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주체의 해석학》 0512 후기 +3
유택
/ 2017-05-13
/ 조회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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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0512 후기
우선 시대를 나눕니다. 플라톤주의 모델 -> 헬레니즘 모델 -> 기독교 모델입니다. 플라톤주의는 이데아의 세계를 지향하지요. 그래서 일명 상기(Remind)모델입니다. 지금 이 현실은 거짓/모상이고 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기독교모델은 성서주해 모델입니다. 해석에는 권위자가 필요하지요.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푸코가 지금 다시 불러서 살펴보고 싶어하는 ‘사유의 방식’인 헬레니즘 모델은 어떤 것인가요? 입에 붙지도 않는 숱한 단어/문장들을 나열할 수 있긴 한데 저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개념들이라 짧고 굵게 간단한 몇 단어로 요약할 수가 없습니다. 잘 모르면 설명이 길어지잖아요. ㅠ 책에서는 이렇게 요약해놓았네요. ‘헬레니즘’ 모델은 자기와의 관계의 자목적화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로마헬레니즘 모델의 ‘자기배려/자기인식/자기사유방식’이 대체 어떤건지 대해서 이번 강의 전부를 할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배려의 시작은 자기 인식입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자기배려때 나온 이야기이지요. 그러고나서 기원전후 1,2세기 자기배려의 황금기(로마헬레니즘시대) 들어서면서 자기배려는 일반적이고 무조건적인 원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각각에게 보편화의 이름으로.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주체의 존재 전반의 문제로서 말이지요. 앞 번에도 나왔던 자기전향/자기로의 급선회의 문제, 즉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동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항해 해야 합니다. 오딧세이아처럼. 부단한 자기를 향한 이동/여정/노력/운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 윤리의 생산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이야기 됩니다. 도덕과 윤리는 다른 것입니까? 다른 것이라고 세미나 시간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도덕은 권위/외부에서 주어져서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라면, 윤리는 주체인 자기 자신이 진실된 바에 의거하여 스스로 자기 윤리의 생산이 가능하고 구축될 수 있습니다. 푸코는 묻습니다. 이 시대에 자기 미학과 자기 윤리를 구축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냐고요. (이 푸코의 질문이 제가 끼억끼억 푸코를 공부하려고 발악하는 이유겠지요^^;;;)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에서 필요한 주체의 윤리 그리고 정치의 문제. 음… 어렵네요 ㅠㅜ 오늘날 자기 윤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여태까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푸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푸코 본인이 그것을 연구해보겠다 자기 윤리와 자기 미학을 스스로 구축해가는 유동하는/구촉되는 주체의 개념을 만들어보겠다 즉 로마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사유 방식을 모티프로 해서 말이지요.
로마헬레니즘 시대에 산재해 있던 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는 그 각각이 시대순으로 나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서로 겹쳐지기도 하면서 넓게 그 시대에 고르게 듬성듬성 퍼져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하네요. 이 학파들의 생각과 실천들이 모여서 로마헬레니즘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니까요.
기독교는 도덕이 부재합니다. 놀랍지요. 그 반대일 것 같은데요. 헬레니즘 시대의 엄격한 도덕체계를 기독교가 차용하여 소위 ‘기독교 모럴’이라는 것으로 수용/변화 시켰다고 보면 된다고 합니다. 이번 세미나 시간에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서양 사회는 여전히 기독교 문화가 일상 생활에 전반적으로 녹아 들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동양은 다르지요. 그래서 푸코가 한참 활동하던 시대뿐만 아니라 그 몇 세기 이전에도 서양의 사상에 자극을 주는 요소로서 동양의 사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구축되어가는 주체의 개념도 사실 엄청 동양적인 느낌이다 70년대 푸코의 생각이 그 시대 유럽 사람들에게보다 오히려 동양 사람들에게 좀 받아들이기 편한 거 아니냐 하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스토아의 두 거장, 우리의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길게 나옵니다. 세네카.. 참 좋은 말 많이 하지요. 듣기는 좋은데 듣고땡 참 고리타분한 느낌 또한 있습니다. 생을 땡겨 완수하라는 말도 웃기고 늙기 위해(즉 제대로 철학 하기 위해) 빨리 젊은 생을 허비하라는 말도 웃기고요. 근데 뭐 어쨌든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런 말을 했다 공부하는 우리들 입장이니 그런가 보다 합니다. 앞 번 시간에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의 유용한 앎과 무용한 앎이 대비, 에피쿠로스 학파의 교양으로써의 지식과 생리학의 대비가 나왔었지요. 그래서 저건 좋고 이건 안 좋고 막 나누었었는데요. 스토아의 세네카는 비슷한거 같지만 또 다르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인간/자연에 대한 지식은 싸그리 유용하다고. 모든 지식은 생활의 기술로써 쓸 수 있고 써야 한다고. 쓸모 없는 것 없다고. 다 쓰시라구~! 아주 실용적인 느낌이네요. 그러면서 세네카는 그러지요. 첫째 생의 완결인 충만성에 빨리 도달하여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라 즉 자기 예속에서 벗어나되 자기 자신으로 제발 돌아가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 아이러니한 표현. 둘째, 역사적인 지식 즉 남 이야기는 다~ 쓸모없다 니 자신과 니 이야기에 제발 아까운 니 삶을 허비해라. 또 자기 예속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걸 요구하지 말고 이윤이 되는 일과 자신을 결부시키지 말라는 무슨 훈장님 같은 소리도 나오고요. 틀린 말은 아닌데 참 재미없고 듣기 싫은 말! 세네카의 책은 현재에도 여전히 자기수양의 본보기로 많이들 읽힌다고 그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번 챕터 읽다가 빵~ 터진 말은 ‘굽어보는 시선’입니다. 세계를 주파하는 주체의 시선 그러나 실제적으로 주체가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한 점에 오롯이 박혀 있음에도 한없이 높고 멀리 확장될 수 있다는 말이 꼭 앉아서 Nomad를 할 수 있다는 들뢰즈 식의 정신 승리 같다는 이 떨칠 수 없는 느낌. 자기를 초극했으나 온전히 내 자신 안에 머무른다는 야릇한 말장난 같은 느낌. 온 세계의 총체적 질서를 볼 수 있는 지극히 중심적이고 동시에 지극히 높은 지점에 위치할 수 있다는 생각.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 아니라 훅 후퇴했고 확 확장되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된 듯 하나 여전히 그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결국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더 큰 맥락으로 굽어볼 수 있다는 멋진 이 말! 위에 나열한 발췌 말/문장들이 정말 멋지긴 한데 전 왜 이렇게 조용히 혼자 우습지요? 그건 아직 그 말들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이겠지요. 책 뒷부분 내용들은 시간 관계상 이야기 많이 못해 조금 아쉽네요. ^^ 후기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뉴미님의 댓글
뉴미
309 - 310쪽에 걸쳐 있는 부분... 특히
'내재성이 문제시 되지 않는 한 점'
저는 이 부분을 쉽사리 넘어가지 못하고 이해가 안되었는데,
다시보니 내재성을 '내포'적 관계 개념으로 오인했어요.
내포적 관계라니?
자기를 인식하는 것 < 자연을 인식하는 것
자기-->점, 자연-->점, 자기--자연 (점과 점을)(연결)
자기 < 자연(X), 자연 < 자기(X), 자기--자연(O)
"자기 인식과 자연 인식은 '내포적' 관계가 아니라 '연결된' 관계..."
대개 이런식으로 이미지화(GIF)하거나 도식화 하면서 제 나름의 이해를 하려다보니,
논지 파악이 늦어지고, 읽기에 장애가 되는거(되었던거) 같아요.
'자기 인식'과 '자연 인식' 관계 정리!
예속상태, 악덕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자기로부터의 도주'로 완결되는데,
이 때, 자연을 인식하는 것이 '자기로부터의 도주'를 돕는다.
'자기 인식'은 자기 안에 '내재된'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인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기 인식(혹은 자기 배려)'의 완결은 결코 양자택일이 될 수 없는 '자기 인식--자연 인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유택님 "한 점에 오롯이 박혀 있음에도"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한 점이 아니라 두 점, 혹은 두 개 이상의 점(천 개의 점, 그 이상의 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
한 점에 오롯이 박혀 있다기 보다는, 천 개의 점이 연결되어 있음을, 그 확장을 '굽어보는 시선'으로 이해돼요.
(제 나름의 이해하기로는요)
소리님의 댓글
소리
언제나 성실한 유택! 피곤할텐데도 어쩜 이렇게 세미나 있었던 일들을 유택의 관점에서 잘 정리했는지!
참 대단!! 따봉
도덕 투성이의 답답할 것만 같았던 기독교는 푸코에 의하면 규율이 있었을뿐, 막상 도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택의 표현처럼 훈장님 같은 세네카가 말하는 스토아 철학은 자기만의 도덕을 만들라고 말하는
모호하고도 구체성이라고는 1도 없는 내용을 말해주었지요.
두 번째 읽는 <주체의 해석학>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으로 제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에는 '이거 뭐야? 고상한 말투의 자기개발서야 뭐야'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 읽을 때에는 자신을 위한 고상한 자기개발에는 찬성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기개발에는 자신을 통치하고 타자를 통치하는 의미에서의 자기 개발이겠지만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래서 뭐 도덕 어떻게 만들라고?'라는 의문이 듭니다.
유택이 빵터졌다고 하는 '굽어보는 시선'도 그런 맥락에서
약간 공허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세네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는 깊이 동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네카의 주장처럼 "일상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는 앎"이 되기 위하여,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그니까 일단 명상을 해봐?' 이런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명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명상 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고.
지금 내게 필요한건 뭔가. 싶고.
어쩌면 그냥 지금의 내 마음 속이 혼돈의 카오스 상태라 세네카와 푸코의 차분한 말들이 제대로 안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이상한 제 안의 저항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대체 뭘 어떻게 굽어보라고.' 하는 조급한 저항감이요.
후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세미나 복습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내가 푸코를 못 놓지...각설하고 그럼 다음주에 뵐게요.
뉴미님의 댓글
뉴미
니체가 <우상의 황혼>(지금 읽고 있는) 에서 세네카를 언급할 때
"내가 용인할 수 없는 자들 - 세네카 : 또는 덕의 투우사" 라고 했는데요, (다른 추가적인 언급은 없고요)
아마도 투우사의 숙명적 싸움, 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삶의 무게를 (지나치게) 짊어진,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지나치게 내면화되고, 지나치게 심오해져버린'
그러니까, 덕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한게 아닌가 싶었어요.
또, 인간의 위대함이 '그가 다리(교량)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고 말하는
니체가 보기에도 '생의 완수'라는 표현은 아주 거슬렸을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