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공백3] 0421 후기(김혜순 시) +4
희음
/ 2017-04-24
/ 조회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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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당신이 들여다보는 흑백 사진 속에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마주 보았다
당신의 사진 속은 늘 추웠다
기침나무들이 강을 따라 콜록거리며 서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 설산 오르는 길이었다
간신히 모퉁이를 돌아서도 희디흰 눈밭
날카로운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가없는 벼랑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당신의 눈을 내다보는 저녁
동네에 열병을 옮기는 귀신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 몸에 없는 거야 내가 다 내쫓았거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서 한 시간 이상 떨었다
기침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 뭉치를 떨구자
벌어진 계곡에서 날 선 얼음들이 튕겨져 나왔다
맨얼굴로 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떨며
나는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
처음에 우리는 이 시를 ‘당신과 나’라는 남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이별의 역학으로 읽었습니다. 당신에 의해 대상화된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일에 대해. 그러나 당신의 세계는 좀처럼 떨쳐내지 못하는 감기처럼 들어차 있거나, 내가 이미 당신이라는 프레임에 속박된 듯 자리하고 있는 탓에, 당신이라는 세계를 빠져나오거나 벗어버린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마지막 연의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라는 문장, 즉 나가고 싶었지만, 나가려고 그다지도 안간힘을 쓰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는 지각변동과 같은 힘겨움을 다 견뎌내면서까지 당신을 ‘내쫓’으려 했지만 그런 나의 노력은 허사였다는 문장이, 그러한 벗어남의 불가능성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관계를 조금 더 확장해 보았습니다. 이것이 꼭 남녀 간의 이야기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나는 감기에 걸려 있고, 그 감기는 귀신에 의해 옮겨지고, 그것은 또한 소문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연기에 의해 입증됩니다. ‘굴뚝마다 연기들이 우왕좌왕 몸을’ 떠는 그 풍경에 의해서 말입니다. 모조리 불분명하고 어렴풋한 것들뿐이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보다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독감 바이러스, 사스 바이러스처럼. 그것은 늘상 우리 곁에 머물면서 어디로든 떠다니는 공기와 같습니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기대어 숨 쉬는 필연의 공간.
당신이란 존재는 그 공간(사진 속)의 바깥에 있습니다. 바깥에서 그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또한 당신에게는 이별하려는 안간힘의 몸짓이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나를 붙잡아두거나 나의 생각을 돌려놓으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바라보는 것 말고 당신이 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언급은 없지만 당신의 얼굴 위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만이 떠 있을 겁니다. 굳이 한 겹의 표정을 입힐 수 있다면 차갑고 엷은 웃음 정도? 프레임의 바깥에서 프레임 안쪽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 당신은 아마도 신 또는 절대자가 아닐까요.
당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우리는 늘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감기에서 벗어날지 소문이나 퍼뜨리면서, 어떻게 하면 그 감기에서 해방될지 어리석고 헛된 몸부림이나 치면서 ‘얼어붙은 벤치에 앉아’ ‘입술을 떠’는 겁니다.
타이핑과 뜨개질
당신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나는 비를 멈출 수가 없었어
톡 톡 톡 톡 하루 종일 내렸어
당신이 매일 잠언을 지어내는 동안
내리는 빗줄기 감아 뜨개질을 했어
타자기 따위 사주는 게 아니었어
당신은 그냥 그 구석에 처박혀서
노름이나 하고 말이나 타야 했어
내 얽힌 두 손은 마치 새 둥우리 같았어
불쌍한 아가들아 새 아가 다음에
또 새 아가 짜줄게 금세 짜줄게
노래를 부르며 대바늘에 빗줄기 감아올릴 때
타이핑 소리 멈추지 않아 뜨개질도 멈추지 않았어
빗물 머금은 처마처럼 앞섶이 흥건했어
등 돌리고 앉아 톡 톡 톡 톡 떨어지는 당신의 망치질
관 뚜껑 덮을 일은 그리도 많은지
나라의 목숨은 날마다 경각인지
나는 방문턱을 넘어 멀리멀리 가버렸어 심지어 범람했어
물결에 쓸려 가면서도 뜨개질을 했어
나는 당신 얼굴을 몰라 당신 등밖에 몰라
집이 무한정 늘어났어 천장과 방바닥이 만나
수평선처럼 멀어졌어 멀리서 불어온
검은 하늘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지만
내 갈비뼈 속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불을 끈
인명 구출용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다시 이륙했지만
모두 모두 흘러가버렸어
물속에 잠긴 대바늘 두 개처럼
내가 짜는 옷감 속에 우리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톡 톡 톡 못 구멍들 방 안에 가득 찼어
당신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었어
멀리멀리 흘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
정말 멋진 시였습니다. 시를 낭독하며 우리는 일전에 함께 읽었던 실비아 플라스를 떠올렸습니다. 페미니스트의 시, 여성 변혁의 시. 변혁은 정치적 노모스 이전에, 흩어진 슬픔들이 응축되는 힘, 그런 정서의 힘을 그것의 가장 큰 동력의 뿌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 플라스와 김혜순은 변혁의 시인입니다. 슬픔의 알음과 앓음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우리 안의 잠잠했던 눈물과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시인이었으므로.
당신은 타이핑을 하고 나는 뜨개질을 합니다. 내가 뜨개질을 하는 동안 비가 내립니다. 그 비는 내가 내리는 비이고, 그 비를 내리는 힘은 뜨개질에서 나옵니다. 뜨개질을 하는 슬픔의 힘이 내 안의 비를, 즉 눈물을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내 안에서 흐르는 눈물이지만 나를 떠내려가게, 범람하게 하는 눈물이기도 합니다. 그 눈물은 나를 덮치고 당신 또한 덮쳐 ‘물속에 잠긴 대바늘 두 개처럼’ 결국 ‘우리를 보이지도 않게’ 삼켜버릴 것입니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눈물.
‘구석에 처박혀서’ ‘노름이나 하고 말이나 타야’ 하는 당신이 당신에게 걸맞지도 앉는 타자기 앞에서 ‘잠언을 지어내는’ 동안, 나는 이미 뜨개질만 하면서, ‘불쌍한 아가들아 세 아가 다음에/또 새 아가 짜줄게 금세 짜줄게’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 안의 눈물들을 다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대바늘처럼 앙상해지면서 이미 죽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여성으로 대표되는 나의 죽음은 당신과 관련된 죽음, 즉 당신이 톡톡톡톡 망치질을 하고, 관을 짜고 덮는 일, 나라의 목숨을 위한 매일의 경각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바깥의 일이고 바깥으로부터 본래적으로 규정 지어진 구조에 관한 일이고 당신은 대리인처럼 그저 그것들을 수행할 뿐입니다. 타이핑이라는 문명을 자동적으로 되풀이해낼 뿐이죠.
반면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것, 즉 뜨개질이라는 나의 숙명적인 대지를 되려 무기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 대지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위에서, 뜨개질이라는 대지 위의 행위를 통해 비를 내리고 그 비를 범람하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단순한 비극적 결말이 아닙니다. 익사 혹은 죽음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내파와 탈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적극적인 슬픔의 밀고나감, 제 안의 슬픔의 에너지를 극대화하여 자신의 숙명적 대지마저도 갈아엎겠다는 외침입니다.
배꼽을 잡고 반가사유
안에서 밖으로 부는 풍선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숨 쉬는 소리는 왜 그리 창피한지
배꼽 속에 나를 안치한 척
옷자락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눈도 내리깔아요
당신의 입술이 닿은 자리라고 하면 좋겠지만
도망은 절대 금지라는 검은 지장 같기도 하고
풍선 꼭지 잘근잘근 씹어놓은 이빨 자국 같기도 합니다
여보세요. 계세요! 엄마가 잠자는 아기집의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화들짝 잠 깬 조그만 풍선이 앙 터지면서 엄마 뺨을 갈깁니다
저마다 독립 만세의 그날을 꿈꾸지만
밤이면 숟가락을 지참하고 모여드는 곳
내가 숟가락을 들고 식구들에게 근엄하게 물었죠
우리는 배꼽에서 벗어나려고 안달 난 배달민족일까
우리는 배꼽으로 들어가려고 안달 난 배달민족일까
사과도 고양이도 냄비 뚜껑도 양배추도
죽음이 꼬물꼬물 시작한 이곳부터 썩어요
나는 씨 같은 거 없어요
씨앗은 틔워서 내가 다 먹어버렸어요
신기하게 생긴 냄비뚜껑의 배꼽을 들어 올렸더니
거대한 알루미늄 절 한 채가 딸려 올라옵니다
잠의 경전을 헤매던 노승들이 알머리 바람으로 허둥지둥 흩어집니다
절 뚜껑을 열고 내려다보는 내 얼굴을 보더니 혼비! 혼비!
끓는 냄비 속의 까만 수제비
올챙이들 같습니다
나는 안에서 밖으로 불어대는 풍선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비행기 타고
다하도록 다하도록 이 구멍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나는 얘하고 재미있게 혼자 삽니다
‘안에서 밖으로 부는 풍선’은 임신한 여성의 배부른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부른 배 가운데 도드라진 배꼽이 있을 때 그 배는 바람이 채워진 풍선처럼, 배꼽은 풍선의 꼭지처럼 보이니까요. 시의 초반에서 시 안의 목소리는 조금 어둡게 느껴집니다. 임산부로 그려진 시적 화자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도망은 절대 금지라는 지장 같기도 하고/풍선 꼭지 잘근잘근 씹어놓은 이빨 자국 같기도 합니다’라는 씁쓸한 독백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중반 이후부터 그 목소리는 비아냥거림과 냉소의 에너지를 점점 더 키워나갑니다. ‘사과도 고양이도 냄비 뚜껑도 양배추도/죽음이 꼬물꼬물 시작한 이곳부터 썩어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먹어치운 그것들, 태아가 든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 뻔한 그것들의 미래를 ‘죽음’으로 ‘썩음’으로 그림으로써 말이죠.
또 ‘나는 씨 같은 거 없어요/씨앗은 틔워서 내가 다 먹어버렸어요’라고 말함으로써, 흔히 태아의 근원으로 이야기되는 정자, 남성, 아이의 아버지라는 저편의 존재를 과감히 삭제하기에 이릅니다. 배꼽을 들어 올리니 노승들이 흩어지고 그 노승들은 ‘끓는 냄비 속의 까만 수제비/올챙이들’ 같다고 묘사함으로써도 근원으로서의 남성을 회화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절 한 채’ ‘노승들’ ‘반가사유’ 등의 절대적이고 종교적인 세계 또한 또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죠. 그것들은 하나의 경직된 신화가 되어버린 초월적인 근원 혹은 법적, 형식적 체계를 대표합니다. 남성의 세계와 정확히 부합하는 세계죠. 그 점에서 이는 남성 희화화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는 비로소 오롯한 혼자가 됩니다. 1연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지만 다음 말은 앞 연들에서 이어온 블랙유머와 비틂의 언어에 힘입어, 마지막에서 강력한 선언의 말이 되는 겁니다. ‘나는 안에서 밖으로 불어대는 풍선입니다/그 이상은 없습니다’라는 말. 그 이상은 없다! 누구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 아닌, 그저 배부른 몸일 뿐인 존재. 배부르지만 배부르다는 것에 대한 숱한 사회적인 족쇄의 내러티브는 개나 줘버리라는 선언의 말.
시적 화자는 이제 온전한 혼자이자 온전한 알몸이 됩니다. 강자의 언어, 남성의 언어로 덧씌워진 모든 것들을 내 신체에서 탈각시키겠다는 선언과 행위를 통해. 시적 화자는 이제 오롯한 홀몸의 존재로서 해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배꼽을 잡고 반가사유’라는 제목은 그러한 해탈의 지점을 가리키는 동시에 경직된 사회적 프레임을 비웃는 말이기도 합니다. ‘배꼽을 잡고’라는 말 뒤에는 ‘자지러지게 웃었다’라는 말이 따라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터지는 걸 참고 ‘반가사유’나 하겠다. 나는 너희들(남성 중심 사회) 따위와 안 놀고 ‘얘하고 재미있게 혼자’ 살기나 하겠다는 말인 거죠.
*쓰다가 에너지가 달려서 함께 읽었던 마지막 시 <일인용 감옥>은 정리 못했네요. 당 좀 보충하고 나중에 채워넣을게요.^^
댓글목록
세로토닌님의 댓글
세로토닌
긍정적인 표현으로 관용표현을 써볼께요. 좋은 의미입니다..
"꿈보다 해몽"
시와 더불어 희음님의 해설을 들으니, 정말 참 재미지고 확 와닿고 그러네요.
'시'라는 장르는 그것을 아무리 풀어내려 해도 다 해부되지 않고 어딘가는 응집해져 강렬하게 존재하는 듯한 매력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다가갈수록 분명히 친숙해지지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꿈보다 해몽! 칭찬 감사합니다.^^
아무리 풀어내려 해도 늘 남는 것이 있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의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시는 시만의 독해 용법, 아니 시만의 듣기 용법을 통해 두드려야 하는 장르인 것도 같고요.
함께 두드리는 것 또한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기쁨을 선사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룰루!
최원님의 댓글
최원
시 한편 한편에 대해 어수선하게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 깔끔하고 멋지게 정리해주시다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미나 자리에서는 두 번째 시인 '타이핑과 뜨개질'을 가장 좋아했는데, 희음선생님의 후기를 읽어보면서 첫번째 시 '감기'도 다시금 많은 울림을 느끼게 되네요. 특히 희음선생님이,
"내가 이미 당신이라는 프레임에 속박된 듯 자리하고 있는 탓에, 당신이라는 세계를 빠져나오거나 벗어버린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마지막 연의 ‘당신이 들여다보는 여기에서 나가고 싶었다.’라는 문장, 즉 나가고 싶었지만, 나가려고 그다지도 안간힘을 쓰고 ‘내 가슴에 눈사태가 나’는 지각변동과 같은 힘겨움을 다 견뎌내면서까지 당신을 ‘내쫓’으려 했지만 그런 나의 노력은 허사였다는 문장이, 그러한 벗어남의 불가능성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라고 쓰신 부분이 아프네요. 전 이 시를 남녀 관계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 초월적인 지위, 얼어붙은 하늘처럼 크게 뜬 눈으로 들여다보는 자의 지위, 곧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어 있는 남자의 시선 앞에서 대상화되어 있는 여성이 느끼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고 봤는데, 만일 희음선생님 말씀대로 여성이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면, 떠날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런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우선은 그런 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지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세미나 초반, 선생님이 바로 저 시 읽기의 물꼬를 열어주셨죠.
사진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 곧 대상화된 자의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독해 또한 유효하면서 중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프레임 바깥에서 프레임 안쪽을 바라보는 자가 남성이라면, 그 프레임을 열어젖히거나 부수는 것도
남성의 힘으로 가능할 겁니다. 그런 독해법을 통해 이 시를 읽어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 작업이 남성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작업 또한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며 마음을 기울이고 말을 건네는 선생님의 고민은 참 소중합니다.
남성 전반의 디딤축, 혹은 누빔점이 되는 하나의, 도처의 남성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