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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0421(금) :: 주체의 해석학 5강 - 발제
주호 / 2017-04-21 / 조회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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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3일 강의 전반부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주석: 프로클로스와 올림피오드루스

푸코는 “고대철학의 주요한 부분을 조망하기 위해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도 그다지 중요성이 없는 <알키비아데스>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신플라톤주의가 대두된 이후, 플라톤 저작의 체계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프로클로스와 올림피오도루스가 이에 앞장섰다. 그들은 세 가지 원칙에 입각해 <알키비아데스>를 플라톤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세 가지 원칙이란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철학의 요약이라는 것, 철학적 실천의 일차적인 조건으로 철학 내에 처음으로 자기 인식을 도입했다는 것,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 간의 분리가 처음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자신에로의 최초의 회귀를 바탕으로 논리, 도덕, 자연에 관한 연구, 신학(혹은 신성한 것)에 대한 담론이라는 철학의 4요소를 적절히 담고 있다고 말했다. 올림피오도루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모든 철학의 토대라 여겼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 자기로의 회귀, 즉 자기 자신의 재생산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의 신플라톤주의적 분리 

5세기 들어 <알키비아데스>에는 하나의 부제가 뒤따랐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이 부제는 분명 플라톤주의적이지 않았다. 올림피오도루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는 영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것은 영혼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배우고 나서 정치적 덕과 정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러한 깨달음의 출발점에 있었다. 플라톤주의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신플라톤주의에 있어서는 정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분리되었고 정치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과 정화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은 더이상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플라톤에 있어서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의 관계에 대한 연구: 목적, 상호성, 본질적인 내포

알키비아데스는 도시국가를 위한 선이 무엇인지 몰랐고 시민들의 화합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도시국가를 통치하고 시민들을 돌보길 원했다. 따라서 그는 타자를 돌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을 배려한다는 말 대신 ‘정의를 배려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의를 배려할 때, 그는 자신의 영혼, 영혼의 내적 위계, 질서, 복종관계를 배려해야 하고 이때 비로소 도시국가를 배려할 줄 알게 되며, 법을 수호하고 시민들을 적절히 돌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정의를 배려의 중심에 놓고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배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는 오직 시민들만을 돌보았을 뿐이었다. 즉,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자기배려와 타자배려는 세 방식으로 설정된다. 첫번째는 목적관계인데, 타자배려(정치적인 것)를 하기 위해 자기배려(정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에서 이 두가지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두번째는 상호성 관계이다. 푸코는 이를 순환성이라고 바꿔 말하기도 하는데 즉, 자기 배려를 통한 타인 배려를 완성하여 도시국가가 구원되면 내가 그 도시국가에 속한 구성원인 한에서 도시국가가 나를 다시 구원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본질적 내포 관계이다. 영혼은 자기 자신을 돌보면서 자신의 존재와 앎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플라톤주의에서 자기배려와 타자배려는 이와 같은 세 방식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1세기와 2세기의 상황: 자기의 자목적화(auto-finalisation du soi) - 결과: 개종의 원리에 따르는 철학적 삶의 기술, 자기 수양의 발전

1, 2세기 들어 자기배려와 타자배려는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기는 배려의 대상인 동시에 목적이 된다. 푸코는 이것을 자기의 자목적화라 부르며,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을 분리시킨 행위의 대해 강조한다. 이러한 분리는 철학 자체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자기의 자목적화가 더욱 견고해짐에 따라 삶의 기술은 ‘자아를 어떻게 변형시켜야하는가?’라는 주체에 의한 자기 존재 방식의 변형인 ‘영성’ 문제로 점차 흡수된다. 철학이 영성 안으로 점차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한 자기의 자목적화는 ‘자기 수양’을 발전시켰다. 동위, 종속, 위계 관계가 있는 가치들이 있을 때, 또한 그 가치들이 보편적인 동시에 소수자에게만 접근 권한이 주어질 때, 그 권한을 갖기 위해 노력과 희생 이상의 정확하고 규칙화된 행동들이 개인에게 요구될 때, 마지막으로 그 가치들이 전승되고 교육되어 여러 절차와 기술에 의해서만 가치에 대한 접근이 좌우될 때에 비로소 ‘자기 수양’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수양’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발전했으며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역사, 즉 주체성의 역사는 이러한 자기수양의 틀 속에서만 이야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 관념의 종교적 의미

구원 개념은 자기 수양의 중요한 요소였다. 구원은 자기배려와 타인배려의 문제에 연관되는데 이유인 즉, 타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구원은 생과 사, 유한성과 불멸성, 이승과 저승과 같은 이분법적 체계의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구원은 항상 경계에 있으며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이행시키는 시행자가 된다. 구원을 논할 때 우리는 역사적이거나 메타역사적인 사건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구원을 추구하는 주체인 동시에 수행자이지만 동시에 타자에 의해 구원받는 행위의 객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구원은 사건의 극적인 속성과 연관이 있다. 우리가 구원을 항상 종교적인 관념으로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철학적 사유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했다. 구원 개념은 철학 안에서 철학적 개념으로 기능했고 철학적 실전과 철학적 삶의 목표로 기능했다. 

 

Soreria와 salus의 의미

그리스어에서 구원하다(sozein)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둘, 유지하다, 보호하다. 셋, 도덕적 의미에서 순결성, 기억, 명예 등을 보존하다, 간직하다. 넷, 법률적인 의미에서 결백을 증명하다. 다섯, 수동태로서 이전의 상태 그대로 존속하고 유지된다. 여섯, 선을 행하여 사물, 사람, 집단에 복락의 상태를 확보하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라는 말은 위와 같은 여섯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자는 경계 상태, 저항 상태, 모든 공격과 습격을 물리칠 수 있게 해주는 자제와 자기에 대한 절대적 지배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자기 스스로 지금 소유하지 못한 선을 만들어내어 자신에게 행복, 평정, 평안을 확보시켜 주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다른 실행자를 참조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해 평생에 걸쳐 전개되는 일이며 그 실행자는 주체 자신이어야 한다. 자기 구원 행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며 궁극에는 아타락시아, 아타르케이아를 보상받게 된다. 구원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항구적 행위이며 헬레니즘과 로마의 철학적 구원에서 자기는 구원의 동인인 동시에 대상, 수단, 목적이 되었다. 

 

1982년 2월 3일 강의 후반부

 

자기에 대한 배려와 타자에 대한 배려: 관계의 역전

자기 배려의 완결이나 다름없는 구원이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등장하면서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는 완전히 단절된 것일까? 이에 대해 푸코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1, 2세기에는 적어도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 사이의 완전한 단절보다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도시국가의 구원은 개인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기 배려는 타자 배려를 목적으로 하며, 타자를 배려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 2세기에 들어서 그것은 역전한다. 자기 배려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며 그로 인해 타자 배려가 발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추가 활동이었다.  

 

에피쿠로스주의의 우정 개념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찬양하는 것과 동시에 우정은 항상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우정의 유용성과 우정의 바람직성 사이의 대립은 존재한다. 우정이 유용하면 할수록 덜 바람직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유용성과 유익성 사이의 일정한 균형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용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우정은 바람직한 것이 된다는 점에 푸코는 주목한다. 우정은 복락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복락이란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확신, 세계로부터 올 수 있는 고통에 대항해 우리가 가능한 보호받으며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유용성있는 우정을 통해 사회 내부에 편입되며 그것을 통해 신뢰의 상호성을 얻게 된다. 우정은 전적으로 자기배려이며, 이러한 자기배려를 통해 우리는 친구를 가져야 한다.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스토아주의의 인간 개념 

푸코는 두 번째로 자기 구원과 타자 구원 관계의 역전에 대한 증거로 에픽테토스의 예를 든다.

에픽테토스는 세계의 질서는 동물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모든 생명 존재들은 각자의 선을 추구하도록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 자신의 선을 추구할 때 그와 동시에 의도하지 않아도 파생적으로 타자를 위한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 에픽테토스의 입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들이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알고 합리적인 인간 본성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무엇인지, 자기가 아닌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또 행위의 범주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물음을 던져야 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적절히 돌볼 줄 아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알게 되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인간 공동체에 속하는 한에서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푸코는 딸이 아파서 근심이 있는 아버지의 예를 든다. 아버지는 딸을 간병인들에게 맡기고 집을 떠나버리는데 에픽테토스의 입장에서 그것은 오로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일 뿐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자기를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아버지는 딸의 병 때문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평정한 상태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딸의 곁에 머물며 궁극적으로는 타자를 배려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 배려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자기 배려인 것이다.

  

군주의 그릇된 예외

푸코는 로마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담론에 끌어들인다. 푸코는 특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침 점검에 주목한다. 아침 점검은 황제가 해야 할 과업을 미리 준비하는 의식이었다. 황제로서 해야 할 일, 그것은 무희의 일이나 장인의 일보다 중요하지만 특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의 군주권은 특권이 아니며, 그것은 임무이며 과업일 따름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향하는 목표는 황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자기 배려 내에서 자신에게 선을 행해야 하고, 타자를 위해 선을 행해야 했다. 자기 자신을 배려하면서 필연적으로 타자를 배려하게 되는 것이다. 군주란, 사회와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타자를 돌봐야 하고 그 조건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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