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발제: 2장 후반부 (2017/04/25) +3
고해종
/ 2017-04-25
/ 조회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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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제2장 두 통의 편지, 두 개의 탈구축(후반부)
20170425 고해종
2-b. 「진리의 배달부」 독해를 위한 또 하나의 보조선 : 라캉적 정신분석의 부정신학성 보론
솔 크립키는 『명명과 필연성』에서 고유명에 관한 프레게/러셀의 기술이론을 비판한다. 기술이론은 고유명을 축약된 확정기술의 다발로 파악한다. 이런 이론 아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어떤 남자를 가리킬 수 있는 것은 그 이름이 ‘플라톤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등과 같은 성질들의 집합, 즉 단축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반론한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지 않았다.”라는 명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명제는 A=~A라는 형태로 자기모순적이며, 따라서 의미가 없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명제는 의미가 있으며, 이름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경험적 지식은 수시로 수정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름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어도 ‘알렉산더를 가르친 사람’이라는 확정기술과는 등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원리적으로 확장가능한 사고실험을 통해 고유명은 확정기술의 다발로 등치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된다.
환언하건대 고유명에는 항상 어떤 잉여가 존재한다. 가라타니는 이 잉여를 확정기술의 ‘특수성’에 대립하는 ‘단독성’으로 칭한다. 이 때 어떤 이름의 고유성, 확정기술로의 환원불가능성을 지탱하는 것은 고유명에 머무는 잉여=단독성이다. 그런데 최초에, 이름은 확정기술과 동등하게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고유명은 왜, 어느새 어떤 잉여=단독성을 가지게 된 것인가?
크립키의 해석은 이러하다. 고유명의 잉여는 사람들이 이름과 ‘설명’, 즉 이름과 확정기술을 세트(집합)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설명되지 않는다. 이름의 전달에서 오히려 그 이름의 설명 이상의 것이 또한 전달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이름에는 어떠한 언어적 정의에 의해서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힘’이 존재하고, 크립키에 따르면 그 힘의 근원은 최초의 ‘명명행위(baptism)’에 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명명적 지시행위는 확정기술=특수성을 넘어선 단독성 그 자체를 명명할 수 있다. 그 명명(비약)의 흔적은 고유명 위에 ‘고정지시자(rigid designator)’로서 존재하고, 언어공동체를 통해 전승된다. 따라서 고유명의 잉여는 결국 명명의 기억, 언어 외적인 사건의 기억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크립키는 특수성과 단독성의 레벨을 준별하고, 단독성의 전달을 보증하기 위하여 관념론적 가정을 도입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크립키의 개념장치가 결코 실증적(positive)으로 주장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곧 고유명의 잉여=단독성이라는 ‘탈구축 불가능한 것’이 잔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일종의 신화를 요청했다.
이 고유명론에 대한 지젝의 수정은 그 자신의 부정신학적 특징을 분명히 한다. 지젝은 크립키가 현실계(the real)와 현실(the reality)의 구별을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단독성의 근거는 현실계에서 찾아져야 했다. 라캉적 정신분석에서 ‘현실계’는 상징계의 괴델적 균열을 지시한다. 그것은 실체적(positive)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상징계를 구성하는 시니피앙의 순환운동은 불완전하며 결과로서 반드시 하나, 즉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대상 a이고, 고유명은 바로 그런 특권적 시니피앙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시니피에(확정기술)로 되돌려보낼 수 없다. 요컨대, 크립키와 지젝은 모두 단독성의 근거, 상징계의 바깥을 생각한다. 크립키가 바깥을 소박하게 신비화한 것에 반해 지젝은 그것을 내밀화한다.
아즈마는 여기에서 라캉의 정신분석 일반으로 확장하면서 데리다의 라캉에 대한 비판적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모든 편지의 배달가능성이라는 것은 모든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으로, 즉 모든 시니피앙이 대응하는 시니피에로 송부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목적론적 심급 확정이 형이상학적 ‘정신 분석’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쾌락원칙’이 초월론적 시니피에로서 도입된다. 목적없는 욕동,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으로서 ‘죽음욕동’은 단순한 스캔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라캉적 정신분석은 ‘현실계’, ‘대상 a’의 논리로써 ‘쾌락원칙’의 바깥을 정식화한다. 데리다가 라캉을 인정하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문제는 라캉이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을 단수화하여 ‘목적없는 욕동’의 표류를 야기한 특권적 시니피앙(‘초월론적 시니피앙’)을 오로지 하나로 정하려고 시도한 점이다. 데리다의 비판은 그러므로 이중이다. 한편으로 초월론적 시니피에의 체제인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시니피앙의 체제인 부정신학에 대한 비판이 있다. 형이상학에서 탈출한 순간 또다시 형이상학에 빠지는 ‘폐역’은 이에 의한다.
데리다는 그렇다면 어떻게 부정신학 비판을 행하는가? 아즈마는 이 비판적 문제계를 기술이론과 고유명론, 「도둑맞은 편지」와 「진리의 배달부」의 연관을 통해 정리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고유명론에 대한 지젝의 수정에서 도출되는 ‘현실계’의 관념이, 언어체계를 다시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전체성의 탈구축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이다. 데리다가 팔루스나 대상 a를 ‘초월론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과정에서 시스템에게 다시 전체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의 전체성이 부정적으로 표상된다는 것이다.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의 경우, 그 편지는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고(내용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끝없이 이동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편지=팔루스에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가지지 않은 위치라는 역설적 위치’가 보증된다. 즉 그것은 오브젝트레벨에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지만 메타레벨에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는다’는 장소(무한배진하는 구멍)에 도달한다. 이 장소의 단일성은 우편제도 전체의 불완전성에 대응하면서 네트워크 내부의 순환 전체를 표상한다. 지젝에게 있어서 단독성의 심급은 이 부정적 단일성에 의해 보증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데리다가 볼 때, 라캉의 논의는 ‘도달하지 않는 편지’를 단수화함으로써 도달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확률적 위상이 누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컨대, 친근한 것(das Heimliche)에는 언제나 섬뜩한 것(das Unheimliche)이 있다. 라캉적 정신분석은 거세(castration)의 장소에서부터 이 문맥을 단순화하고 절단함으로써 양상성(확률)과 반복가능성의 위상을 놓친다.
데리다가 ‘우편’, ‘편지’의 은유를 사용하는 전략적 필연성은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을 사고하기 위해 전체성을 실증적이든 부정적이든 도입하지 않기 위해서 요청된다. 어떤 편지가 행방불명이 되는 것은 우편제도 전체의 불완전성 때문은 아니다. 보다 세부에서 한 회 한 회의 시니피앙 송부에 존재하는 취약함이 편지를 행방불명으로 만든다. 행방불명된 편지는 그 가능성(à-venir)에서 무수히 있을 것이다. 이 개개의 취약함이야말로 ‘에크리튀르’라고 불리는 것에 다름아니다. 데리다적 탈구축의 시야에는 단절되고 복수화된 시니피앙 네트워크의 단편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은 그 단편으로 나타나며, 상징계 전체의 조망은 본래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3. 유령론의 가능성
아즈마에 따르면 크립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일각수의 대조에서 주지해야 할 것은 고유명의 ‘잉여’는 확정기술의 정정가능성(즉 가능세계)에 의해 소행적으로 발견되며, 그 정정가능성의 유무는 대상의 실재여부라는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용법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확정기술의 정정가능성이 커뮤니케이션에 달려 있다면 그 근거는 고유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전달과정 안에서 찾아져야 하며, 따라서 ‘명명의식’의 신화에서 고유명의 ‘잉여’라는 것은 실체적 전도에 따른 결과이다. 산종의 다의성화. 그러나 크립키의 논의를 전달 경로(커뮤니케이션 연쇄)를 중심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고정지시자라는 잉여는 고유명에 머물 뿐 화자의 의식(주체)과는 무관하게 커뮤니케이션 연쇄를 따라가고, 그 잉여가 보증되는 것은 각각의 독립적인 경로들의 순수성에 의한다.
확정기술의 다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명을 앞에 두고서, 문제는 그 상징계의 구멍을 어떻게 기초짓는가 하는 것이다. 지젝은 상징계의 전체구조, 즉 하나의 주체와 그것을 마주본 하나의 세계(상징계)를 상정하고 그 사이의 자기언급적 중첩구조 속에서 형식적으로 결정불가능한 ‘잉여’를 확인한다. 그러나 주체에 이르는 전달경로의 다양성은 ‘하나의’ 주체=세계라는 상정을 무효화한다. ‘상징계’라는 하나의 전체는 경로들의 차이를 말소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젝의 전도가 드러난다.
아즈마에 따르면 복수적인 ‘구멍’의 근거를 위한 전달경로의 순수성이라는 크립키의 비현실적인 가정은 데리다의 논의를 참조하면서 뒤집을 수 있다. 「서명 사건 콘텍스트」에서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취약함, 오배 가능성 일반을 의미하고 있으며 따라서 데리다적으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야말로 고유명의 잉여를 낳게 하는 것이다. 고유명에 산종(유령)을 부여하는 것은 전달경로의 오배가능성이다.
아즈마는 다시 데리다와 가라타니를 평행적으로 붙여 놓으면서 양자의 이론적 친근성을 확인하고, ‘
댓글목록
최원님의 댓글
최원
고해종 선생님의 정교하고 상세한 발제문이군요. 역시 전공자다우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발제문이 길어서 아마 게시판 상의 글은 뒷부분이 잘린 듯 합니다.
프린트아웃 하실 분들은 발제문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야 할 듯합니다.
고해종님의 댓글
고해종
앗 제가 게시판 공지문을 위쪽만 설렁 봐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너그럽게 양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ㅠㅠ
이따가 뵙겠습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잘림 현상은 텍스트 분량이 많은 경우에 나타나곤 하는데,
워드파일에 있는 글자들을 복사한 뒤 메모장에 붙여넣기하고
그걸 다시 카피해서 게시판에 옮기면 모조리 다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