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사기세가 #4 - <초세가>, <월왕구천세가>, <정세가>
기픈옹달
/ 2017-05-13
/ 조회 1,413
관련링크
본문
1. 초세가
내용이 매우 방대하다. 전욱 고양씨의 후예부터 시작해서 진시황의 통일까지 전개되니 당연히 길 수밖에. 사마천은 초가 전욱의 후예임을 이야기하며 그들 역시 전설상의 인물, 황제皇帝의 후예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초는 시작부터 중원의 뭇 나라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웅거는 스스로 왕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랑캐(만이)이다. 중국과 시호를 함께 쓰지 않겠다. (我蠻夷也 不與中國之號謚)” 앞서 초는 주성왕 시대에 자남子男의 지위를 얻고 미씨羋氏 성을 받았다. 그러나 주 왕실과의 관계는 그리 긴밀하지 않았다. 초는 호시탐탐 주를 침략할 기회를 노렸다. 이 때문에 초는 일찍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였다.
초나라의 여러 왕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세 번째 패자로 이름을 올린 초장왕이다. 장왕의 아버지 목왕 상신은 아버지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상신은 자신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한 것에 분노하여 군을 일으켜 성왕을 포위했다. 이때의 사건이 재미있는데 성왕은 ‘곰 발바닥 요리’를 먹고 죽기를 원했다 한다. 김원중의 설명에 따르면 요리에 오랜 시간이 걸리니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고자 꾀를 낸 것이라고. 그러나 상신은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성왕은 목을 매어 죽는다.
성왕 시대에 송양공을 친 것에서 볼 수 있듯 초의 국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왕은 강력한 통치를 위해 즉위 초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왕이 되었건만 아무 하는 일 없이 향락에 빠져 살뿐이었다.
莊王即位三年 不出號令 日夜為樂 令國中曰 有敢諫者死無赦 伍舉入諫 莊王左抱鄭姬右抱越女 坐鐘鼓之閒 伍舉曰 願有進隱 曰有鳥在於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莊王曰 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 舉退矣 吾知之矣 居數月 淫益甚 大夫蘇從乃入諫 王曰 若不聞令乎 對曰 殺身以明君 臣之願也 於是乃罷淫樂 聽政 所誅者數百人 所進者數百人 任伍舉蘇從以政 國人大說
3년간 울지 않고 날지 않았던 새는 힘을 모으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단지 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때를 보아 크게 날아오를 때를 엿보고 있었다. 여악女樂을 가까이했으나 이는 그 주변 인물을 살피기 위한 방편이었다. 왕의 그런 행동을 보고 누구는 마음 놓고 악행을 저질렀고, 누구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백 명을 죽이고, 수백 명을 들어 쓴 것은 3년간 신하들의 행적을 살폈던 결과였다.
그는 송을 친 뒤 주의 수도 낙읍에 까지 이른다.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에 관심을 갖지만 구정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천자의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주의 왕손만은 이렇게 말한다. “周德雖衰 天命未改 鼎之輕重 未可問也” 주나라가 쇠락했다 하나 천명은 여전히 주에게 있다. 그러니 구정에 대해 물을 수 없다. 결국 초는 군대를 돌려 돌아간다.
초평왕은 오자서의 원수가 된 인물로 유명하다. 사건은 태자의 부인으로 맞이한 진나라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으며 시작한다. 평왕은 태자의 세력을 미워하여 그 주변 인물을 해하는데 그 가운데는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가 있었다. 평왕은 오사와 그 두 아들을 모두 죽이려 했으나 오사와 그의 첫째 아들 오상을 죽이는데 그친다. 평왕으로부터 도망친 오자서는 훗날 오의 군대를 끌고 초의 수도에 까지 이른다. 그가 평왕의 무덤을 열어 시체를 꺼내 매질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오자서열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초회왕은 불우한 인물이다. 그의 시대에는 진의 세력이 매우 강성했는데 그는 진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진의 계략에 걸려 진에 구금된 채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활약한 인물이 장의, 이 상황을 보고 비탄에 빠진 인물이 굴원이었다. 이 둘은 <소진장의열전>과 <굴원가생열전>을 통해 만나도록 하자.
이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앞서 나오는 진진과 소양의 대화가 흥미롭다.
今君已為令尹矣 此國冠之上 臣請得譬之 人有遺其舍人一卮酒者 舍人相謂曰 數人飲此 不足以遍 請遂畫地為蛇 蛇先成者獨飲之 一人曰 吾蛇先成 舉酒而起 曰 吾能為之足 及其為之足 而後成人奪之酒而飲之 曰 蛇固無足 今為之足 是非蛇也 今君相楚而攻魏 破軍殺將 功莫大焉 冠之上不可以加矣 今又移兵而攻齊 攻齊勝之 官爵不加於此 攻之不勝 身死爵奪 有毀於楚 此為蛇為足之說也 不若引兵而去以德齊 此持滿之術也
사족蛇足의 고사. 사족이란 쓸데없이 지나친 것을 가리킨다. 더불어 여기서 말하는 것이 ‘持滿之術’, 가득 참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법. 가득 차면 어쩔 수 없이 비워낼 일만 남는다. 사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가득 채웠기 때문에 화를 입는 인물이 얼마나 많은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있는 것처럼 그 이전에 복이 화가 되기도 한다.
2. 월왕구천세가
월왕 구천은 오왕 합려, 오왕 부차 부자와 원수를 진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오왕 합려를 상대하여 그의 군대를 쳐부순다. 이 전쟁의 결과 합려는 목숨을 잃고 아들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아주기를 청한다. 이어 부차는 결국 구천을 꺾는다. 구천의 남은 군대가 회계산에 들어가 오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범려는 이렇게 말한다. ‘持滿者與天 定傾者與人 節事者以地’ 구천은 그의 말을 따라 한때의 치욕을 감수하고 새롭게 복수를 꿈꾼다.
吳既赦越 越王句踐反國 乃苦身焦思 置膽於坐 坐臥即仰膽 飲食亦嘗膽也 曰 女忘會稽之恥邪 身自耕作 夫人自織 食不加肉 衣不重采 折節下賢人 厚遇賓客 振貧弔死 與百姓同其勞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바, 아무리 치욕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 도리어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곁에 쓸개를 두고 그 쓰디쓴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다. 집요한 인간만이 치욕을 갚는다.
결국 구천은 오왕을 꺾는데, 이는 오왕이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복수를 경험한 오자서, 구천과 범려를 꿰뚫어 본 그의 말을 오왕 부차가 들었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러나 부차는 자신의 힘을 믿고 오자서의 말을 내치는 것은 물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월왕 구천은 오왕이 크게 세력을 떨쳐 중원으로 군사를 내어 나간 틈을 빌어 오를 공격 한다. 오를 꺾고 구천은 패자의 칭호를 얻는다.
范蠡遂去 自齊遺大夫種書曰 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種見書 稱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劍曰 子教寡人伐吳七術 寡人用其三而敗吳 其四在子 子為我從先王試之 種遂自殺
범려는 물러날 때를 아는 인물이었다. 환란을 함께 할 수 있다 하여 즐거움을 함께 할 수는 없다. 고통을 함께한 사이라도 즐거움에 동참할 수는 없는 법. 원수를 갚을 때, 그 치욕의 시간에 함께한 범려와 문종은 이제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이에 범려는 스스로 자리를 내던지고 새로운 길을 찾는다. 그 후 범려는 만금의 돈을 가진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한다. 시세를 읽는 그의 눈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
3. 정세가
정세가에는 크게 주목이 가는 내용이 별로 없다. 정자산이 유명한 인물이기는 하나 그의 행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정자산은 공자가 숭상한 인물로 유명한데 정작 <사기>에서는 별다른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공을 둘러싼 사건이 흥미로운데, 그는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러 부침을 겪는다. 군주는 여공이었으나 제중이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에 여공은 제중의 사위 옹규를 이용하여 제중을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이 옹규의 부인, 즉 제중의 딸 귀에 들어간다. 그는 어머니에게 상의를 한다. 아버지를 편들까 아니면 남편을 편들까? 어머니의 대답이 흥미롭다.
糾妻 祭仲女也 知之 謂其母曰 父與夫孰親 母曰 父一而已 人盡夫也 女乃告祭仲 祭仲反殺雍糾 戮之於市 厲公無柰祭仲何 怒糾曰 謀及婦人 死固宜哉
아버지는 하나, 그러나 누구나 남편이 될 수 있다. 훗날 불사이부不事二夫의 관념에서 보았을 때 과연 이 고사는 어떻게 읽혔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아버지와 남편 가운데 누가 더 귀하냐는 식의 물음이 던져질 사건이 있을 수 있었을지.
이 사건으로 여공은 군주의 자리에 쫓겨난다. 훗날 그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는데 그를 돌아보지 않았던 백부를 꾸짖는다. 그런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入而讓其伯父原曰 我亡國外居 伯父無意入我 亦甚矣 原曰 事君無二心 人臣之職也 原知罪矣 遂自殺 厲公於是謂甫假曰 子之事君有二心矣 遂誅之
신하 된 자는 두 마음을 가지고 군주를 섬겨서는 안 된다. 불사이군不事二君!! 군주에 대한 신하의 윤리는 언뜻 보이나 지아비에 대한 여인의 윤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훗날이야 하늘 아래 두 군주가 없듯, 두 지아비가 없다는 식의 윤리가 나오겠지만 사마천의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다.
첨언하면 두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이야기는 <사기>에서 매우 예외적이다. 군주를 져 버린 인물이 얼마나 많은지. 윤리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날 것 그대로의 역사, 힘의 강렬한 투쟁, 대립, 전복 등이 <사기>를 채우고 있다. 훗날의 딱딱한 윤리에 먹힌 창백한 얼굴로는 <사기>를 잘 읽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