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사기세가 #3 - <위강숙세가>, <송미자세가>, <진세가>
기픈옹달
/ 20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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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위강숙세가
위衛나라는 주 무왕의 동생 강숙에게 봉한 나라이다. 본래는 은殷 주紂왕을 죽이고 그의 아들 무경녹보와 은나라 유민들에게 떼어준 나라였다. 그러나 무경이 관숙, 채숙과 함께 난을 일으키자 그를 죽이고 위를 강숙에게 봉하였다.
김원중의 <사기세가>(1판 1쇄)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는데 위나라 군주가 자리에 오른 것을 ‘왕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풀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숙이 죽자 그의 아들 강백이 자리를 이었다. 이를 김원중은 “강숙이 죽자 아들 강백이 대신 왕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풀었다. 원문을 보면 이렇다. “康叔卒 子康伯代立” 이렇게 옮기면 이후 위나라의 군주의 칭호가 후侯, 공公으로 높아진다는 점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
김원중의 풀이 “정백이 죽자 아들 경후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경후는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었고, 이왕은 위나라 왕에게 명하여 후작을 주었다.” 원문은 이렇다. “貞伯卒 子頃侯立 頃侯厚賂周夷王 夷王命衛為侯” '정백이 죽자 경후가 자리를 이었다. 경후는 주 이왕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다. 이왕은 명하여 위衛를 후侯로 삼았다'가 되어야 한다. 즉 경후에 이르러서야 뇌물을 써서 후侯의 자리를 얻었다는 뜻이다. 이후 무공 42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주 유왕이 죽자 주나라를 돕는다. 이를 계기로 공公의 칭호를 얻는다.
위나라의 여러 군주 가운데 가장 눈이 가는 것은 영공이다. 바로 공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물이기 때문. 영공과 그의 부인 남자南子, 태자 괴외, 훗날 군주의 자리를 잇는 출공 첩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논어>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태자 괴외는 계모 남자를 죽이려 하나 실패한다. 그 결과 그는 위나라를 떠나 도망쳐야 했다. 위영공 사후 군주의 자리는 괴외의 아들 첩이 잇는다. 그의 시호는 ‘출공出公’인데 이는 그가 훗날 아버지에 의해 쫓겨나기 때문이다. 괴외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은 제법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 휘말려 공자의 제자 자로가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위나라 대부 공회의 가신이었던 자로는 태자 괴외가 위나라로 돌아와 공회를 협박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를 막으려 공회의 집에 뛰어든다. 그는 석기와 우염이라는 자와 싸우다 목숨을 잃는데,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관을 벗지 않는다’며 갓끈을 묶으며 죽었다.
且曰 太子無勇 若燔臺 必舍孔叔 太子聞之 懼 下石乞 盂黶敵子路 以戈擊之 割纓 子路曰 君子死 冠不免 結纓而死 孔子聞衛亂 曰 嗟乎 柴也其來乎 由也其死矣 孔悝竟立太子蒯聵 是為莊公
<위강숙세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자로는 죽임 당한 뒤 소금에 절여졌다 한다. 공자는 그 소식을 듣고 밥상에서 젓갈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위나라는 쇠약해져서 성공의 사후 후侯로 지위가 낮아지고, 이후 군君으로 낮아지며 나중에는 진秦에 복속된다. 이세황제에 이르러 평민이 되어 위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2. 송미자세가
‘미자 개’는 은주왕의 형이다. 그는 주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소용없었다. 은주왕 주변에 있었던 충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미자, 기자, 비간 등이 그렇다. 비간은 주왕에게 간언하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다는데 확인해보자며 죽임을 당한다. 기자는 미친척을 하여 화를 피한다.
훗날 은이 무너진 뒤 무왕은 기자를 만나는데 이때 기자는 홍범구등鴻範九等(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설파한다. 이후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한다. 그러나 신하는 아니었다고 한다. 바로 기자조선의 이야기.
주가 은을 정벌한 이후 미자에게 은의 제사를 잇는 나라 송을 봉해준다. 그 결과 송은 망국, 은의 후예라는 이유로 다양한 고사의 주인공이 된다. 대체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에서 법도를 따진 송양공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冬 十一月 襄公與楚成王戰于泓 楚人未濟 目夷曰 彼眾我寡 及其未濟擊之 公不聽 已濟未陳 又曰 可擊 公曰 待其已陳 陳成 宋人擊之 宋師大敗 襄公傷股 國人皆怨公 公曰 君子不困人於阸 不鼓不成列 子魚曰 兵以勝為功 何常言與 必如公言 即奴事之耳 又何戰為
많은 적군이 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준 것은 물론 진을 갖춘 뒤에 싸움을 건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적의 약점을 취하여 승리의 발판으로 만들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송양공의 이야기는 얼마나 헛된 이야기인지. 사마천은 그가 ‘修行仁義 欲為盟主’ 인의를 닦아 맹주가 되고자 했다 평한다. 인의가 사라진 시대에 그의 행위를 기리는 자들이 있었다 전하지만 그 이야기가 좋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문공 때엔 초장왕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이른다. 이때 나온 말이 ‘析骨而炊 易子而食’. 뼈로 땔나무를 삼고 자식을 바꾸어 먹는다는 말이다. 한편 송의 마지막 군주 ‘언’은 가죽 주머니에 피를 채워놓고 활을 쏘아 맞추며 즐겼다. 이를 사천射天, 하늘을 쏘아 맞춘다고 불렀다. 그의 참혹한 행위는 널리 알려져 그를 걸송桀宋이라 부를 정도였다. 결국 송은 제, 위魏, 초 세 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한다.
3. 진세가
길이가 매우 길다. 따라서 다양한 인물 사건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진은 본디 주 무왕의 아들, 성왕의 동생 당숙우唐叔虞에게 봉해진 나라인데, 그 시작이 재미있다. 무왕의 꿈 이야기도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어린 성왕이 동생을 장난으로 천자 놀이를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관이 이를 기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제후가 되었다. 장난이었다는 성왕에게 하는 사관 사일의 말.
史佚曰 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 禮成之 樂歌之
천자는 가벼이 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을까?
이렇게 시작된 나라인데 제후국으로서 모양을 갖추기까지는 복잡한 사건들이 있었다. 진에 얽힌 사건 가운데 유명한 것은 이웃 괵나라와 우나라에 얽힌 이야기이다. 헌공은 우나라의 길을 빌어 괵나라를 치고자 한다. 그때 우나라의 대부 궁지기가 괵나라를 치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간언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虞之與虢 脣之與齒 脣亡則齒寒
궁지기의 말처럼 결국 괵나라의 멸망 이후 우나라 역시 진나라에 의해 멸한다.
헌공 이후 주목할 인물은 제환공을 이어 패자로 이름을 떨친 진문공이다. 진문공은 이웃 진秦 목공의 도움을 받아 군주 자리에 오른다. 이 때문에 읽는 내내 복잡하다. 진문공과 진목공 사이에 계속 여러 사건이 벌어지니. 훗날 진문공이 되는 중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그 가운데 제나라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재미있다.
重耳曰 人生安樂 孰知其他 必死於此 不能去 齊女曰 子一國公子 窮而來此 數士者以子為命 子不疾反國 報勞臣 而懷女德 竊為子羞之 且不求 何時得功 乃與趙衰等謀 醉重耳 載以行 行遠而覺 重耳大怒 引戈欲殺咎犯 咎犯曰 殺臣成子 偃之願也 重耳曰 事不成 我食舅氏之肉 咎犯曰 事不成 犯肉腥臊 何足食 乃止 遂行
제나라에서 즐거이 즐기며 여생을 마무리하겠다는 중이를 여러 사람들이 수레에 태워 끌어낸다. 그것도 술에 취하게 한 뒤. 뒤늦게 사실을 안 그는 창을 꺼내어 구범을 죽이려 한다. 구범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일을 이루겠다고 하자, 중이는 실패할 경우 구범을 잡아먹겠다 한다. 이때 구범의 대답. 실패하면 비린내가 날 정도로 성치 못할 텐데 그 살을 어찌 먹겠는가.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
결국 중이는 고향 진에 돌아와 군주의 자리에 앉는다. 그의 나이 예순둘. 고향을 떠난 지 19년 만이었다. 불굴의 인물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는 곧바로 천하의 실력자로 명성을 떨친다. 주 왕실의 인정을 받아 패자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여러 제후를 모아 주 양왕을 만나는데 그 자리가 햐양이었다. 제후들과 함께 천자를 찾아가 뵌 것이 아니라 천자를 부른 것. 때문에 일부에서는 ‘주왕이 하양을 순시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꾸로 이는 주 왕실의 실재적인 힘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진문공 사후 진나라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걸주에 못지않는 폭군도 있었는데, 진영공이 대표적이다. 그는 누대에서 탄환을 쏘아 거리의 사람이 피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요리사가 덜 익은 곰발바닥 요리를 가져오자 그를 죽이고는 부인더러 시체를 끌고 조정에서 나가도록 하였다. 결국 영공은 신하들의 손에 죽는다. 당시 정권을 잡은 조순의 동생 조천이 군주를 죽였는데 사관은 ‘조순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적었다. 실권을 잡은 그가 국경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군주가 죽었으며, 군주를 죽인 이를 처벌하지도 않았다는 이유에서, 사실상 그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의 책임이 무겁다는 점을 강조한 기록. 여러 가지를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진나라는 이후 제후의 힘보다는 대부의 세력이 강해진다. 나중에는 지백, 조양자, 한강자, 위환자가 진나라를 갈라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다. 이때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것은 지백이었으나 조, 한, 위 세 집안의 공격으로 힘을 잃는다.
결국 진은 조, 위, 한 셋으로 갈라지며 결국 진의 후예는 평민으로 강등되어 전국시대에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