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주체의 해석학> 0428후기 +3
유택
/ 2017-04-30
/ 조회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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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0428 후기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입니다. 누구들에겐 황금연휴 또 누구들에겐 생노동지옥(?)이 될 이 신록의 5월 첫 주를 앞두고 저 또한 곧 바빠질 스케줄의 두려움에 맑스 자본과 푸코를 좀 미리미리 읽어놓자는 심산으로 커피 한잔과 함께 책을 듭니다. 안 읽히네요. ㅋ 그래서 일단 늘 하던 대로 푸코 후기 쓰고 다시 책 읽기로 합니다.
시대순으로 보자면 플라톤의 epistrophe -> 로마/헬레니즘의 전향 –> 기독교의 개종metanoia 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푸코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던(진짜 못했나?) 로마헬레니즘 시대의 자기배려/전향의 테마/에피쿠로스에 대해 언급합니다.
기원 전후로 하여 자기배려의 테마는 두 가지 차원에서 변화되며 진행되는데, 1)교육적 차원에서 : 자기 실천이 생활의 기술과 동일시 되는 경향으로 2)정치적 차원에서 : 자기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면 타자배려(타자통치) 심지어 (도시)국가통치 까지도 덤(?...!)으로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헬레니즘에 자기배려는 “전향=자기로의 회귀=자기 자신으로의 급선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전향이라고 하면 지금에는 부정적 의미를 많이 함축하고 있지요. 사상전향 등등. 그러나 이 ‘전향’이라는 말은 헬레니즘시대에, 프랑스 혁명(1789년)시대에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 각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전 책에서도 그랬지만 흔히 우리가 당연시 받아들이는 개념/단어조차도 역사적으로 다른 의미를 띌 수 있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감명을 받지요. 지금 사용하는 닳고 닳은 개념을 끄집어올려 또 다른 용도로 재발견/재발명 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세미나 시간에 나왔었지요. 이번 강의에서 상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팽이입니다. 팽이는 물론 자기 중심축을 가지고 회전운동을 하지만 외부의 자극/동력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이 ‘자기’는 외부의 동력이나 자극이 필요치 않는 그래서 자기 자신의 중심을 향해서 자기의 중심 내에서 자기의 목표를 고정시켜야 하는 무엇입니다. 즉 결정적으로 부동하기 위해 이 중심으로 회귀하는 운동입니다. 참 말이 어렵네요.
전향의 테마에서 꼭 비교해봐야 하는 것은, 로마헬레니즘 시대의 자기 수양의 중심에서 발견되는 이 전향의 테마와 플라톤(-소크라테스시대)의 epistrophe와의 구분입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추구가 옳은 것이기 때문에 이승과 저승의 대립 축이 존재하고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데아의 세계로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기(Remind)해서 오류로 가려져 있던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근본적인 요소였습니다. 그에 반해 헬레니즘의 전향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로의 방향 전환, 인식 보다는 오히려 연습/훈련/실천과 같은 자기 수련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개종(metanoia)과도 비교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개종은 자기포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버려서 자신의 존재나 존재 방식에 있어서나 자신의 습관이나 에토스에 있어서도 이전의 자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새로운 형태의 다른 자기 내에서 다시 태어나기 입니다. 기독교에서 개종은 자기의 단절이 있지만, 로마헬레니즘 전향에서는 자기 내부에서의 단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바와 관련한 단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개종을 타동-주체화로, 기원전후 초기 고대 철학(헬레니즘/로마)의 전향은 능동-주체화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에피쿠로스의 생리학이 나옵니다. 진짜로 생리학이라는 학과목을 대학에서 공부해 본 저로써 ‘어 이상하다.. 왜 난 생리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을 직접적으로 공부까지 한 사람인데 왜 그 행위에서 그 어떠한 에토스ethos가 생산되지 못했을까 그리 외우고 익혔건만 왜 주체의 변형을 가져오는 앎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두 종류의 앎, 즉 교양과 생리학으로 나눕니다. 무용한 앎과 유용한 앎. 자연은 자연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굳이 알아내려고 하고 알아냈다 하더라도 교양과 장식의 차원에서 끝이 나버리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유용한 앎은 주체의 변형을 가져오는 생리학적인 앎이 되겠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에 맞춰진 실질적인 생활/실천적 지식/생활기술에 중요성을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 때 공부한 ‘생리학’이라는 학과목의 앎(지식)을 ‘다른 방식’으로 공부했더라면, 내 삶과 어우러지게 했더라면, 그것은 학점으로만 남는 교양/장식적 차원에서의 앎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유용한 앎’, ‘생리학적 차원으로 내 주체의 자기 변형과 충격을 주는 세계에 대한 앎’으로 전환될 수도 있었던 앎이기도 하지요. 어떠한 앎을 통해 결국 내 삶의 에토스(윤리?)의 생산, 주체의 자기 변형, 그래서 삶의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게 보면 다다익선(앎의 무한 축적) 추구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이 ‘유익한 앎’ Vs ‘무익한 앎’의 도식적 대립이 함축하고 있는 깊은 뜻은 ‘앎에 대한 태도’와 그것의 ‘유용한 사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었네요. 이전에는 우주는 무한하다고 하던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말했다면, 이제 푸코 책을 읽고 있으니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진짜 말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듯요~) “우주가 무한함을 예측(?)하는 과학적 앎에서 오는, 세계와 사람의 대한 시선의 변화, 자세의 변화(생활실천), 삶과 주체의 변화/변형”
그리고 세미나 시간에 푸코의 이 ‘자기’의 개념이 역사속에서 조금씩 그 의미가 변해간다고 했습니다. 플라톤때는 ‘자기’가 영혼(심히 이데아적이네요)이었다가… 로마/헬레니즘시대에는 뭐였죠?... 그리고 기독교에 이르면 뭐기? 진짜 아직도 잘 안 잡히네요 ㅜㅜ 연두님이 잠시 궁금해했던 그러나 너무 써 먹었던 푸코 사진 첨부할게요. ㅎㅎㅎ 구축/산출 되어 지는 자기(진실)? 완성되어 가는 그 순간으로써의 자기(그러나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추상), 자기에 이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기? 후기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일단 늘 하던 대로 몇 가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합니다.
지적하기 전에 정리가 잘 되었음에 감탄합니다. 푸코세미나 후기로 한 사례를 구축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이 부분이 또 오류의 근원이 될 수 있기에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갑니다.
1. 발제문에도 있지만, '전향'이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때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가 아닙니다.
푸코는 1830년대와 40년대의 혁명 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하고, 혁명과 반동이 이어진 시기였죠.
2. 플라톤의 전향과 로마/헬레니즘의 전향, 그리고 기독교의 개종을 시기순으로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속해서 그 경향들이 나타나고 혼재하기 때문입니다. 각각을 비교하고 차이점을 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3. 유용한 앎과 무용한 앎을 나누는 것은 에피쿠로스가 아니라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입니다.
데메트리우스는 에토스를 생산하는 앎이 유용한 앎이고, 그렇지 못한 앎은 유용하지 못하다고 구분합니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지식은 대체로 유용하지 못한 교양, 장식적 지식이 되지요.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신체에 관한 지식인 생리학이 에토스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데메트리우스와 에피쿠로스에게서 인간과 지식을 보는 태도의 차이가 발견됩니다.
에토스를 윤리보다는 태도나 실존방식으로 읽으면 좋겠는데요.
철학을 통해 구원을 말할 수 있다면, 지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방식을 구축해나감으로 불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저도 얼른 후기를 써야겠군요. ㅎㅎ
유택님의 댓글
유택
정정 감사~~ 제가 대충 읽었었다는게 드러나는 순간이네요.
그리고 '에토스'를 태도나 실존방식으로 대체해서 읽으니
훨씬 문맥이 와닿고 더 이해하기가 쉽네요 감사 감사~~ ^^
오늘 근로자의 날이잖아요. 제가 일하는 직장은 모든 직원이 정상적으로 다 일을 하는 관계로
제 업무 파트 성격상 개인적으로 전 좋긴 한데..
여튼 한국 근로자로서 누군 쉬고 누군 안 쉬고 왜 이런건지..
소리님의 댓글
소리
후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유택 근로자 말고 '노동자'!!
한국 노동자에 포함 안되는 직업군들이 꽤 많다는걸 또 느낍니다.
다들 노동자들인데, 누구는 노동자가 맞고 누구는 아니고, 누구는 고오급 노동이고 저질 노동이고...
이 모든게 공부하면서 천천히 바뀌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