의 목소리’란? 발제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현존재는 부른 것임과 동시에 불리는 것이다.” 제 57절
◎부름의 유래가 현존재 내부에서 구해질 수 없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침입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회 이후의 하이데거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순환운동이 아니라 그것이 도래하는 국면을 문제삼는다. 이런 변화를 은유적으로 초월론적 시니피앙을 지시하는 말이 ‘부름’에서 ‘존재의 목소리’로 이동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유주가 불분명했던 부름과 달리 ‘존재의 목소리’라는 바로 ‘존재’의 목소리로서 들린다. 그것의 청취에서 현존재는 확실히 수동적 위치에 놓인다. 이제 ‘존재’는 현존재가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목소리, 부정신학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발신원의 이름으로서 기능한다. 

 

다시 앞의 논의와 관련하여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존재의 목소리’란 말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전통철학에서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존재자들의 어떤 근거로 보았는데요. 신이라든가 이데야----이런 근거도 상당히 존재자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 존재자들의 근거를 보편적 이성, 이론적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모든 존재들의 고유한 존재가 드러나는, 가장 포괄적인 열린 장을 의미합니다. 모든 걸 포괄하는 자연physis 자체의 관점을 말합니다. 현존재가 죽음을 선구先驅하면서 ‘세인’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이런 포괄적인 존재의 관점에 들어가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가장 포괄적인 열린 장, 가장 포괄적인 지평으로, 가장 포괄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고찰할 때 사물은 ‘성스럽게(경이)’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지요. 따라서 존재(‘경이驚異’에 사로잡힘으로써)의 진리에 대해 청종聽從로써 존재의 열린 터das offfene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제 ‘존재’는 현존재가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목소리, 부정신학 시스템을 안정화시키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발신원의 이름으로서 기능한다.”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의를 아즈마의 괴델적 탈구축 논리에 접목시켜 설명하는 것이 제대로 된 후기일 텐데요. 역량도 딸리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다만 현존재와 ‘부름’, ‘존재의 목소리’를 근간으로 괴델수나 클라인 병, 부정신학 시스템,  부름의 순환운동, 괴델적 균열의 봉합작용 등 아즈마의 논리를 충분히(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부정신학과 관련하여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유명한 말을 옮겨봅니다. “I pray God to rid me of God.”(나는 신에게 내 속에서 신을 제거해 줄 것을 기도합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함으로써 제한된 인식을 절대화하는 것을 피해 신을 무한한 초월자로 챙기려는(?) 이러한 방식이 바로 아즈마가 말하는 “초월론적 중심, 더욱이 역설로만 표시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중심을 설정하”는즉 괴델적 탈구축, 부정신학적 탈구축에 해당되겠지요. 끝으로 제가 지난 세미나에서  “두 레벨의 단락”이란 말을 段落으로 이해하는 바람에 어떤 의미에서 거꾸로 이해했었는데요. 최원 선생님께서 이렇게 바로잡아주셨습니다. 단락 [short-circuit]短絡 전기 회로의 두 점 사이의 절연(絶緣)이 잘 안되어서 두 점 사이가 접속되는 일).  그러고 나서 저는 段落과 短絡을 준별(峻別, 매우 엄격히 구별함. 또는 그런 구별)하게 되었고, 그 문맥의 의미도 완전 ‘봉합’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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