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대종사》 – 애써 생각해보지만 알 수 없구나
기픈옹달
/ 20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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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道를 아느냐?
道란 번역하기 어려운 개념어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옮겨야 할까. 어떤 맥락에서는 길로 옮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방법, 가르침, 이치, 법칙, 규범 등으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나 道라는 말이 갖고 있는 그 자체의 풍부함을 담아내기는 힘들다.
주의할 것이 있다. 중국 사상사에서 道는 끊임없이 발전한 개념이다. 따라서 시대마다 道를 이야기한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개념의 추상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칫 道에 관한 논의를 전부 포괄하여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道라고 하면 모두가 그 커다란 개념 전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게 공자건, 노자건, 장자건. 그러나 이들이 개별적 사상가인 이상 사용하는 개념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장자는 道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라는 점이다. 그가 말한 道는 공자, 맹자, 노자 등과 다르지 않겠는가? 내가 보기에 공자에게 道란 일차적으로는 치세를 의미하며, 나아가 주나라의 문물을 담아내는 전통을 가리킨다. 맹자에게 道란 인의와 본성으로 이야기되는 윤리적 가치의 총체이다. 노자에게 道란 비밀스러운 기술, 권력의 통치술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道란 무엇일까.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大道不稱’이라는 표현이다. 커다란 道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小道란 존재할까? 물론 장자는 道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물 속에도 들어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道가 작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道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크다'(大)는 것이다. 크다고 할 때 이것이 작다小는 것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말하는 게 아님에 주목하자. 커다란 것과 작은 것은 다르다. 小知不及大知! 장자에게는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그가 추구하는 것은 大, 큰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참된 것 眞, 지극한 것 至, 신묘한 것 神이라고 할 수 있다.
夫道,有情有信,無為無形;可傳而不可受,可得而不可見;自本自根,未有天地,自古以固存;神鬼神帝,生天生地;在太極之先而不為高,在六極之下而不為深;先天地生而不為久,長於上古而不為老。
장자가 말하는 道는 모순적이다. 그것은 참되고 믿을만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형체를 갖지는 않는다. 무릇 형체란 개별화된 증거이며, 이것은 구체적인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별적 사물(物)은 형체(形)을 갖는다. 그러나 道는 그렇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헛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道란 참되며(情) 믿을만하다.(信) 이것이 道와 개별적 사물(物)간에 가장 큰 차이이다. 무릇 사물이란 구체적인 작용과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작용과 형태가 없다면 그것은 허망할 뿐이다. 그러나 道는 그와 반대다. 無爲無形.
그렇다고 道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道는 침묵속에만 묻혀있는 건 아니다. 도리어 道는 전해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문제는 다른데 있다. 전할 수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전해주지만 받지 못한다. 말해주지만 듣지 못한다. 도의 깨우침은 비밀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를 체득한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내어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도가 여기 있소’라고 손 내밀어 보여줄 수 없다. 도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끝인가? 아니다. 도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를 듣지 못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도를 들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도를 들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 모순이란!
‘도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도란 알 수 없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앎과 말이 사라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반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법,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법을 깨우쳐야 한다. 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도를 아는가?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아느냐 하는 질문과 같다.
2. 흐리멍텅한 세계, 흐리멍텅한 앎
知天之所為,知人之所為者,至矣。知天之所為者,天而生也;知人之所為者,以其知之所知,以養其知之所不知,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是知之盛也。雖然,有患。夫知有所待而後當,其所待者特未定也。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所謂人之非天乎?且有真人,而後有真知。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아는 지혜는 훌륭하다. 하늘의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움직임을 따라 살아간다. 사람의 일은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을 가꾼다(養). 여기서 앎(知)을 둘로 썼다는 것에 주목하자.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앎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앎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음을 알고, 무엇을 알지 못함을 아는 것. 앎과 무지의 경계를 인식하는 것. 그래야 이 앎과 무지를 다룰 수 있다. 위에서 ‘가꾸다’로 옮긴 ‘養’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를 ‘키우다/기르다’로 풀이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옮기면 자칫 작은 것을 크게 자라도록 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를 줄이고 앎을 키우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대상의 특성을 알고 그것을 다루는 지혜를 養이라 하자. 養生이 그러했듯이.
그렇게 되면 주어진 수명을 다할 수 있고 요절하지 않는단다. 이것이 앎의 최선이다. 따라서 앎이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느냐가 문제다. 그렇지만 앎이란 늘 어떤 대상을 갖기 마련이다. 이 대상이 되는 사물이 늘 바뀐다. 일정하지 않다. 결국 앎 자체에 대해 물을 수 밖에 없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그 경계조차 의심해야 한다. 앎은 늘 불완전하다.
且也,相與吾之耳矣,庸詎知吾所謂吾之乎?且汝夢為鳥而厲乎天,夢為魚而沒於淵,不識今之言者,其覺者乎,夢者乎?
‘나’라고 부르는 것조차 의심스럽다. 내가 나인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말하는 나는 과연 나인가? 내가 안다고 한 것이 과연 아는 것일까? 그러나 의심은 의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의심에서부터 앎이 시작된다. 세계도 나도 흐리멍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말해보고 알아봐야 한다. 무엇을? 道를!
南伯子葵問乎女偊曰:「子之年長矣,而色若孺子,何也?」曰:「吾聞道矣。」南伯子葵曰:「道可得學邪?」曰:「惡!惡可!子非其人也。」
여우女偊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 도를 체득한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백자규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먹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그런 젊음을 선물해 준 것일까? 여우는 道를 이야기한다. 道는 배울 수가 없다.
배움을 뜻하는 學이라는 글자에 주목하자. 주희는 《논어:학이》편을 주석하면서 學을 效, 본받음으로 풀었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생先生이 보여준 삶의 형식을 본받아 체득하는 것이다. 존경할만한 누군가의 삶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 따라서 배움이라고 할 때에 여기에는 ‘재현 가능함’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어떤 지식, 삶의 형태는 한 사람의 고유하게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또 다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여우의 말, 道는 배울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앞선 말과 충돌되는 것으로 보인다. 앞의 인용문에서 道란 可傳, 전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어지는 표현 不可受, 받을 수는 없다는 데 주목하자. 전할 수는 있으나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道란 모두가 개별적으로 체득해야 할 것이란 뜻일까? 아마도 그런 의미가 여기에 숨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면 어째서 可傳, 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그러고보면 장자의 많은 말도 어쨌건 道를 전하고자 애쓴 수고의 결과가 아닐까?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을 여우의 말과 연결시켜 보자. 道란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전할 수는 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道의 체득이란 재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道를 체득한 결과는 각기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그 道가 모두 개별적인 수준으로 떨어져 각기 찾아야 할 것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道를 체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道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공통된 언어, ‘道는 이것이다’라는 말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可得而不可見
道는 너무 커서 그 전체를 한번에 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만물의 시초이며 뿌리가 되는 그것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완벽히 무지無知의 영역으로 돌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道는 문득문득 그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니, 道는 늘 다양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
장자는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의 한계에 주목한다. 물론 그는 진인眞人과도 같은 초월적 인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의 출발점은 모든 인간이 개별적으로 지니고 있든 보편적 한계이다. 왜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진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이 삶을 어찌할 수 없이 살아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발버둥이다.
死生,命也,其有夜旦之常,天也。人之有所不得與,皆物之情也。
물론 진인의 경지로 단박에 뛰어올라 거추장스러운 삶의 문제들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이는 분명 멋진 삶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네 삶이 그렇던가? 장자의 매력은 그가 진인과도 같은 고원한 삶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삶을 갈망하는 이 척박한 삶의 현실을 함께 담아내기 때문이다.
泉涸,魚相與處於陸,相呴以溼,相濡以沫,不如相忘於江湖。與其譽堯而非桀,不如兩忘而化其道。夫大塊載我以形,勞我以生,佚我以老,息我以死。故善吾生者,乃所以善吾死也。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는 잘 안다. 모든 것을 다 잊는 것(相忘)이다. 강과 호수 속의 물고기들은 물을 잊고 산다. 그러나 가뭄이 들어 진흙탕 속에 허덕이는 물고기들은 거품을 내뿜어 서로를 적셔줄 뿐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은가? 어쩌다 이 천지간에 태어났지만 삶이란 고달픈 것이다. 그래서 저마다 잘 살려고 발버둥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잘 살아보겠다는 발버둥이 자신의 삶을 도리어 갉아먹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이와 같은 모순적인 말이 가능하다. 殺生者不死,生生者不生。
잘 살려고 하면 할 수록 삶이 망가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삶을 죽이는 것, 殺生! 그것은 죽음이라는 부정적 개념보차 포괄해야만 온전한 삶을 이룬다는 말이며, 구체적으로는 죽음을 사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3. 죽음을 맞는 법
모든 존재는 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육체는 낡아지며 언젠가는 죽음을 맞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죽음은 가까워지고 있다. 그 속도는 결코 줄지 않는다. 매일 더 빨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고대로부터 인간은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사유했다. 장자는 몇 개의 우화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첫째 이야기는 자사, 자여, 자려, 자래 네 사람이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된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귈 수 있는 것은 생사에 관한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孰知生死存亡之一體者,吾與之友矣。삶과 죽음은 본래 하나다. 이것을 아는 사람과 함께 벗하리라!
그런데 자여가 병에 걸렸다. 몸이 망가지고 신체가 기괴하게 변하였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근대 의학은 정상적인 인간의 신체를 이상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하나의 보편적 건강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기괴한 신체를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 병에 걸린, 그 결과 기괴하게 변한 신체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삶을 그만큼 가깝게 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괴상한 신체가 되어 몸이 괴롭다. 자사가 묻는다. 그대는 이 상태를 싫어하는가?
子祀曰:「汝惡之乎?」曰:「亡,予何惡!浸假而化予之左臂以為雞,予因以求時夜;浸假而化予之右臂以為彈,予因以求鴞炙;浸假而化予之尻以為輪,以神為馬,予因以乘之,豈更駕哉!
자여의 말이 흥미롭다. 아니, 어찌 이 기괴한 신체와 이것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미워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내 삶의 일부인 것을. 그러면서 왼팔이 만약 닭이 되면 새벽을 알리고, 오른팔이 활이 되면 새를 잡겠다고 말한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는 물론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인 동시에 변화한 신체를 가지고도 또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어떤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병이 들어 몸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이 오그라들어 바뀌는 것도 마찬가지.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속에 또 다른 삶이 들어 있다. 변화(化)는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且夫得者時也,失者順也,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此古之所謂縣解也,而不能自解者,物有結之。且夫物不勝天久矣,吾又何惡焉?
문제는 이 신체의 변화가 아니다. 슬픔과 즐거움(哀樂)이라는 다양한 감정이 들끓어 마음이 따라 망가지는 게 문제다. 그것뿐인가? 마음은 지나간 사건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가 하면, 오지도 않을 상황을 미리 앞당겨 품어내기도 한다. 집착과 망상으로 마음은 늘 괴롭다.
이번에는 자래의 차례다. 자래의 상태는 더 위독했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죽음을 맞으려 한다. 가족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슬피울며 임종을 맞을 찰나에 자려가 난입(?)하여 사람들을 물리친다.
子犁往問之曰:「叱!避!無怛化!」倚其戶與之語曰:「偉哉造物!又將奚以汝為?將奚以汝適?以汝為鼠肝乎?以汝為蟲臂乎?」
그러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저 조물자는 이제 널 무엇으로 만들까?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하는 말 치고는 짖굳기 그지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한번 생각해본 자래의 죽음 이후의 모습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고래로 많은 이들이 이 질문에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답은 내세來世,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어쨌든 그 죽음의 저 너머는 지금의 여기의 내가 ‘나’로서 가는 것이라고.
그런데 장자의 말은 그렇지 않다. 죽음과 동시에 나는 해체되며, 또 다른 큰 사물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내 신체의 일부는 또 다른 존재로 변화될 것이다. ‘나’라는 동일성의 주체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죽지만 그 다음엔 ‘내’가 아니다.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시 사람이기를 주장하는 것은 허망한 짓이다. 천지는 하나의 커다란 화로와도 같아서 어떻게 뒤섞여 또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子來曰:「父母於子,東西南北,唯命之從。陰陽於人,不翅於父母,彼近吾死而我不聽,我則悍矣,彼何罪焉!夫大塊載我以形,勞我以生,佚我以老,息我以死。故善吾生者,乃所以善吾死也。今之大冶鑄金,金踊躍曰『我且必為鏌鋣』,大冶必以為不祥之金。今一犯人之形,而曰『人耳人耳』,夫造化者必以為不祥之人。今一以天地為大鑪,以造化為大冶,惡乎往而不可哉!成然寐,蘧然覺。」
이러한 생사관이 있기에 이어지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장자는 유가적인 상례喪禮를 명백하게 부정한다. 상례는 죽음을 다루는 예식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 세계인 삶과 저 세계인 죽음을 나누고 연결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그러한 구분과 연관이야 말로 부질 없는 짓이라 본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 과정을 따라가는 하나의 物로서의 인간은 특정한 배치 위에 만들어진 일시적 존재일 뿐이다.
이쯤에서 《장자》의 거의 마지막에 기록된 장자의 죽음을 다시 읽어보자. 장자 본인은 정말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 같다.
장자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이 후하게 장사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를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 장례식을 위한 도구는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는데 무엇을 덧붙인단 말이냐?’ 제자가 ‘[아무렇게나 매장하면] 까마귀나 소리개가 선생님을 파먹을 일이 염려됩니다.’라고 하자 장자는 대답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소리개의 밥이 되고 땅 밑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의 밥이 된다. 그것을 한쪽에서 빼앗아 다른 쪽에 주다니 어찌 편견이 아니겠느냐!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척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는 이상 그 공평은 공평이 아니다. 자연스런 감응感應에 의하지 않고 인지人知의 마음으로 사물에 응하는 이상 그 감응은 참된 감응이 아니다. 명지明知를 지닌 사람은 외물에 사역되는 자에 지나지 않고 신지神知를 지닌 사람이야말로 사물에 감응할 수가 있다. 대체 명지가 신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온 일인데도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견해를 믿고 인간사에 빠져 있다. 그 공적은 다만 외물에만 있[고 자기 본성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 – 안동림 역, 773쪽.
이렇게 생사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운명(命)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운명처럼 주어진 삶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삶이란 늘 우리 뜻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다.
子輿與子桑友,而霖雨十日。子輿曰:「子桑殆病矣!」裹飯而往食之。至子桑之門,則若歌若哭,鼓琴曰:「父邪母邪!天乎人乎!」有不任其聲,而趨舉其詩焉。子輿入,曰:「子之歌詩,何故若是?」曰:「吾思乎使我至此極者而弗得也。父母豈欲吾貧哉?天無私覆,地無私載,天地豈私貧我哉?求其為之者而不得也。然而至此極者,命也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