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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주체의 해석학> 0428 발제문
삼월 / 2017-04-27 / 조회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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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를 하면서 이 부분 발제를 했었는데, 앞에 지난 주 공부한 부분이 좀 끼어있네요.

뺄까 하다가 복습 삼아 그대로 둡니다. 전체 길이는 별로 길지 않아요.


주체와 진실

  푸코가 관심을 갖는 문제와 방식은 주체가 자신 또는 진실과 맺는 관계를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푸코는 이번 시간에 주체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이 주제는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내 존재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할 것인가'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고대 철학은 주체가 변형되지 않고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근대과학의 영향을 받은 데카르트와 칸트는 진실에 대한 접근에서 이 주체의 변형을 소거하려 했으나, 그들이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인식에 가까웠습니다. 푸코는 이 근대의 철학들에서 다시 고대로 돌아가 주체가 진실과 맺는 관계에서 변형의 문제, 즉 ‘철학과 영성’의 문제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푸코가 새롭게 조명해주어 우리를 놀라게 한 ‘영성’과 ‘구원’의 개념들이 여기에 다시 등장합니다.

 

구원에서 타자, 우정의 문제

  구원은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구축되었고, 자기 내에서 완결을 추구하는 자기 관계의 목적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타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푸코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정 문제를 거론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우정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유익성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우정과 유용성 간에는 다소간의 대립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유용한 관계를 유지할 때 우정은 바람직한 것이 됩니다. 이 우정은 세계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서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정개념이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우정은 자기 돌봄에 속하고, 자기를 돌보기 위해 친구를 가져야 합니다.

  스토아학파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합리적인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로서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돌봄은 타자에 대한 돌봄과 연결됩니다. 이 문제는 자신의 존재 전반이 타자에게 향해야 하는 개인인 군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신이 자기 돌봄을 통해 황제의 임무를 받아들이고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밝혔습니다. 이런 과정들에서 자기 돌봄과 타자에 대한 돌봄의 관계가 역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타자를 돌보기 위해 자신을 돌보았다면, 이제 타자에 대한 돌봄은 자기를 잘 돌본 데 대한 결과로 따라오게 됩니다.

 

개종과 전향

  푸코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이런 변화를 ‘자기 자신을 향한 급선회’라고 봅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자신을 돌보고, 자신에게 몰두하고, 자신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이 회귀는 개종이나 ‘전향’(epistrephein)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향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19세기 프랑스혁명 시기에 전향은 ‘혁명으로의 전향’을 의미했지만, 혁명이 정당활동으로 이행하면서 혁명을 포기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푸코는 거기에서 벗어나 다시 기원후 1,2세기의 자기 전향으로 돌아갑니다. 우선 플라톤이 epistrophê라고 불렀던 것은 외관으로부터의 방향 전환,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자신을 돌보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 본질이나 진실, 절대존재의 본향으로 되돌아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승과 저승이라는 이분법적 세계의 대립을 조건으로 인식의 특권에 의해 작동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진실된 바를 인식하는 것이고, 진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됩니다.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전향(conversion)은 플라톤의 경향과는 다릅니다. 자기 수양이 문제가 된 이 시대에는 우리가 소관이 아닌 바로부터 우리의 소관인 쪽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려 합니다. 이 전향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자기 자신과 완벽하고 완결적이며 적절한 관계 설정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때 인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훈련이나 실천과 같은 자기 수련이 중요해집니다. 이 전향은 기독교의 개종(metanoia)과도 다릅니다. 기독교의 개종은 주체의 존재방식을 동요시키고 단번에 변형시키는 갑작스러운 사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주체 내부의 단절에 의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전향은 주체 내부의 단절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의 단절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것이며, 자신을 목표로 삼고,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도달하거나 되돌아가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개종을 타동-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전향은 능동-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는 길고 연속적인 절차입니다.

  플라톤의 epistrophê와 기독교의 metanoia는 서구의 사상·영성·철학 내에서 양극으로 대립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conversion이라 부르는 주체의 변형과 변화 방식에서 근본적인 두 형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식 말고 다른 도식과 방식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푸코는 플루타코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텍스트들을 예로 듭니다. 이들은 ‘너 자신을 알라’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이때 이들이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응시하라는 것입니다. 타자에게 가지는 불필요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몰두하기 위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식의 대상, 의식과 무의식의 장으로 자기를 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 집중하는 동안 늘 각성되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여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과 나 자신을 분리시키는 도정을 사유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신과 내가 도달해야 하는 자신은 같은 자신이 아닙니다.

 

진실-말하기와 주체의 실천

  푸코가 이 시선 돌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여기에 진실-말하기와 주체의 실천 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푸코는 이 실천이 자기와 타자에 대한 통치라고 보았습니다. 기독교 이전 고대 사유에서 이 문제를 봄으로써 사물에 대한 앎이 어떻게 자기 회귀로 연관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무에 대한 인식과 사람에 대한 인식 중 사람에 대한 인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서구의 고대철학은 대부분 자연보다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익한 앎과 무용한 앎

  사회에 잘 적응한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는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분의 기준입니다. 이 구분에 의해 자연은 알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자연이 사물의 원인을 인식하는 일의 무용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메트리우스는 자연에 대한 앎이 교양적 지식, 장식적 지식이라고 비판합니다. 반대로 데메트리우스가 알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 것은 만인이 세계라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 모이고, 세계가 우리의 거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관계적 앎이고, 거리와 매개 없이 연대적 명령으로 주어진 지식, 명령적 확인입니다. 이 진리는 그대로 계율이 되고, 획득하자마자 주체의 존재방식을 변형시키는 지식입니다.

  반대로 무용한 지식들은 명령적 정언으로 변형불가능한 지식이고, 주체의 존재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앎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철학학파들에서도 발견되는 지식과 진리에 관한 일반적 특질인 행위방식, 에토스에 관한 의미도 발견하게 됩니다. 지식과 인식이 하나의 형태를 가질 경우, 인식이 에토스를 생산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유익합니다. 세계에 대한 앎은 에토스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하고, 그것은 타자에 대한 앎과 신에 대한 앎도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생리학phusiologia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두 종류의 앎을 규정하는 것은 교양(paideia)과 생리학(phusiologia)의 대립으로 나타납니다. 에피쿠로스는 대중의 찬양을 목표로 하는 교양의 허풍을 거부합니다. 반면 에피쿠로스에게 생리학은 지식의 한 분야가 아니라 인간 행실의 원리로 사용되며, 인간의 자유를 작동시키는 기준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만들고, 자신 안에서 불변하고 완벽히 평온한 관능의 가능성과 원천을 발견하게 되는 주체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나는 언어의 자유를 활용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파레지아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생리학자의 자격으로 파레지아의 테크닉을 연구합니다. 파레지아는 참된 인식의 장에서 주체의 변형에 관여할 인식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놀이의 자유입니다. 또한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명령하는 담론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체의 변형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의학과 유사하고, 생리학자의 기술과 자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피쿠로스에게 앎은 지식의 형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생리학적 형식으로 구분됩니다.

 

변형과 충격

  에피쿠로스학파와 견유주의자들에게 있어 자연에 대한 앎과 인간에 대한 앎은 대립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앎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작업 속에서 오는 자기 변형에 관한 실제적이고 유효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유효하고 수용 가능한 앎은 사물과 세계, 신과 인간에 근거하여 주체를 변화시키는 효과와 기능을 가진 앎입니다. 이때 진실 혹은 진리가 주체에게 충격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체는 참된 담론의 대상이 아니며, 견고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유는 사건 이후에 오게 됩니다. 주체의 변형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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