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주체의 해석학> 0414후기 +4
유택
/ 2017-04-15
/ 조회 1,702
관련링크
본문
<주체의 해석학> 0414 후기
부제 : “이 모든 것은 다 니 탓이니라...”
관념적이어서 너무 싫다. 뭐 사고실험도 아니고 삶은 이렇게나 내 눈앞에 온몸으로 느끼고 실재하는데 언제까지 구름 따먹듯 ‘말잔치’만 하고 앉아 있을 것이냐가 기존의 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아우 제발 니부터 잘해라 응? 좀 제발~!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나? ㅎㅎㅎ 그러나 이번 세미나를 거치면서 다시 든 생각은 이것입니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라는 말, 즉 자기 자신으로써의 ‘주체/진실’에 이르기 위해 자기변형을 시도해야 한다면, 무언가를 해야 하겠고, 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자기의 이미 고정된 고집스러운 생각에, 아프지만 섬뜩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생각을 텍스트로 정리하고 나누고 세미나를 통해서 진정으로 내가 바뀌는 그 순간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떵떵거려봤자, 기존의 오류를 덮어쓰고 있는 내가 그 변화/변형의 바람을 들이마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계속 밀쳐만 낸다면 말마따나 말짱 도루묵 아니겠어요? (오류가 걷히고 뭔가 바뀌면서 구축된 훌륭한 영혼성(?)이 다가온다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잘 모르겠고 여튼 오류 걷어내기와 자기변형 작업만이라도…) 흐르는 시간이 실로 안타까운거죠. 시간은 돈이여서가 아니라 이 순간 순간이 내게 주어진 ‘삶’ 그 자체인데 말이죠! 어쨌든 항상 셀프 후기를 쓰는 습관 때문에 다시 노트북을 열었는데… 뚜잉~!!! @.@ 카트린X 아라차의 뭔가 한큐에 뿜어져 나오는듯한 느낌의 강력한 후기에 그대로 넋을 놓고 한참을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자기배려는,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 인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국가통치가 자기 배려의 최종 목적이었기에, 타인을 통치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자기배려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자기배려는 개인생활에 보편적으로 즉 만인에게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선택적 구원의 희귀성이 나오고요. 그러면 사람들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을 할 것인가. 그래서 이 시기에는 타자의 필요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구원해야 하니까요. 타자를 통해, 타자를 매개체로 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더 앎을 축적하여 깨닫는 주체(인식하는 주체가 아닌)가 아니라 스승/친구/애인 등등의 우정/애정에 기반으로 한 비판적(?) 관계성 속에서(파레지아라는 말이 드디어 나옵니다) 자기 자신을 주체로 구축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러야 합니다. 이 시대 자기배려의 목적, 바로 ‘자기’입니다.
이 즈음의 시기에 두가지 철학적 유형이 나옵니다. 헬레니즘적 유형과 로마적 유형. 에피쿠로스나 스토아처럼 자기배려를 하게 만드는,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헬레니즘적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로마적 유형은 주인/고객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시종일관 종알종알 조언해대는 사적 고문의 형태였습니다. 실존의 고문인 소위 지금의 말로 바꾸자면 ‘컨설턴트’와 같은! 그 결과, 삶/정치/처세/웅변/수사등등 여러 분야에 조언을 하는 직업 철학자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면에서는 탈전문화되고 세속적(?맞나..)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즉 로마시대 깊숙히 들어가면서) 이 철학자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나오는 철학자가 우리의(아니 나만의?) 멋있는 유프라테스이지요. 전 유프라테스 묘사한 장면에서 완전 반해서 마구마구 줄치며 혼자 박수무당처럼 덩실덩실 기분 좋았었는데 울 반장왈 그거 아니라고 하네요. 반-견유주의자 유프라테스. 허울만 좋은 세속적인 유프라테스. 젠장.. 진짜루 내눈엔 멋있기만 한데 아니라고 하니 그럼 아닌가 다시 심사숙고 하겠습니다. ㅋ
후반부에서 인상 깊은 건 양생술/가정관리술/연애술 이 세가지 영역이 다시 자기실천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워낙에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자기배려/자기실천의 영역에 통합되어 있다가, 소크라테스-플라톤(고대그리스 시기)때부터 분리되어 자기실천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었죠. 그런데 이제 다시 1,2세기에 재통합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에서 행해진, 배려해야 했던 자기는 영혼 이었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는 이 세가지가 실존의 규칙이자 목표인 자기 실천을 훈련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의 자격으로 의미 지워지는데요. 이것은 1,2세기의 자기배려가 ‘보편적 개인화’로 변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방법상의 문제도 바뀌어갔다고 이해하면 되는 걸까요? 살짝 잘 모르겠네요.
조금 세미나 내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데, 고대 그리스 동성애 이야기입니다. 하도 스승과 제자사이에 에로스(성적인 의미로써)적 우정이 많이 등장해서요. 물론 지금의 에로스/우정의 감각으로 이해하기엔 좀 힘든 면도 사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수준이랄까요. 지금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설득 논리가 있는데요. 고대 그리스에는 동성애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현재 그러하지 못하다. 아니 억압받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고 구축 되어진 사회/문화적/종교적 이유로, 즉 인간이 역사적으로 만들어온 것들에 의한 인위적 인간 억압이다. 원래는 그렇지가 않았다. 고로 동성애 억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고로 지금 억압받는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이 동성애 해방 전략전술 차원에서 예전의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웠던 고대 그리스 동성애 문화(플라톤의 ‘향연’ 이야기도 포함해서)를 일례로 많이 끌어옵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없어지면 동성애 해방이 온다는 맑스주의적 동성애 해방담론책도 문득 떠오르네요...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좀 그것들이 일면적이고 유치하다는 생각도…) 그런데 여기서 제 개인적인 의문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소위 ‘동성애’적이라고 지금 이름 붙이는 건 사실 지금 우리의 시각/시점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 요점은, 왜 ‘고대 그리스 동성애’라고 이름 붙이고 그걸 굳이 현재의 동성애 해방담론의 예시로 드느냐 그러는게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이 무슨 정리도 안되는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지..ㅠ)
<주체의 해석학>을
읽는 이유가, 아니 푸코의 전작 읽기에 감히 도전해 보겠다는 이유가,
제 극히 개인적이고도 절실한 문제(세미나원 모두들 각자의 삶의 이유로 절실하고..)에 대한 어떤 사고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인데요. 피곤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인조인간 탈영혼 상태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중얼대기도 하고. 그게
다 내 삶과 씨름하는 중이다 생각하려고요. 그런데 사실 씨름할 것이 아니라 살살 달래가며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결국 울 반장왈 세미나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하다는 자기고백글이 완전 제 이야기이기도
할 것 같아요. 정말 과욕의 1학기이다보니. 쓰다보니 뭔가 평소와 다른 후기가 되었습니다. 다 아라차 때문이에요. (자기배려의 철학자왈 제발 남탓하지 말랬는데 @.@ 그래 내탓이요~~!!) 뉴미님에 이어 세미나에 새로 온 연두님 반갑고요. 이것으로
후기 마칩니다.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다 니 탓입니다. ㅋㅋㅋ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ㅎㅎㅎ텍스트에서 "니 탓" 얘기 부분은 스승인 철학자가 stiltiltia 상태인 학생(?)을 끌어내기(educate) 못해도 학생 탓이 아니라 본인 탓이라고 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확인해 봐야 겠네요. "애정과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 예쁜 혹은 아픈 충고를 해도 그걸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니 개념치말아라" 난 대략 이런 식으로 내멋대로 이해한 듯ㅎㅎㅎ
후기 넘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뭔가 평소와 다른 후기, 잘 읽었습니다. ㅎㅎ
'아프지만 섬뜩한 변화'를 말하는 부분에선 저도 잠시 훅, 숨을 길게 들이마셨습니다.
은근히 맥락 정리도 잘 하고, 첨예한 질문도 잘 하십니다. 다시 한 번 감탄!
유프라테스 좋아하는 문제는 개인 취향이니, 그 분이 견유주의 스타일의 속세초월한 철학자 모습에 대비되는
그 시대 아이돌 혹은 유명배우 스타일 철학자로 대표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을 듯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마 다들 눈 앞에 거지꼴의 디오게네스와 유프라테스가 나란히 서 있으면,
일단은 유프라테스에게 마음이 더 갈 테지요. 그러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않을게요. ㅎㅎ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은 헬레니즘에서 로마식의 자기 배려로 넘어가면서 확립되는 자기배려의 실천방식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유택님 설명대로 탈전문화와 세속화의 결과로 나타났겠지요.
그리스식 동성애에 대해서 더 말하자면, 제가 플라톤의 저작을 읽어보질 않았다는 점 먼저 밝혀두고요.
푸코의 강의에서 언급되는 부분만 보면, 그 동성애는 교육과 관련된 측면이 컸던 듯 합니다.
권위와 신뢰를 기반으로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훈육의 일종으로 신체의 복종을 강조했던 거지요.
그것이 자유로운 연애가 아니라, 성인과 소년 사이에 이루어졌던 점에서 이 것이 두드러집니다.
남자 성인이 소년의 몸을 쾌락의 대상으로 이용하고, 푸코가 말했던 대로 권력은 신체에 작용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해 주는 거지요.
지식과 권력은 그런 방식으로 전수됩니다.
몰론 육체의 쾌락을 매개로 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연인관계에서나 허용될 법한 내밀한 애정과 배려, 신뢰가 존재할 수 있었겠지요.
냉정하게 말해서 유택님의 지적대로 지금의 관점에서 말하는 '연애'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뉴미님의 댓글
뉴미
스승 프론토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서신들에서, 문제의 텍스트 - 194p 아홉째 줄 이후로 다섯 줄 -
... 귀가하여 잠자기 위해 모로 돌아눕기 전에 나는 내가 한 일을 펼쳐 늘어놓으며 달콤한 스승에게 나의 하루를 보고한다. 내 건강, 신체적 행복과 맞바꾸어 당신을 욕망하고 싶고, 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더없이 유감스럽게 생각해. 나의 사랑, 나의 관능 프론토 건강 조심해. 사랑해 ...
텍스트 그대로는 너무나 멋져서 눙물이 났는데, 시대 흐름을 파악하고 보니 그렇고그런(?) 텍스트가 되네요~
쾌락의 대상으로 소년의 몸을 이용하다니, 그 와중에도 나름의 진실이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서도...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 바깥에 있다" 배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했어요~
지난 금요일 세미나에서 우산을 두고 왔어요, 우산이 없다는걸 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혹시 보라빛 고양이 패턴의 검정 장우산 보신 분께서는 찾아갈 수 있도록 세미나룸 어딘가에 잘 놓아주시면 감사할거예용~! ^^
덧_앗! 이런, 고양이 패턴이 아니었네요... 왜 그렇게 기억하는지, 검정 배경에 보라색 고양이는 도대체 어디서 본 패턴인지 한동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되겠네요. 앗 부끄부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