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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주체의 해석학 0414_후기 +8
아라차 / 2017-04-14 / 조회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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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1장을 열면서 “그래, 역시 철학은 영혼이지! 영혼을 돌보는 것이 자기배려이자 자기실천인 거야!”라고 좋아했다가 장을 거듭할수록, 자기배려의 방식들이 여러 모습으로 변화되고, 또 고대의 방식으로 되돌려졌다가, 새로워졌다가, 다시 그 방법을 차용했다가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어리둥절삼절 중입니다. 어쨌든 서술된 자기배려의 양상들을 흡사 “외부의 것들이 표상하는 바를 검증없이 받아들이는” stultiltia 상태로 4장까지 마쳤네요. 이제 자기배려는 파레지아, “진정성 있는 말의 방식”을 공유할 수 있는 우정/애정 관계인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하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방법들이 서술될지 기대되면서도, 사실 그때 그때의 방식을 아는 것보다, 지금의 나를 더 돌아보게 하는 책이 <주체의 해석학>인 것 같아서, 차분히 뚜벅뚜벅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조금 sapiens한 태도를 취해볼까 합니다.

 

발제를 하면서 재차 삼차 읽어보았던 stultiltia는 어쩌면 나의 상태를 이리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부의 표상의 바람에 열려, 그 표상들의 내용과 주체적 요소들을 구분할 수 없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생을 방치하는”, “자신의 주의와 의지를 명시적이고 확정적 목표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도 못하는”, “결과적으로 생을 흐르도록 방치하고 끊임없이 견해를 바꾸는” Stultus. “품위있게” 혹은 “자유롭게” 욕망하지 못하고 “욕망하지만 무기력 속에서 욕망하며 게으름 속에서 욕망하는” Stultus. “제한되고 상대적이며 단편적이고 변덕스러운 의지”만을 가진 채 도대체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요?(자괴감 급습)

 

자유롭고 절대적이며 항구적인 의지의 대상, 외부의 무엇에 의해서도 제한됨이 없이 의지가 지향해야 하는 대상, 외적인 제한들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 그것은 명백히 “자기”입니다. 제대로 욕망하지 못한 자가, 제대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도 무지한 채)그럼에도 나아가야 할 대상은 “자기”입니다. stultus는 본질적으로 욕망하지 않는 자이고, 자기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 자이며, 의지가 “자기”라는 유일한 대상을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항구적으로 원하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생각나는 지점입니다.

“욕망”에 대한 포괄적 오해와 “자기”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기를 욕망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리송했던지라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자크랑시에르는 <무지한스승>에서 우리가 ‘바보’가 되는 것은 ‘지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의지’가 꺽일 때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접고 의지를 꺽을 때 우리는 바보가 됩니다(라고 고쌤이 <살아가겠다>에 얘기했지요). 욕망과 의지가 이 지점에서 연결됩니다. 생명력이 없으면 의지할 수 없겠지요. 살아있는 자가 끊임없이 관계하는 대상인 자기를 욕망하는 것이 도대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어째서 계속 stultiltia상태인지는 바로 적절한, 냉정하면서도 부드럽고 다정한 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불리한 땐 남탓, 구조 탓) stultiltia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아름다운 타자는 스승, 철학자, 애인, 친구 등등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강도 높은 애정관계를 기반으로 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에로스에 모두 궁금함을 감출 수 없겠지만 푸코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실천의 발전을 통해, 자기 실천이 일종의 사회적 실천이 됨을 통해 아주 새롭고 중요한 것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일반적인 언어나 담론의 윤리가 아닌 타자와 맺는 언어관계의 윤리입니다. 타자와 맺는 언어 관계의 새로운 윤리가 parrhêsia라는 근본적인 개념에 의해 지시됩니다.” 강도 높은 애착관계, 즉, 우정 관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자기 배려와 자기 구축! parrhêsia는 마음을 열고 두 파트너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전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살면서 이런 관계 맺기가 어느 정도 가능할까요? 친한 친구에게도 “상처받을까 봐, 괜한 오해를 일으킬까봐, 내가 뭐라고 주제넘게, 내가 왜 너의 숙제까지” 라는 생각으로 충고도 의견도 제시하는 못할 때가 많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자기 주체성을 유지한다는 핑계로 남의 얘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곤조 넘치는 인간들도 많기 때문에 피곤함을 무릅쓰지 않는 태도가 만연해 있으니까요. 심지어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그 사랑이라는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어화둥둥만 해가며 서로를 감안해주는 것만이 최선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참 어렵다 파레지아!(중의적 의미로) 앞으로 parrhêsia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되겠지요?

 

어쨌든 오늘 세미나의 키워드는 stultiltia와 parrhêsia였습니다.

친절한 유택이 내용을 자세히 적어주는 후기를 올릴 것으로 기대하기에, 개인적인 소감을 남겨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아라차 님 잘 읽었어요.
책 그 부분 아직 읽지 않았는데, 아라차 님 올려주신 발제문 읽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네요. 감솨~~
발제문 읽으면서도 초반부에 나왔던 그 '자기를 욕망한다는 것' 이 부분 좀 아리까리 했거든요. 아라차님처럼.
자기를 욕망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실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영혼인 자기를 욕망한다는 말은, 자신을 주체로 세우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댓글의 댓글

제대로 욕망하지 못하는 사람이 stultus입니다. stultus는 자기를 방치합니다. 외부의 바람대로만 움직이다 보니 무척이나 변덕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욕망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기력 속에서 욕망하고, 게으름 속에서 욕망합니다. 영광을 갈망하지만 평온하고 관능적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뭔가 기준도 없고 지속적으로 욕망하지도 못합니다. 여기서 끌어내기(éduction) 된 사람이 sapientia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유롭고 품위있게 욕망하면서도, 외부의 무엇에 의해서도 제함됨이 없이 욕망하는 것이 필요한데, 바로  욕망해야 하는 대상, 그것이 자기입니다. 대상이라고 해서 ‘자기’가 외부의 어떤 대상처럼 존재해서 그것을 발견하거나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끊임없이 해석해나가야 하는 ‘자기’를 의미합니다. 하여 “자기를 욕망한다는 것”은 이제 “자기와의 (제대로된) 관계맺기”, “자기 자신과 지배관계/소유관계/쾌락관계에 도달”하는 것, 자기배려와 자기구축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쌤의 설명과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구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자기 욕망”이 “코나투스”와 연결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신’이기를 바라는, 생을 욕망하는 주체라는 해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욕망하지 않으면서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것이 흡사 생이 아닌 죽음을 욕망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생명력/생명으로서의 ‘자기’를 욕망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욕망(통속적으로 말해지는 욕심이나 욕구와 겹쳐지기도 한)에 대한 포괄적(부정적) 오해가 자기배려를 막고 있었고, 그래서 stultiltia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배려/자기구축/자기사랑이 기본인 것 같아요. 살아있다면/살아가려면 죽음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생을 욕망해야 하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들로 이어졌습니다. 또 기네요 ㅎㅎ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세미나 후기를 쓰기 위해서 지난 후기들을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아라차를 좀 더 알게 된 듯. 아, 나 후기 써야 하는데 다 잊어버렸...메모도 안 해 놓고 ㅜㅜ

선우님의 댓글

선우

sapiens 한 태도는 뭐예요?
(책 안 읽고 넘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건가요?ㅎㅎ)

삼월님의 댓글

삼월

자기 배려의 의지로 가득찬 아름다운 후기인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쩐지 저까지 구원이 희망이 샘솟는 것 같군요.
stultus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자기배려를 위해 타자가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철학자도, 스승도 아닌 이를 철학자나 스승처럼 대하며,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리고 stultus의 비극성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이미 자기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이 존재가 심지어 더 이상 자기 배려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점인 듯 합니다.
아라차님 댓글에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게 된다는 구절이 이 부분인 것 같아요.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이라 했던 부분이 다시 떠오릅니다.
지난 세미나와 이 후기를 읽는 시간들은 저에게,
함께 읽는 텍스트, 텍스트를 함께 읽는 타자들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준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댓글의 댓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말이 나를 둘러싼 아름다운 타자들에게 저를 내맡기며(?)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서
새롭게 다가오네요. 저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힛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저도 잘 부탁해요~~ 역시 에티카는 읽어야 하는 건가요!

뉴미님의 댓글

뉴미

아라차의  stultus에 관한 설명을 보다가,
문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바로 stultiltia 상태에 있었던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자기를 욕망하지 않고 스승인 프론토를 욕망하다니 말이죠, 그 욕망은 진실이었을까?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표현을 했는데요,
이 부분에서 자기와의 제대로된 관계맺기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욕망을 비춰보게 되네요~ 나의 욕망이 단지 타자의 욕망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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