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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주체의 해석학> 0421 후기 +6
유택 / 2017-04-22 / 조회 1,492 

본문

<주체의 해석학> 0421 후기

부제 : 제발 그거 아니라구

 

일단 이번 세미나 내용은 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말장난 같으면서도 또 우리의 실제적 삶의 예들과 접목되는 부분들이 많았으나 후기 쓰기가 좀 어렵고 애매하네요. 그 말인즉슨 결국 잘 이해가 안 된 걸로.ㅜ 그냥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주체의 해석학을 유택에게 함 읽히코저 채찍과 당근으로 근 1년을 소몰이 하듯 몰고 온 세미나 원년 멤버들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대표적인 스뚤뚜스, 자기배려 실종의 표본이라지만 기필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혹은 인정하지 않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내 진실! 내 주체! ㅎㅎㅎ   

 

자기배려와 타자배려의 분리

이것은 이미 1,2세기 자기배려의 황금기 시대에 이미 나왔던 내용입니다. 자기 배려의 개인적 보편화! 자기 배려의 목적은 자기. 자기의 자목적화. 이것은 자기 수양을 발전 시킵니다. ‘자기 수양은 헬레니즘 시대부터 발전했으며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역사, 즉 주체성의 역사는 이렇나 자기수양의 틀 속에서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주체-진실-자기변형-실천-영성-철학

 

자기배려와 삶의 기술(tekhne tou biou)

자기 배려와 그(자기)에 이르기 위한 삶의 기술들이 거창한 게 아니라 살면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지침 같은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이것도 이미 앞번 세미나에서 나오지 않았던가요? ~하기 ~하기 등등 수도 없는 문장으로 쪼잔하고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한 행동/실천 지침들로써. 관념적인 내용이 절대 아닙니다. 생활과 밀착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실천/행위를 북돋우고 묘사하는 말들이 많았지요.   

 

구원

사실 구원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철학적 개념입니다. 영성 또한 마찬가지고. 그래서 사실 Goh샘이 자주 동료로부터 신부님 같다 목사님 같다 영성 이야기 너무 많이 한다 라고 말해진다고 들었는데 조금 바뀌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고대철학자들과 같은 태도이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사실 신부같다 목사같다 라고 하는 건 앞뒤가 바뀐 거죠. 영성의 개념을 기독교가 후에 고대철학으로부터 차용한거니깐요. (전 푸코 공부하면서 알았음) 타자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이 구원이라는 용어는 생활이외의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 유한에서 불멸, 악에선 선으로 등등 어떤 극적인 사건 같은것도 아닙니다. 그냥 바로 입니다. 자기를 구제하고 자기를 구원하면 결국 유토피아/안드로메다로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구원합니다. 헬레니즘과 로마의 철학적 구원에서 자기는 구원의 동인/대상/수단/목적입니다. 그래서 자기 구제/자기구원은 죽을 때까지 평생에 걸쳐 전개되며(반장한테 제발 너 그러면 너 구원했냐?’라고 묻지 말아주셔요 죽을때까지 구원은 진행형이니깐요 ㅋ) 그 유일한 실행자는 주체 자신입니다. 이 파트에서 니체의 초인’/’위버멘쉬이야기도 나왔고, 영원회귀, 극복하고 또다시 극복해나가는 끊임없는 극복과 변화를 이야기 했습니다.

 

우정

유용하면서도 바람직한 것이 우정이다. 고대 철학자들이 정의 내리는 우정의 정의가 참 까리~해서 웃음이 나오긴 했습니다. 뭐 저렇게까지 말로 해야 하나. 쪼잔해 보이기도 하고.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지만 결국 철학이 말의 학문이니까요. 에티카 이야기가 좀 나왔습니다. 우정타자의 필요성.. 나를 비춰볼 수 있는 타자. 타자를 매개로 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을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만 있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물은 두가지 방식으로(사유와 연장) 신의 펼쳐짐 이고 그렇다면 나에게도 타자에게도 신성이 깃들어져 있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신입니다. 그리고 우정이 있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타락시아

말뜻은 고요와 평정의 상태. 하고 싶은 거 참고 금욕하고 해탈 하는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딸 간병을 타인에게 맡기고 멀리 가버리는 예에서 세미나원들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심정적으로는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가 혼재되어 있어서 헷갈리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결국 푸코의 텍스트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나니 뭐 그리 왈가불가 할 건 아니더라고요. 지나서 생각해보니까요.

 

진리와 진실

이번에 좀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진리는 나의 외부에 있는 즉 대상으로서 나의 인식이 책읽고/여행하고/경험하고/깨닫고/부숴지고 그래서 결국 다다라야 하는 절대적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진실은 주체의 개념과 꼭 붙어 다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체가 그 주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실천과 변형/영성을 통해서입니다. 입장의 차이를 내포한 것이지요. 푸코의 책에서는 진리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진실에 대해서만 언급하지요.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치면서 주체화 방식이 자기배려/자기실천에서 오롯이 자기인식으로만 되었었지요. 이 주제는 여전히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그 말 때문에 이 책에 이렇게 매달려 있는 것일 수도

 

제발 그거 아니라구

세미나를 통해 입체적으로 다면적으로 책에 접근할 수 있어서 좋다 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다면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일단 어서 일면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이 생기는 게 급선무인데 아... 뭔가 환청이 들려요 스키조프레니아의 증상이 환청인데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제발 그거 아니라구~~~” 들려요 들립니다 그리고 후기 이것으로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주호님의 댓글

주호

부제 귀엽네요. 제발 그거 아니라규~ 왜 절규처럼 들리죠?
1년 전에 그린 빅픽쳐의 완성이네요. 유택이 주체의 해석학을 읽고 있다는 것!
구원은 행위이고 그 행위의 시행자는 어떤 메시아적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철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우리 모두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사실, 어제 세미나 재밌었어요.
저도 후기 써야 하는데... 유택이 너무 후기를 잘 써줘서... 그, 그래도 쓸게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유택에게 주체의 해석학 읽게 한 죄로 온갖 욕을 다 먹는 우리들. (아니, 나 뿐인가요?) 흡
무언가 금단의 책을 건넨 기분이네요.
후기가 상당히 알차고 좋습니다.
사실 저는 공동체가 별 대단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이렇게 바쁘고 고달픈 우리가 저녁에 모여 함께 밥 지어먹고,
책상에 둘러앉아 철학이니 주체니 구원이니 하는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배려의 노력인 것 같아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공간과 모임 자체가 공동체이고,
이 공동체는 우정의 원리로 유지되는 거지요.

뉴미님의 댓글

뉴미

집앞 카페에 오랜만에 들러서 주체의 해석학과 조르주페렉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요.
발제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는관계로 유택님 출장일정과 제 발제 파트를 맞바꿨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제가 너무 쉽게 모든것을 흘려보내버리는, stultus적  습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원래 예정되어있던 발제 파트가 맘에 들어요 어쩌죠?

유택님의 댓글

유택 댓글의 댓글

그러면 원래대로 예정되어 있는 부분을 발제 하셔요 ^^
구럼 연두님이 나서주시겠쥬~~~ ㅋㅋㅋ
아까 해질녘 즈음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온세상이 엷고 푸른 수채화 물감으로 터치한 분위기여서 환호를 질렀답니다.
멋진 토욜 봄밤 보내셔요~

뉴미님의 댓글

뉴미 댓글의 댓글

유택~ 그 환호가 그 감성이 전해지는거 같아요~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네요^^
주체로서 느끼는 충만함이려나요? 일요일, 오늘 하루도 멋지게 잘 보내셔요~

뉴미님의 댓글

뉴미

위버멘쉬, 초인을 이야기하면서 '처음', '회귀'라는 단어를 썼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기억을 더듬어,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그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바로 이 구절이에요.

"바로 내 입에서 나온,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내게 질문이 던져졌어야 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 페르시아인의 역사상의 엄청난 독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과 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는 바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의 움직임의 본연적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 도덕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즉 힘, 원인, 목적 그 자체라고 옮긴 것이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된다."
 
'위버멘쉬'는 번역될 수 없다고 했던(?) 삼월의 말에 공감해요~
제가 이해한 '위버멘쉬'는 기원전 6-7세기의 차라투스트라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오버랩되면서 처음으로 거슬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어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듯) 

오늘 푸코의 문장(강의개요 부분)을 읽고서는, 자려고 누웠는데 잠은 안오고...
갑자기 '도래할', '위버멘쉬' 단어와 함께
'~사이에 있는...' 이미지와 '다리(Bridge)' 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구요.
잠도 안오고 해서 왜 그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기억을 떠듬떠듬, 텍스트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민음사 판본의 <차라...> 15쪽 각주에서 "(다리를) '건너간다'라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문장을 찾았어요. 

백승영 님의 번역본 '위버멘쉬' 에 대한 설명에서 아래의 문장을 찾았습니다. (니체의 문장을 번역)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되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장, 저런 문장 다 제쳐두고, 요즘 저는 텍스트 교차시키는 재미가 들린거 같아요, 특별히 제가 재미있는 점은
어제 민음사 판본의 <차라...>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다리'라는 단어가 각인되었던건지(설마 그럴리가?), 오늘 동생한테 전화를 걸어 한 시간 가량 치아 브릿지 시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텍스트 읽기의 깊이는 부족하지만, 이런 얕은 재미가 요사이 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닌가 싶어요. ^^
 
니체 읽기 키워드 중에 하나인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소급한 이유' 에 대해 일단락 정리가 된거 같아서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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