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0411 후기2(세월호, 0416) +4
희음
/ 2017-04-16
/ 조회 1,212
관련링크
본문
봄입니다. 4월입니다. 그리고, 4월 16일입니다.
광화문에도 안산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나가지 못했으나 나가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나갔어야 했다는 후회만큼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이 세 번째로 돌아온 기념일, 바로 그 4월 16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광화문과 안산에 나갔다고 해도 아이들, 희생자들이 배를 타기 이전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의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광화문과 안산에 나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며,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은 그것보다 더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입니다.
리오타르와 데리다 모두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가능성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리오타르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이라고, 또한 그것을 아우슈비츠 이후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하며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을 절대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침묵으로 나타나고 그 침묵은 하나의 거대한 고통의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오카자키 또한 리오타르와 같은 입장에 섭니다. ‘타자와의 교환도 불가능하고 일반화도 불가능한, 완전한 혼자만의 고독한 경험이나 감정’ 즉 그 고유한 이름의 되풀이 불가능성을, 고통 혹은 고독이라는 감정의 현재화로써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센티멘털 장치이자 역설의 공동체입니다. 모두가 고독의 감정으로 묶인 그 공통 감각의 순간에, 애도는 애도로써 소비됩니다. 감정은 감정을 통해 어디로든 잘 흘러갑니다. 그때 우리는 어쩌면 ‘슬픔의 순간’이라는 기쁨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이후로, 보다 맑은 마음으로 잘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데리다라면 먼저 4월 16일이라는 달력의 한 지점을 가리킬 겁니다. 기념일. 사건의 일회성은 특정 날짜에 의해 지정되지만, 날짜 그 자체는 달력이라는 반복가능성에 의해서만 존재합니다. 달력이 없다면, 4월 16일이라는 숫자, 즉 기록이 없다면, 4월 16일에 점을 찍고 동그라미를 치는 행위 또한 없다면 4월 16일이라는 날짜는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날짜는 유령처럼 단순하고도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어떤 선의나 악의도 없이. 그 숫자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 숫자 앞에 무방비인 채 되돌려집니다. 그 숫자 앞에서 우리는 망설입니다. 눈을, 손발을 어디에다 둘지 모르고, 고독해지는 방법, 고통으로 진입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채로 멀뚱히 서 있을 뿐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자들은 우연에 의해 선택된 자들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한스’라는 이름의 희생자가 있을 때 한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한스가 살해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라는 이름, 혹은 세월호라는 이름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것은 그 고유명에 대한 애도가 됩니다. 그 절대적인 비극, 그때, 그 장소에만 일어난, 일어났고 이제는 끝나버린 그 고유한 사건에 대한 애도.
데리다는 그것을 경계합니다. 조건형 과거완료의 시제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죽음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절대적 고유명으로 대표되는 초월적 비극에 대한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말일 뿐만 아니라, 그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그의 태도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고유명으로 불리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질 때, 세련된 ‘센티멘털 장치’에 의해 그 사건은 잘 완성된 과거로 남고, 우리의 감정 또한 너무도 잘 매듭지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애도불가능성은 지나간 시간 속에 박제되어 버린 이미 죽은 것,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사라진 무엇에 대한 가로저음(부정)이며, 그것은 또한 그것을 그저 끝나버린 무엇으로 바라보고 애도하는 일에 대한 가로저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애도불가능성은 끝없는 애도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살아서, 유령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기념일에 대한 끊임없는 애도. 그렇게 돌아오는 것 앞에서 머뭇거리고 또 엉거주춤하게 서는, 계속 고쳐 서도 자꾸 흐트러지는 우리의 아무것도 아닌 몸짓에 관한.
돌아온 4월 16일을 기억하는 일,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되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되돌아오는 그 날짜 앞에서 머뭇거리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보입니다. 그가 반갑지 않습니다. 그는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끝없는 애도를 위한 애도의 불가능성.
잘 읽었습니다.
고독해지는 방법, 고통으로 진입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채로 멀뚱히 서서
나의 일부, 우리의 일부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애도가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나의 일부, 우리의 일부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이란 말이 너무 와 닿습니다.
그 자리에 그들 아닌 누군가가, 혹은 우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데리다의 조건형 과거완료보다
삼월 님의 말씀, 그 표현이 우리가 지금 마시는 공기의 진리에 더욱 가까운 말인 듯해서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라는 유령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말, 우리를 괴롭히는 형식으로 귓가를 맴도는 다이몬, 그 유령의 주문을 떨쳐내지 않아야겠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세월호 참사를 한 명이 희생당한 300여개의 사건으로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지난 주 함께 보았던 다큐 영화 마지막에
희생자 이름 하나하나가 노래로 불려졌을 때 저는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한스'와 '한스가 아닌 그 누군가' 그리고 그 가정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로부터,
애도는...그 불가능성의 애도는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함부로 소비되는 애도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감정을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가정법의 사건을 다시 고유명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자기각성 모드)
'애도의 불가능성' 앞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성거리면서,
무슨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 채 더듬거리는 용기를 조심스레 가져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그 웅얼거림으로....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그것이 한스가 아닐 수도 있었고 바로 당신이거나 나일 수도 있었다는 바로 그 무서움을 보아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과 함께, 그 비극이 바로 그 한스에게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날, 그 순간, 그 가스실에서 일어났다는 것 또한 데리다는 끌어안으려 하는 듯합니다. 반복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지점부터 짚어야 할 테니까요. 거기가 우리의 시작점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끝없이 한스를 불러내야 합니다. 416의 희생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다시금 불러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같은 것'이면서 다른 것으로 우리의 목소리에 얹혀 떠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때 함께 죽은 우리의 일부분이 내는 목소리일 겁니다.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더듬거리는, 비틀거리는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우리가 실천의 몸으로 변태하기 위한 하나의 처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저 역시 조심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