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후기 : 존재론적, 우편적 제2장 후반부
고해종
/ 2017-05-01
/ 조회 1,266
관련링크
본문
[데리다의 엽서] 후기 : 존재론적, 우편적 제2장 후반부
지난 시간에 이어 아즈마 히로키가 두 가지로 분류하는, 데리다의 탈구축적 행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괴델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적 시스템에 대한 자괴점 찾기를 데리다 전기 작업에 할당하고, '데리다적 탈구축'을 부정신학적 존재론에 대한 저항으로서, 후기 작업에 할당합니다. 사실 이렇게 데리다의 사유를 전/후기로 나누는 점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기존의 해석자들과 동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작업이 스스로 그 궤에서 차별화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해석자들이 (순진하게) 이론과 실천의 연결로 해설하는 것에 비해 그가 거기에서 어떤 원인이나 이유, 즉 '데리다의 넘어짐'을 보고자 하는 까닭입니다.(사실 이 점이 아즈마 히로키의 데리다론을 둘러싼 쟁점의 시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분히 정신분석적이면서 정신분석을 거부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스스로 명료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 따라서 2장을 통해 아즈마는 탈구축의 두 종류를 명확히 도식화한 이후 데리다적 존재론=유령론, 즉 자신이 이야기하는 '우편적'인 것의 가능성을 이후에 논하고자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즈마는 2장 후반부에서 우선 라캉적 정신분석의 부정신학성에 대한 보론을 적어두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즈마는 데리다를 경유하여 라캉에게 저항하고자 시도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세미나에서는 최원 선생님에 의해 아즈마의 라캉에 대한 이해부족, 라캉 사유의 단순화 등이 지적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아즈마 자신도 50번 주석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첨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1950년대에 정식화된 라캉의 사유를 중심으로 데리다-아즈마의 비판적 경유가 시작된다는 점과 라캉적 사유가 1970년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정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전체적 전제는 유지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자신이 '텍스트'라고 부른 것이 언어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자신에게는 어떤 언어의 바깥이 존재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그가 그것을 '실재'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현실이 이미 형이상학적 전제로 과적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Moscou aller-retour). 그러니까 라캉과 데리다는 탈-형이상학적 탈구축에 있어서는 일치합니다. 아즈마는 이것을 괴델적 탈구축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즈마가 데리다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시니피앙들이 형식적으로 관계하여 법칙화될 수 있다는 사유방식을 데리다가 거부하는 것은 흔적들이 힘의 관계 속에서 남겨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경로의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아즈마는(적어도 이 부분까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가 데리다를 읽으면서 역사의 산종화를 본 것까지는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즈마 히로키 자신은 여러 부분에서 그 자신에 대한 자기변호적 지점을 마련해두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95면에서 96면에 걸쳐 아즈마는 철학적 백색지대와 텍스트의 유희를 경계해야 함을 적어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아즈마의 이해는 그렇게도 포스트모던 담론과 유사해 보이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시간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꽤나 아즈마의 함정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원 선생님의 지적에 의해 이 미약한 주의점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즈마의 일련의 작업들(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일반의지 2.0)에서 아즈마는 자기가 언급했던 주의사항을 망각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를테면 계속해서 병 속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는 작업. 그렇다면 아즈마가 이야기하는 데리다적 탈구축의 애매성에 그의 모호함 또는 보수성의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즈마의 데리다 이해가 시간성을 곁눈질하지만 그것을 본격적인 사유축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 저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행적 시간성을 개인적으로 완전히 전환시키기 못했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래디컬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프랑스 대혁명에 혁명력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무한을 사유하기 위하여 집합기호를 치게 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그 기호가 열림이거나 닫힘을 선택하도록 하지만 그 양쪽의 가능성을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불가능한 시도라고 저는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