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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주체의 해석학》 0526 발제 +1
유택 / 2017-05-12 / 조회 1,551 

본문

부지런히 좀 일찍 올립니다. 놀라지 마셔요. 제 발제 부분(526) 읽다가 진짜 너무 은혜 입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책 안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네요. 제발 경청하라고. 좀 제에~~발 수다 떨지 말고. 말하지 말라고. 심지어 5년간 침묵하라고. 수다스러운자에게는 귀가 직접 영혼과 소통하지 못하고 혀와 직접적으로 소통한다고. 빈꽃병과 같다고. 허나 저에게 침묵만큼 힘든 게 있을까요. 즉 치료 불가랍니다.ㅎㅎㅎ (이 챕터는 완전 저를 위한 챕터였네요 어찌나 읽으면서 웃었던지.) 5년은 커녕 또 읽자마자 요약하고 수다로 떠들어 확 허공에 속절없이 뿌려질 먼지 같은 내 실존. 주체의 해석학》 정말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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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0526 발제 유택

 

1982 3 3일 강의

 

전반부

 

기독교 고행과 철학적 고행의 개념적 분리

이교도 철학자들의 고행 혹은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자기 실천의 고행은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하고 확연하게 기독교의 고행과 구분된다. 첫째, 자기 포기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실존의 목표로 설정한다. 둘째, 생에 있을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장비를 자기 자신에게 마련해 주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은 paraskeue라고 불렀다. 셋째, 개인을 법에 종속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 개인을 진실에 연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기독교의 고행에서는 핵심적인 단계로서 참된 담론 내에서 자기 자신의 객관화를 거치는 자기 포기 활동이 발견된다. 그러나 기원후 1,2세기 이교도의 고행, 철학적 고행, 자기 실천의 고행에서는 생의 기술과 삶의 기술의 목적이자 대상인 자기와 만나는 것이 관건이다. 결정적 계기로서 참된 담론 내에서 자기의 대상화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가하는 자기의 실천과 수련 속에서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계기와 더불어 자신과 만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주체화의 실천 : 경청 훈련의 중요성

참된 담론의 주체화인 고행의 항구적인 근간이 되는 바는 경청, 독서, 말한다는 사실과 관련된 모든 기술과 실천이다. 경청(듣기)은 고행과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첫 걸음,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구두적이었던 문화에서 경청은 logos와 진실된 바를 취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경청은 결국 들리는 진실, 적절히 경청되고 취합된 진실이 주체에 박히고 각인되어 suus(자기 것)가 되기 시작하고 ethos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절차의 첫 단계가 된다. 듣기와 청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pathetikos하며 logikos하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한다. 가장 pathetikos하다는 것은 모든 감각 가운데서 그것이 가장 수동적이다로 번역된다. 영혼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청각에서 외부 세계에 대해 가장 수동적이 되며, 또 외부 세계로부터 오고 불시에 영혼을 엄습할 수 있는 사건들에 노출된 상태로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청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정념적이고 또한 가장 logikos하다. Logikos를 통해 플루타르코스가 의미하려 하는 바는 청각이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logos를 더 잘 받아들이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각은 pathetikoslogikos라는 근본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 있는 경청의 애매모호한 속성 : 플루타르코스의 《경청에 관한 논설》 ; 세네카의 백여덟번째 서신 ; 에픽테토스 어록II,23

플루타르코스는 청각이 pathetikos하고 동시에 logikos한 감각이기 때문에 양의적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네카는 청각의 양의성을 다시 취하지만 이 pathetikos를 결과적으로 장점과 단점을 갖는 양의성의 원칙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철학 수업은 대단히 유익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수동적으로 있다 할지라도 항시 뭔가가 남는다고 그는 말한다. Logos가 귀 속으로 침투하여 주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영혼에 logos의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무엇인가 항시 남는 게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하숙인이나 임차인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철학학교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 이유는 관심이 잘못 유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절치 않은 대상이나 목표로 향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 필요하고 경청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입말 행위와 교육을 통해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logos를 경청하고 전승된 입말과 교육인 paradosis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나라한 방식으로 진실을 전승할 수 없다. 그래서 경청하는 자의 영혼에 진실이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은 발화되어야 한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lexis. 말하는 방식이다. 둘째로, 사물을 지시하는 용어들을 선별해야 한다.

 

Tekhne로 고민하는 경청

적절하게 유용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공허하고 해로운 방식으로 말하지 않기 위해서는 tekhne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청하기 위해서는 empeiria, 다시 말해서 자질, 경험, 요컨대 후천적인 수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tribe(열중, 근면한 실천)도 필요하다. 하지만 empeiria tribe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것들 외에도 tekhne 같은 것이 필요하다. Tekhne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한다. 의학과 웅변술은 tekhne이다. 반면에 epeiria tribe의 경우 인식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조건하에서 에픽테토스에게-요컨대 자기 실천과 연관된 경청에 관한 모든 성찰에서-왜 자연스럽게 경청이 tekhne로 규정되지 않는지를 알 수 있다. 말하기 위한 tekhne는 존재하지만 경청을 위한 tekhne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청의 고행적 규칙들 : 정숙 ; 훌륭한 경청자의 정확한 제스처 ; 주의(담론과 관련한 애착과 즉각적인 기억을 통한 담론의 주제화)

아직은 tekhne가 아닌 근면하고 규칙화된 경청의 실천은 어떻게 출현하는 걸까? Pathetikos한 부분과 logikos한 역할을 하는 양의적인 경청이 문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범위 내에서 해로울 수 있는 무의지적인 수동성의 효과를 제거하면서 logikos한 역할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이다. 경청에 몰두하는 실천에서 논리적 경청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로 세 가지 수단을 통해 정화할 수 있다.

첫째, 정숙이다. 5년간의 정숙이 있다. 참된 담론의 자격을 갖는 logos와 관계할 때마다, 참된 담론의 실천과 훈련에 들어갈 때마다 초심자인 사람은 말할 권리가 없었다. 수다는 배우기 시작하고 철학에 입문할 때 치유해야 할 첫 번째 악덕이다. 들은 바를 간직하며 즉각적으로 말로 변형시키는 것을 삼가 해야 한다.

둘째, 능동적 태도가 필요하다. 신체의 부동성과 정형성,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는 신체의 자태는 대단히 중요하다. 신체의 부동성은 도덕성의 보증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몸짓의 몰상식성과 신체의 항구적 유동성은 영혼, 정신, 주의의 항구적인 동요이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한 관심 지점으로부터 다른 관심 지점으로 나아가며 항구적으로 비약을 행하는 effiminatus, 즉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항시 수동적이며 자기 자신에게 egkrateia, 요컨대 제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남자라는 의미에서의 여성화된 남자에게서 그 도덕적 버전을 갖는 stultitia의 신체적 버전과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는 주의의 질을 보장하고 logos가 영혼을 침투하게 해주는 조상의 부동성과 수강자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연사의 말을 잘 듣고 있고 잘 이해했음을 보증하며, 또 동시에 연사의 담론과 설명의 리듬을 안내하는 신체의 기호학적 운동이라는 이중적인 지식의 영역이 존재한다. 따라서 훌륭한 철학 수강생에게 요구되는 것은 능동적이고 의미 있는 정숙이다.

셋째, 일반적인 태도와 관련된 규칙 혹은 보다 일반적인 원칙도 있다. 신체적 태도만 단순히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수강생에 있어서 일종의 격려, 즉 스승의 담론을 고무하고 지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고 그가 말하도록 어떻게 자극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 시대, 제자의 육체적이고 영적인 아름다움은 필요 불가결하며 스승의 eros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에픽테토스의 경우 스승의 담론에서 진실 경청의 탈에로스화가 이루어진다.

우선은 정숙 다음으로 신체적 태도, 경청하는 동안의 정확한 태도, 신체의 전반적 태도, 개인과 자기 신체와의 관계를 푸코는 언급했다. 그 다음으로 순전히 주의에 관한 규칙들을 살펴보자. 철학적 담론은 상당수의 장식 없이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철학적 담론은 진실을 찾는 사람의 능동적인 주의를 통해 경청되어야 한다. 필연적으로 양의적인 담론을 정확히 들으며 자신의 주의를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것이 수강자의 작업이다. 그래서 적절한 철학적 경청에 필요한 이중적인 두 갈래의 주의 작업이 관건이다. 한편으로 단정이 명령의 가치를 지니는 순전히 철학적인 의미인 pragma의 응시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들은 바를 기억하며 그것이 영혼의 내부에 새겨져 차츰차츰 주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시선이 있다.

 

후반부

 

적절한 독서 실천 규칙과 그 목적의 부여 : 명상

많은 저자들의 글을 읽지 말고 많은 작품과 텍스트를 읽지 말며 입문자는 입문을 이미 완료하여 교의의 근본 원칙들을 재활성화하고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중요하고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구절을 선별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교의를 인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흡수했어야 하고 그것을 발화하는 주체가 되었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그것은 요약의 실천이다. 독서를 통해 명상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며, 이것이 독서의 주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주체에 대한 사유 활동으로서의 melete/meditatio의 의미

Melete는 훈련을 의미한다. Meletan는 사유의 자기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텍스트가 의미하려 한 바를 자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다. 사유의 자기화 훈련은 주해를 지향하지 않는다. 역으로 Meditatio와 더불어 사유를 자기화하고 그것을 깊게 확신하여 한편으로 그것을 진실 된다고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하다거나 기회가 되는 대로 그것을 부단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 즉각적으로 회상하고 그것을 수중에(prokheiron) 지닐 수 있도록 이 진실이 정신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은 이 참된 사물로부터 진실을 사유하는 주체가 되며 진실을 사유하는 주체로부터 적절히 행동하는 주체가 된다. Meditatio에서 사물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하는 사물을 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는 것은 인간이 죽을 것임을 사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실제적으로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음의 관념에 그 결과가 될 상당수 다른 관념들을 연결시키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명상하기란 사유를 통해 죽어가고 있거나 죽게 되거나 생의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주체와 그의 사유 혹은 사유들간의 작용이 아니라 주체에게 사유가 가하는 작용이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작용이 문제시된다. 그것은 사유를 통해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 절박하게 죽을 사람이 되게 하는 결과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모든 것이나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주체의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를 탐구하기 시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사유와 그 내용에 대한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가 사유를 통해 어떤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훈련이다. 사유의 효과를 통해 현재의 자기와 관련해 주체를 이동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푸코가 논의하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하던 철학적 독서가 가져야 하는 명상적 기능이다.

 

담론 흡수의 신체적 훈련으로서의 글쓰기

Meletan은 독서하는 텍스트에 의해 지지를 받는 사유의 훈련이고, graphein은 글쓰기이며 gumnasein은 실제로 단련하다 시련과 실제적 시험을 받아들이려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읽고 쓰고 쓴 것과 노트한 것을 다시 읽는데 있었던 훈련은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진실과 logos를 자기화하는 준 신체적 훈련이었다. 독서 이후에 독서한 바를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읽어 타자의 입으로부터 들은 바나 타자의 이름 하에 읽은 진실된 담론을 자기화하기 위해 글로 쓴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활용이지만 타자에게도 유용한 활용이다. 독서나 대화 그리고 강의에 대한 노트는 hupomnemata라 불린다. 이것은 독서나 기억 훈련에 힘입어 말해진 바를 다시 상기할 수 있기 위해 하는 기억의 요약 메모를 의미한다.

 

주체화/진실 말하기의 순환으로서의 서신 교환

타자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그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면서 소위 나는 개인적인 이런 훈련을 부단히 수행하고 타자에게 호소하지만 나 자신에게도 호소하는 신체 운동을 부단히 수행하며 이와 같은 서신 교환을 통해 부단히 자기 관리의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신체 운동을 수행한다. 우리가 타자에게 하는 조언은 우리 자신에게도 한다. 독서, 글쓰기, 자신을 위한 메모, 서신 교환, 논설 교환이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를 구축하는 지극히 중요한 실천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영성에서 말하는 기술 : 지도자의 참된 말의 제 형태 ; 피지도자의 고백 ;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진실 말하기(dire-vrai)

기독교의 영성 내에서 상이한 형식 규칙, 전술, 그리고 상이한 제도적 근간을 수반하는 스승의 담론이 있지만 푸코가 하려고 하는 분석에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바는 피지도자-진실과 구원으로 인도되어야 하는 자, 결과적으로 아직도 무지와 타락의 차원에 있는 자-가 아무튼 무엇인가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이다. 피지도자는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고 일정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이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 말하기의 의무가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절차 내에 기입된 순간, 주체 자신에 의해 주체 구축 및 변형 기술 내에 기입되었을 때, 교화목사 제도의 내부에 각인되어 버린 순간 이 모든 것은 서구 주체성의 역사에서나 주체와 진실간의 관계의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한 순간을 구축한다. 하지만 주체가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아니면 개인이 자기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과 일반적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원칙은 고대 그리스/헬레니즘/로마 시대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승의 담론에 의해 진실로 인도를 받는 자는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서구의 역사에서 지도와 인도를 받는 자는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 즉 고백의 의무 내에서만 말할 권리를 갖는다. 고백의 요소들은 도구적이지 수행적이지 않다. 고백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서 영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바로 고대의 자기 실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컨대 주체는 진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주체는 진실된 담론을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에게 제안된 참된 담론들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주체화를 시행해야 한다. 따라서 주체는 진실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진실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된 바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주체가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거나 필요 불가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로마의 지도 행위 : 피지도자측에서 용의주도한 정숙을 통한 진실의 주체를 구축하기 ; 스승의 담론에서 parrhesia의 의무

Parrhesia는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 측의 정숙의 의무에 화답하는 바이다. 자신의 담론을 주체화하기 위해 주체가 침묵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승은 자신이 말하는 진실된 바가 행위와 지도가 끝날 무렵 제자가 주체화 시키는 참된 담론이 되기를 원한다면 Parrhesia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Parrhesia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솔직, 마음을 열기, 언어의 개방, 말의 자유)를 의미한다. 라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Parrhesia libertas로 번역한다. 그것은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바처럼 인간은 logos를 사용하므로 lexis(사물을 일정하게 말하는 방식)가 있어야 하고, 또 선택되어야 할 상당수의 어휘들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고유한 특질과 정형성을 가지며 필연적인 감동 효과를 갖는 언어체가 없이는 logos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자인 경우 이 요소들(언어적 요소, 영혼에 직접 영향을 주는 요소)을 조절하는 방식은 수사학의 tekhne나 기술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테크닉이자 윤리이고 기술이자 도덕인 parrhesia라 불리는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스승의 담론은 유혹의 담론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자의 주체성이 자기화할 수 있는 담론이어야 하며, 제자가 그 담론을 전유하여 그의 목표인 자기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담론이다. 진실된 담론의 이러한 표명 규칙을 parrhesia libertas라고 한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ㅎㅎㅎ 이 분 또 은혜받아서 3주 먼저 발제문 올리는 기행을 ㅎㅎㅎ
이번 푸코 영빨은 오래 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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