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사기세가 #1 - <오태백세가>, <제태공세가>
기픈옹달
/ 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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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백세가
<세가>는 오태백 세가로 시작한다. 오태백은 <논어>에도 이름을 올릴 정도로 당시 크게 존숭 받은 인물이었다. 공자는 그가 세 번 천하를 양보했을 정도로 지극한 덕을 지녔으며, 백성들이 그를 칭송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왕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일러, 양위讓位라 하는데 사마천 역시 이를 매우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오태백과 계찰 이 둘은 왕위를 사양한 것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합려는 자기 사촌을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부차는 복수를 이루어냈으나 다시 복수를 당하고 말았다. <오태백세가>에는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삶의 모습이 교차한다.
오태백은 주 태왕의 맏아들이었는데 셋째 계력의 아들이 덕이 있음을 보고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계력의 아들은 바로 서백 창, 훗날 주문왕周文王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나, 적어도 덕 있는 인물(특히 셋째나 막내)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이 큰 미덕이라 생각한 것은 확실하다. 우리도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미담을 들어보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는 권력을 쥐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인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까닭이지 않을지.
오태백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수몽의 아들 계찰에게서 반복된다. 수몽에게는 제번, 여제, 여매, 계찰 네 아들이 있었다, 계찰이 가장 훌륭했는데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는 물론 형제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계찰은 극구 왕위를 사양한다. 오태백은 주나라에서 도망쳐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스스로 오랑캐를 자처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계찰은 이와는 반대로 중원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깊은 문화적 소양을 드러낸다. 덕이 있는 자가 문화적 소양도 함께 갖추었으리라는 기대를 반영한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찰도 형제들의 왕위 다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권력 다툼의 한 복판에 뛰어들지 않는다고 권력 다툼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덕을 갖춘 자가 왕위를 사양한다면, 그 덕분에 왕위에 오른 자가 덕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왕 요를 살해한 합려의 이야기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합려, 공자 광은 제번의 아들이었는데 자신을 대신해 요가 왕위에 오른 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본디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제번, 여제, 여매 순으로 왕위가 전해졌는데 계찰이 왕위를 거부하자 여매의 아들 요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광은 제번의 아들인 자신이 마땅히 왕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그는 자객 전제의 힘을 빌어 요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전제가 활약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 깊다. 광은 요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술자리를 갖는다.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한 사이 전제가 생선 구이를 들고 요에게 나아간다. 왕궁에서 광의 집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술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요의 친위병이 늘어서 있었으며,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자는 모두 벌거벗었다 한다. 전제는 생선구이 안에 짧은 비수를 숨겨 들어가 요의 가슴을 찌른다. 그와 동시에 친위대의 긴 칼이 전제의 몸을 꿰뚫는다.
於是吳公子光曰 此時不可失也 告專諸曰 不索何獲 我真王嗣 當立 吾欲求之 季子雖至 不吾廢也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 而兩公子將兵攻楚 楚絕其路 方今吳外困於楚 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柰我何 光曰 我身 子之身也 四月丙子 光伏甲士於窟室 而謁王僚飲 王僚使兵陳於道 自王宮至光之家 門階戶席 皆王僚之親也 人夾持鈹 公子光詳為足疾 入于窟室 使專諸置匕首於炙魚之中以進食 手匕首刺王僚 鈹交於匈 遂弒王僚 公子光竟代立為王 是為吳王闔廬 闔廬乃以專諸子為卿 季子至 曰 茍先君無廢祀 民人無廢主 社稷有奉 乃吾君也 吾敢誰怨乎 哀死事生 以待天命 非我生亂 立者從之 先人之道也
고대 사람들도 이 장면이 인상 깊었는지 화상석의 그림으로 남아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광은 왕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합려이다. 뒤늦게 오나라로 돌아온 계찰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제사가 끊이지 않으면 우리 군주이니 원망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난을 일으킬 수는 없고, 세워진 자를 따라야 하니 이것이 선인의 법도이다.’(非我生亂 立者從之 先人之道也)
합려에게는 여러 인재가 많았다. 전제를 소개하여준 오자서를 비롯하여, 백비, 손무까지. 합려는 이들의 힘을 빌어 초나라를 쳐 물리쳤다. 오나라의 군대는 초나라 수도에까지 이르렀으며, 오자서와 백비는 초평왕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오자서열전>을 보자.
합려는 크게 명성을 떨쳤으나.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때 월나라는 세줄로 늘어선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목을 찔러 오나라 군대의 사기를 꺾었다. 합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복수를 맡긴다. 합려에 이어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구천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3년 동안 매일 장작 위에 잠을 자며 복수할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결국 그는 구천을 꺾고 복수를 이룬다.
구천은 구차하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역시 남몰래 복수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자서는 구천을 처치할 것을 여러 차례 간언 한다. 복수를 위해 갖은 치욕을 감내했던 그에 눈에는 구천의 이글거리는 마음이 읽헜던 탓이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물리치고 구천을 살려준다.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촉루를 보내어 자결을 명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구천은 매일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꿈꾸었다 한다. 와신상담!
오왕 부차는 중원에 진출하여 여러 나라들과 세력을 다투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왕 구천을 잊고 있었다. 결국 월왕 구천을 오왕 부차를 꺾는다. 부차는 스스로 오자서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이렇게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춘추전국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제태공세가
제나라의 시조가 되는 태공망 여상은 주문왕과 무왕을 보좌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어떻게 주왕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마천은 몇 가지 전설을 함께 소개한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전설은 문왕이 사냥을 나갔다 낚시질하며 때를 기다린 여상을 만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뛰어난 재주로 문왕을 보필했으며, 무왕의 모사가 되어 은나라 주왕을 꺾는데 커다란 활약을 남겼다. 그 결과 동쪽 제나라 땅을 봉국으로 받는다.
문왕, 무왕과 더불어 주나라를 여는데 크게 이름을 떨친 태공망이었으나 그의 나라는 큰 부침을 겪는다. 제양공과 노환공의 이야기를 보자. 노환공이 부인과 함께 제나라를 찾았다. 노환공의 부인이 제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제양공과 배다른 남매였는데 젊은 시절 정을 통한 사이였다. 제나라에 와서 부인은 다시 양공과 정을 통한다. 환공이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내자 부인과 양공은 환공을 죽인다. 참고로 이때 제나라에서 죽은 환공의 후예는 훗날 노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공자 시대의 삼환三桓이 그것이다.
사마천은 이 양공이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 일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사냥에 나갔다가 멧돼지를 활로 쏘았는데 이 멧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울었단다. 깜짝 놀란 양공은 수레에서 떨어져 발이 다치고 신발도 잃어버렸다. 환공을 죽이게 시켰으나 결국 책임을 덧씌워 죽인 팽생을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양공이 발을 다쳐 돌아온 날 반란이 일어난다. 앞서 양공은 신발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신발 관리하던 역인을 크게 벌한다. 채찍질을 삼백 대나 했는데 그는 궁을 나오며 반란군의 무리를 만난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궁 안에 들어가 난을 일으킬 테니 기다리라 말한다. 양공에게 채찍질당한 분 갚음을 하겠다는 요량이었을 것이다. 반란군은 그 말을 듣고 궁 밖에서 기다렸으나, 아뿔싸! 그가 마음을 돌려 반란군의 소식을 궁 안에 먼저 알릴 줄 어떻게 알았는가.
이렇게 양공 곁에 충신이 있어 반란군을 맞아 싸우지만 역부족이었다. 반란군은 궁을 제압하고 궁 안에서 양공을 찾았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는데, 누군가 문 틈에 발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양공의 발. 결국 양공은 이 발, 아마도 상처 난 발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환공을 죽인 화가 그에게 미친 것은 아닐지.
양공을 죽이고 공손무지가 잠시 권력을 손에 쥐나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어 그도 곧 목숨을 잃는다. 결국 양공의 동생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게 된다. 공자 규와 소백은 모두 양공을 피해 다른 나라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에 들어와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 이때 공자 규에게는 관중이, 공자 소백에게는 포숙아가 있었다. 결국 소백이 규보다 앞서 왕위를 차지하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그가 포숙아의 말을 듣고 관중을 재상으로 앉힌 이야기는 유명하다. 앞서 관중은 공자 규 편에 서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숙아의 말을 따라 관중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그에게 나랏일을 맡긴다.
齊遺魯書曰 子糾兄弟 弗忍誅 請魯自殺之 召忽 管仲讎也 請得而甘心醢之 不然 將圍魯 魯人患之 遂殺子糾于笙瀆 召忽自殺 管仲請囚 桓公之立 發兵攻魯 心欲殺管仲 鮑叔牙曰 臣幸得從君 君竟以立 君之尊 臣無以增君 君將治齊 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 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 不可失也 於是桓公從之 乃詳為召管仲欲甘心 實欲用之 管仲知之 故請往 鮑叔牙迎受管仲 及堂阜而脫桎梏 齋祓而見桓公 桓公厚禮以為大夫 任政
이런 통이 큰 모습은 노나라의 자객 조말과의 일화나, 자신을 배웅한 연장공에게 땅을 떼어준 이야기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덕분에 그는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패자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그가 봉선 제사를 치르려 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하, 은, 주 삼대의 왕이 봉선을 했다고 하며, 후대에는 한무제에 이르러서야 봉선을 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그 기간을 짧았으나 제환공은 황제에 버금가는 위세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도 관중과 습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한풀 꺾인다.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문제였는데, 패자로 이름을 올린 그도 자식들의 권력 다툼에 어떻게 손 쓸 수 없었다. 형제를 꺾고 왕에 오른 그의 비참한 최후였다. 환공의 자식들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환공의 시체는 버려졌고, 시체의 벌레가 문밖까지 기어 나올 정도였다. 권력자의 참혹한 죽음. 환공의 이 명암은 권력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지.
환공의 죽음 이후 제나라의 세력은 크게 꺾인다. 대부의 세력이 강해져 왕위를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장공과 최저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제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대부 최저는 태자 광을 왕으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장공이다. 그런데 장공은 최저의 아내를 사랑했다. 자주 최저의 집을 찾아 정을 통했단다. 어찌나 자주 그 집을 드나들었는지 최저의 갓을 가지고 나올 정도였다고!!
이 사실을 안 최저는 장공을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최저가 병을 핑계로 집에 물러나 있던 어느 날 장공은 문병을 핑계로 최저 집을 찾았고 최저의 아내를 찾았다. 그러나 최저의 아내는 최저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돌리고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장공은 기둥을 안고 노래했단다.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지.
이때 최저의 부하들은 장공을 포위했고 결국 장공은 도망치다 목숨을 잃는다. 최저의 집 안에서 장공은 목숨을 잃는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장공의 시체 앞에서 곡을 한 사람이 바로 안영이었다. 사마천은 <열전>에서 환공을 보좌한 관중과 이 안영을 함께 엮어 소개한다. <관안열전>이 그것이다.
한편 최저의 죽음을 기록한 제나라 태사의 이야기는 사관의 절개를 보여주는 일화로 훗날 대대로 회자된다. 사관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고 적는다. 이에 분한 최저가 그를 죽였으나 그 동생이 다시 똑같이 썼다. 최저가 그 동생을 죽였으나 다시 그의 동생이 똑같이 적었다. 최저도 세 번은 죽일 수 없어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시대의 모습을 후대에 고스란히 전해야 한다는 사관의 실록實錄정신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다.
이후 제나라의 역사는 매우 어지럽다. 결국 강공을 끝으로 여상에서 시작한 여씨 제나라의 맥은 끊어진다. 제나라에서 권력을 쌓은 전씨 집안이 나라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전씨의 제나라 이야기는 이후 <전경중완세가>에 이어진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였는데, 위세를 다시 떨치기까지는 다시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오태백세가>와 비교하면 <제태공세가> 훨씬 복잡하다. 아마 내부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사사로이 정을 통하다 권력을 잃은 제양공, 제장공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러한 다양한 사건들이야 말로 춘추전국시대의 속살을 보여주는 일들이 아닐지. 난세, 그 복잡한 이야기가 앞으로 더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