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0411 후기 +5
희음
/ 2017-04-16
/ 조회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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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그릇으로서의 ‘코라’
이번 파트에서 히로키의 논의는, 1970대 이후의 데리다가 에크리튀르를 보다 잘 말하기 위해 은유어로 쓰는 ‘코라(khora)’에서 시작합니다. ‘코라’란 사전적으로 장소, 용기, 모판, 국가 등을 뜻하는데, 그 중 데리다가 중요하게 끌어와 사용하는 의미는 ‘장소’와 ‘용기’입니다. 즉, 에크리튀르는 어떤 것에 새겨진 기록, 남겨진 흔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다만 하나의 장소로 무엇을 담는 그릇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록과 흔적은 콘텍스트와 결합하거나 접합할 때에야 비로소 다른 무엇, 혹은 모든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그릇이 자신의 오목한 공간에 무언가를 담을 때에야, 그리고 텅 비어있던 장소가 자신의 몸에 다른 무엇이 자리 잡도록 할 때에야.
손 안의 씨(에크리튀르) 뿌리기(산종)
그 현상은 다시금 땅이라는 콘텍스트에다 손 안의 씨(에크리튀르)를 흩뿌리는 행위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씨앗들이 어떻게, 어떤 틈새에 몸을 숨기게 될지, 싹을 틔울지 말지, 혹은 어떤 전위적인 형태로 썩어가게 될지는 뿌려지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 안에 움켜쥐어져 있는 이상, 그 씨앗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에 머무른다는 것. 손 안에 있지만 손 바깥의 시선에 대해서는 씨앗의 내용, 나아가 그 씨앗의 ‘있음’조차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령의 목소리,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이는 이번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우편’의 비유와도 접목됩니다. ‘기원도 발신도 발신자도 없는’ ‘‘순수’상태의 우편’이라는 데리다의 중추적 비유. 우편의 비유와 함께 그가 데려오는 인물은 소크라테스입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듣는 하나의 목소리, 다이몬(daimon, daimonion)을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데리다는 그 목소리를 데몬(demon)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악마적인 것으로 소급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여기서 추출하고 싶어 하는 의미는 ‘유령’입니다. ‘자신의 등장을 반복하고 있는 재래이고, 그것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재래’하는 유령의 목소리 말입니다. 그 음성은 ‘단순한 형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반복적이고 자동적’입니다. 그것은 우리 혹은 타자의 의지나 욕망과는 상관없이 옵니다. ‘쾌락원칙에 의한 호출 없이 재래하는’ 목소리인 것입니다.
고유명, 그 둥둥 떠다니는 기록들
데리다 자신이 <우편엽서>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그가 기억하는 인명, 지명, 날짜 등의 고유명을 끊임없이 기록하는데, 그것은 기록되는 순간 데리다로부터 분리되어, 고유명이라는 그 자신의 몸으로만 남습니다. 즉 그 자신의 신체에만 기입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둥둥 떠다니는 기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부터 그것은 데리다 자신이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기록된 것이 되고 그 기억의 단독성을 잃게 되며 단지 유령으로만 남게 됩니다.
유령으로 ‘부활한’ 소크라테스
데리다는 1968년의 논문, <플라톤의 파르마케이아>에서, ‘쓰는 것’의 위험성을 피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바로 플라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는 점, 즉 그렇게도 중요하게 말 되어졌던, ‘쓰지 않도록 할 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플라톤이 ‘쓴’ 텍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주목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는 그 목소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그가 죽고 그를 전하는 플라톤의 기록(에크리튀르)이 등록되고 난 뒤에야 하나의 유령으로서 이 세계에 떠돌게 된 것입니다.
초월성을 향한 후설의 안간힘
데리다의 이러한 논의는 후설이 주력하여 논하는 초월성에 대한 비판과도 맥이 닿습니다. 후설은 인간의 인식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이 세계의 보편성과 초월성을 정식화하려고 했습니다. 그 셋은 직관, 상상, 개념으로 나뉩니다. 직관이란 지금, 여기, 즉 ‘현재’와 관련된, 다양한 것을 포획하는 것. 상상이란 ‘과거’에 기반하여 ‘미래’를 이끌어내는 작업, 이를 테면 직관된 것을 재생산해내는 것. 마지막으로 '개념'은 이러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시간성을 뛰어넘는 일반과 보편의 ‘범주’를 말하는데, 후설은 여기에 방점을 찍고 싶어 하고 여기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해내고 싶어 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중심이자 시초가 되는 ‘개념’으로 ‘초월성’이라는 깃발을 꽂으려 했던 것입니다.
초월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허무는 것으로서의 ‘기록’
그런데 여기서 그의 스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출발하려고 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말입니다. 즉 그 ‘World Clock’과도 같은 개념이 도입되려면 하나의 Writing이라는 대체보충 요소가 필요해지는데, 그러한 Writing이란 지나치게 현재적이며 시류적이라서 후설이 그것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함시키는 순간 그 이론은 오염될 수밖에 없는, 혹은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율배반의 구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쓰지 말 것’을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플라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써만 우리에게 닿게 된, 그런 역설처럼 말이죠.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지젝에게서 제기된 ‘데리다의 유럽 중심주의 되풀이’는 데리다에 의해 이미 반박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유럽이 아닌 것, 유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유럽이 결코 아닐 것으로 유럽을 여는’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유럽철학에서 시작하는 것은 지극히 의도적이고 전략적이라는 말입니다. 유럽철학 안에서 그것을 내파시키고자 하는 것. 유럽의 한 가운데에 그가 서 있다 해도 그는 '유럽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조건법 과거, ‘일지도 모르는’의 방법론
유럽 중심주의는 유럽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유럽이 곧 역사의, 철학의 대표라는 초월론적 역사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두 ‘시제’ 의 비교, 초월성을 대표하는 하나의 시제를 버리고 다른 하나의 시제의 편에 서는 것으로써 그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내일이면 그는 이미 죽었을 거야.’라는 전미래에게서 몸을 돌려, 조건법 과거의 포즈로써 죽었던 그를 살려내는 것. ‘내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일지도 모르는’이라는 의문을 끼워 넣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외부와 텍스트의 바깥'을 말하는 세상의 모든 중심주의, 즉 유럽철학이 붙들고 있는 힘들의 구축을 무화시키고 그것으로부터 유유히 미끄러져 나오는 데리다 만의 방법론인 것입니다.
*후설의 이론적 토대에 대해선 최원 선생님께서 무척 자세하고도 풍부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해종 선생님을 통해 이따금씩 이뤄졌던 데리다 원전 맛보기도 흥미로웠고요. 새로 오신 분들을 포함한 세미나원들의 관심과 집중의 열기 덕에 데리다를 향해 더 깊은 한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최원님의 댓글
최원오, 아주 많은 어수선한 내용들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주시다니, 역시 부반장님다우십니다! 주말 시간을 내서 이렇게 좋은 후기를 써주신 희음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유럽의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식은 위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데리다의 방식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발리바르 또한 유럽 안에서 비유럽적인 것, 종교 안에서 비종교적인 것을 통해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음 화요일이 다가오고 있고 제가 본의 아니게 발제를 한 번 더 맡게 되어서 마음이 급해지는데, 희음 선생님의 후기가 기운을 북돋아 주네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
아, 이런. 너무 감사합니다. 조금 더 서둘러서 후기 올렸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해 내용정리라도 깔끔하게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세미나 때 이야기되었던 양질의 논의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어요. 아쉽고 송구스런 마음.
그런데 이상하게 부반장이라는 이름이 저를 자꾸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순간적, 충동적, 산종적, 우편적 '부반장'일 뿐인데 말예요.^^ 선생님 덕분에 요즘 부쩍 발리바르가 궁금해집니다. 공부할 게 너무 갑자기 많아지면 안 되는데...ㅎㅎ
최원님의 댓글
최원
이 글은 오늘 페북에 포스팅한 것입니다. 세미나 구성원들, 우리 실험자들의 다른 분들과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 여기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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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3주기를 맞아 아즈마 히로키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술가 오카자키 겐지로는 어느 좌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 또는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현대예술, 구체적으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나 일리야 카바코프의 작품에서 일종의 '반동성'을 지적하고 있다. 오카자키에 의하면, 그들의 작품은 관객과의 사이에 '강한 공동성'을 만들어내는데, 바로 그것을 통해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예를 들어, 볼탕스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아이들의 얼굴사진을 나란히 놓고, 그들의 단편적 유품, 의복, 구도를 쌓아올린 작품을 제작했다. 설치의 전체적 의미는 의도적으로 확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앞에 둔 관객은 "타자와의 교환도 불가능하고 일반화도 불가능한, 완전 혼자만의 고독한 경험이나 감정"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트릭'이 존재한다. 모든 의미가 박탈된 작품 그 자체의 현전은, 역으로 "이 경험의 고독함이 다른 고독과 강하게 결합되어 복수의 고독이 서로 연대하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결과로서 '아우슈비츠'라고 이름이 붙여진 특정한 단편 주위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역설적 공동체, 단편의 저편(표상불가능한 것)을 둘러싼 관객의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오카자키가 '센티멘털 장치'라고 이름 붙인 이런 전략은 명확히 앞서 서술한 [<쟁론>의] 리오타르와 같은 발상, '계측 불가능'한 고유명을 둘러싼 '감정'이라는 논리 위에 성립하고 있다. ..... 그러나 만약 그 논의가 '아우슈비츠'라는 외상을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레벨에서 하나의 폐쇄적 공동체[말하자면 시오니즘적 공동체]를 낳는 것이 된다. ......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은 한스에 대해]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왜 그것이 _이_ 한스가 아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선택은 거의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 어떤 삶은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그뿐이고 거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거기에서 '어떤 이'는 고유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마 이 우연성, 전달경로의 확률적 성질이 아닐까. 한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한스든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 즉 한스가 살해당하지 않았을_지도_모른다_는 것이야말로 비극인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 71~74쪽)
어떤 면에서 보면 유사한 맥락에서 나는 작년에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에 실을 논문(멈춰진 세월, 멈춰진 국가)을 수정 보완하면서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바꿨다.
"발리바르는 기존의 정치철학은 ‘다중이란 본래적으로 폭력적이며 국가만이 시민공존의 유일한 요소’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공존(반폭력)의 관념을 다중의 자율성이라는 관념과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국가주의자들을 일갈하며 했던 발언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국가에 의한 인민의 교육’이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정반대로 국가야말로 인민에 의한 매우 근엄한 교육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민에 의한 국가의 교육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세월호 유가족과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함께 연대하여 쟁취하고자 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은 분명히 그러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지만 사실상 좌절되었고, 현재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의 다양한 방해공작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그 자체로 이 투쟁의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된 특별조사위원회의 재건과 운영은 여전히 하나의 목표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4.16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돌아오는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투쟁이 너무 세월호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과거 나의 시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정치 활동이 다양한 활로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참고해 볼만한 외국의 사례는 1911년 3월 25일에 뉴욕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대응이다. 이 사건은 의류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였는데, 건물에 아무런 방화 장치도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통제를 위해 일부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유일한 탈출로인 비상계단과 화물 엘리베이터가 화재로 인해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대형 참사로 이어진 경우였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9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는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인 뉴욕 시민들은 장례식을 계기로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고 마침내 ‘공공안전에 대한 시민 위원회’를 결성하여 의회로 하여금 공장조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법률을 발의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9개 도시, 그리고 나중에는 뉴욕 주 전체를 대상으로 벌인 이 공장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에 기초하여 1912~13년에 새로운 노동법이 입법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9년에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규칙을 다루는 행정위원회까지 설치되었으며, 노동법을 현대화하는 핵심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여객산업 전반 및 해양 안전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추진하도록 정부 및 의회에 압력을 가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제도적인 변화들을 이끌어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감시 통제하는 시민들의 활동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보장하는 길을 열어내는 운동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과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발생 과정 자체의 진상조사에만 시야가 한정되고, 박근혜 정권의 책임이라는 관점에 우리의 사고가 갇혀 버리면서(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다수의 음모론은 이러한 협소한 시야를 고착시키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실질적인 제도적인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세월호 운항비리로 징역형을 받은 30명의 관리인들이 선박안전공단에 의해 채용되고 그 신분도 민간인에서 준공무원으로 격상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개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세월호와 관련된 시민들의 정치 활동을 어떤 방향에서 조직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야말로 세월호의 원혼들 앞에서 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책임지고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실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쓴 세월호 유족들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월’은 한국말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가진 배가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가족들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멈추었습니다.” 정말 완벽한 의미부여다. 다만 나는 나의 입장에서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멈춘 것은 유족들의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간, 따라서 세월 그 자체라고. 세월이 멈추었다고. 어떤 불의(injustice)가 이 세월을 멈추었다고. 햄릿의 말처럼, “시간이 끊어졌다”(Time is out of joint). 이렇게 멈춘 세월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다시 흐른다 해도, 적어도 예전의 그 세월이 다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것은 (단 번에 오는 종말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종언의 시작(a beginning of the end)을 표시한다. 새로운 세월을 시작하라고 명령하는 그 모든 원혼들, 유령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 무엇을 맹세할 것인가?
유령 (지하에서) 맹세하라. / 그들이 맹세한다(<햄릿> 1막 5장).
햄릿 오 이런, 호레이쇼, 이 일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내 더럽혀진 이름은 내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다면 자네의 행복을 한동안 잊고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주겠나,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말일세(5막 2장)."
희음님의 댓글
희음
너무 좋은 글, 게시판에 따로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저도 방금 비슷한 맥락의 후기글을 올렸어요. 아무것도 아닌...
최원님의 댓글
최원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