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 0428 고은 시 후기 +3
세로토닌
/ 2017-04-29
/ 조회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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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대승의 대를 잇는 승려였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도 하였고,
온갖 실천문학, 민주화모임, 민족예술임 모임의 대표를 역임하였던,
그리고 수십년에 걸쳐 수 많은 상을 받은,
이제는 여든이 넘어 연로한,
그러면서도 집필을 이어가고 있는 '고 은'씨의 시를 읽었습니다.
'오십 년의 사춘기'라는 대표 시 모음집에서 알 수 있듯이,
고은 시인은 실로 반 세기동안 우리나라에서 '인지도 있는 시인'으로서 살아왔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의 시를 읽어왔습니다.
바로 그런 고은의 시는 도대체 어떤 시일까? 그런 궁금증과,
그렇지만 너무 오랜 세월의 수 많은 시들을 다 볼 수도 없고,
그 세월만큼 변화무쌍할텐데, 하나의 흐름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항간에 들리는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그의 작품세계와 연관지어야 할까? 하는 난제들이
이번 세미나 공간안에 고스란히 존재하였던 시간이었습니다.
궁금증, 우려, 난제....
고은의 시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았고,
우려대로 2~3시간만에 50년의 걸친 흐름은 잘 포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난제는 쉽게 풀리면 난제가 아니지요. ^^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은 고은의 시였습니다. 그의 대표작들 위주로 보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요.
어쩌면 그의 강점은 '한 편의 시'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닐수도요.
그의 시세계를 좀 더 알려면, 그가 사춘기라고 명명한 그의 50년에 걸친 모든 시의 내용과 방대함을 동시에 느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6편의 시를 읽고 '추측'하는 것일 수도 있구요.
하지만 과연 '추측할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의 시중에 좀 더 강렬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시들을 선택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저 스스로에게.
그가 20대 청년이던, 그리고 승려이던 시절에 쓴 '눈길'이라는 시로 세미나는 시작되었습니다.
삶에서 유독 '고통의 순간들'에 집중하고 고민했던 20대 청년은 출가를 하고 고뇌를 하고 시를 썼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이제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바라봄' '들음' 이러한 '시각'과 '청각'은 이전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난 날의 고통과 번민을 '눈'이 모두 뒤덮어버렸듯이, 내면의 것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어둠'만이 가득차게 되어, 이제 새로운 '눈'과 '귀'로 '바라보고'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수행에 정진하여 '선정'에 이른 한 승려의 '세상 바라봄'이 이 '눈길'이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시에서 대비되는 '눈의 밝음'과 '어둠'은 '선'과 '악'의 대비와는 다릅니다. '눈'은 분명 우리의 '어둠'을 덮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 말하는 '어둠'은 '번민과 고뇌가 잦아든 고요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치 집에서 영화를 선명히 보기 위해, '암막커튼'을 쳤을 때의 '어둠'처럼요.
시 세미나분들의 사랑을 그렇게 받지 못했던 시였네요. 하지만 성혜님께서 아름다운 구절들을 읊어주셔서 다시한번 시의 고요함과 속삭임에 숨죽이기도 했었습니다.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귀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무념무상의 순간, 혹시 눈과 눈사이로 대지가 속삭이는 것이 들린 적 있으신지요?
저는 두번째 시가 정말 좋았습니다. 명상을 좋아하는 저는 첫번째 시도 좋아했구요.
교과서에 실린 '머슴 대길이'는 제목을 깨고, '매력 종결자'였네요.
'머슴'의 이미지와 '대길이'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머슴 대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우리들은 분명하게 어떤 특정인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시 속의 대길이는 절대 그런 이미지의 인물이 아닌, 일종의 '반전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대길씨'가 얼마나 멋진지. 시를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대길씨의 업적을 몇 개만 추려보겠습니다.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홑적삼 처녀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그가 말하였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이란다"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긴 불빛이었지요."
바야흐로 요새 여성들의 '불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ㅎ
세번째 시는 '문의 마을에 가서' 입니다. 최원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이 시를 어떤 문인이 대표작이라고 말하여 골랐었는데, 역시나 마음에 들게 하는 지점이 가득한 시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려운 과제이지요.
어려우니 우리는 집중하게 되고, 게다가 '시'는 이러한 애매한 주제에 답변을 주기에 아주 적합한 매체이지요.
인류가 풀지 못한 '미스테리'는 어쩌면 '시'로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세계의 발명품들은 '은유'로 번뜩여진 아이디어가 탄생시킨 것입니다.
많은 세상의 자연법칙들도 '은유'로 접속해본 '가설'이 실체화된 것입니다.
'죽음'도 어쩌면 '은유'로 극복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인의 모친상을 따라 '충북 청주의 문의라는 마을'에 갔던 시인은,
'눈'이 바로 '죽음'을 덮고 있음에 집중합니다.
'눈이 죽음을 덮는다'는 은유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덮을 수 있는 '눈'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는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사랑에 대하여' '허공'이라는 세 편의 시를 더 읽었습니다.
희음님께서는 이제 '고은의 시'에 대해 어느정도 알겠다고 말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6편의 시에서 우리의 마음을 휘감고, 파고드는, 그러한 '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명의 시인에게서 나온 시들은 모두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이겠지만,
그래도 저마다 각각의 독립적인 개체들이겠지요?
우리가 읽지 않은 나머지 시들 중에서, 어쩌면 우리의 마음 속 바로 그 깊은 지점과 맞닿아 있는 그런 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만큼 50년동안 수많은 시를 쓴 시인이니까요.
금요일엔 마도요님, 희음님, 성혜님, 최원님과 함께 고은씨의 시들을 읽어보았습니다.
벌써부터 시세미나가 마지막 지점에 이르고 있네요.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합니다.
함께해서 참 좋았습니다~^^
댓글목록
성혜님의 댓글
성혜
세라토닌님의 후기를 읽으며 지난 번 시셈 시간을 회고 해 봅니다.
글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물살이 부드럽게 출렁이네요.
이 잔잔한 기쁨의 비밀은 무엇인가.
시셈을 계속 파 들어 가는 수 밖에.
성혜님의 댓글
성혜
이에 대하여 세라토닌님은
"인류가 풀지 못한 '미스테리'는 어쩌면 '시'로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귀뜸해 주시네요.
Merci, Ceratonine.
세로토닌님의 댓글
세로토닌
그라찌에~~ 시세미나의 뒷풀이가 있는 날 오전은 모든것이 빛을 발하는 것 같네요~~~^^
기대가 되나 봅니다~~
이따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