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0411 후기3 (0416) +4
최원
/ 2017-04-17
/ 조회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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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오카자키 겐지로는 어느 좌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 또는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반응'을 만들어내는 현대예술, 구체적으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나 일리야 카바코프의 작품에서 일종의 '반동성'을 지적하고 있다. 오카자키에 의하면, 그들의 작품은 관객과의 사이에 '강한 공동성'을 만들어내는데, 바로 그것을 통해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예를 들어, 볼탕스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아이들의 얼굴사진을 나란히 놓고, 그들의 단편적 유품, 의복, 구도를 쌓아올린 작품을 제작했다. 설치의 전체적 의미는 의도적으로 확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앞에 둔 관객은 "타자와의 교환도 불가능하고 일반화도 불가능한, 완전 혼자만의 고독한 경험이나 감정"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트릭'이 존재한다. 모든 의미가 박탈된 작품 그 자체의 현전은, 역으로 "이 경험의 고독함이 다른 고독과 강하게 결합되어 복수의 고독이 서로 연대하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결과로서 '아우슈비츠'라고 이름이 붙여진 특정한 단편 주위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역설적 공동체, 단편의 저편(표상불가능한 것)을 둘러싼 관객의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오카자키가 '센티멘털 장치'라고 이름 붙인 이런 전략은 명확히 앞서 서술한 [<쟁론>의] 리오타르와 같은 발상, '계측 불가능'한 고유명을 둘러싼 '감정'이라는 논리 위에 성립하고 있다. ..... 그러나 만약 그 논의가 '아우슈비츠'라는 외상을 절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레벨에서 하나의 폐쇄적 공동체[말하자면 시오니즘적 공동체]를 낳는 것이 된다. ......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은 한스에 대해]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왜 그것이 _이_ 한스가 아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선택은 거의 우연적으로 결정되었다. 어떤 삶은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그뿐이고 거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거기에서 '어떤 이'는 고유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마 이 우연성, 전달경로의 확률적 성질이 아닐까. 한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한스든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는 것, 즉 한스가 살해당하지 않았을_지도_모른다_는 것이야말로 비극인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 71~74쪽)
어떤 면에서 보면 유사한 맥락에서 나는 작년에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에 실을 논문(멈춰진 세월, 멈춰진 국가)을 수정 보완하면서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바꿨다.
"발리바르는 기존의 정치철학은 ‘다중이란 본래적으로 폭력적이며 국가만이 시민공존의 유일한 요소’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공존(반폭력)의 관념을 다중의 자율성이라는 관념과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국가주의자들을 일갈하며 했던 발언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국가에 의한 인민의 교육’이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정반대로 국가야말로 인민에 의한 매우 근엄한 교육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민에 의한 국가의 교육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세월호 유가족과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함께 연대하여 쟁취하고자 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은 분명히 그러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지만 사실상 좌절되었고, 현재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의 다양한 방해공작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그 자체로 이 투쟁의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된 특별조사위원회의 재건과 운영은 여전히 하나의 목표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4.16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돌아오는 현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투쟁이 너무 세월호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과거 나의 시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정치 활동이 다양한 활로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참고해 볼만한 외국의 사례는 1911년 3월 25일에 뉴욕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대응이다. 이 사건은 의류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였는데, 건물에 아무런 방화 장치도 없었으며, 노동자들의 통제를 위해 일부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유일한 탈출로인 비상계단과 화물 엘리베이터가 화재로 인해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대형 참사로 이어진 경우였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9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는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 충격에 휩싸인 뉴욕 시민들은 장례식을 계기로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고 마침내 ‘공공안전에 대한 시민 위원회’를 결성하여 의회로 하여금 공장조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법률을 발의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9개 도시, 그리고 나중에는 뉴욕 주 전체를 대상으로 벌인 이 공장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에 기초하여 1912~13년에 새로운 노동법이 입법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9년에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규칙을 다루는 행정위원회까지 설치되었으며, 노동법을 현대화하는 핵심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여객산업 전반 및 해양 안전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추진하도록 정부 및 의회에 압력을 가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제도적인 변화들을 이끌어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감시 통제하는 시민들의 활동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보장하는 길을 열어내는 운동을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과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발생 과정 자체의 진상조사에만 시야가 한정되고, 박근혜 정권의 책임이라는 관점에 우리의 사고가 갇혀 버리면서(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다수의 음모론은 이러한 협소한 시야를 고착시키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실질적인 제도적인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세월호 운항비리로 징역형을 받은 30명의 관리인들이 선박안전공단에 의해 채용되고 그 신분도 민간인에서 준공무원으로 격상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개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세월호와 관련된 시민들의 정치 활동을 어떤 방향에서 조직할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야말로 세월호의 원혼들 앞에서 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책임지고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실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쓴 세월호 유족들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월’은 한국말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가진 배가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 가족들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멈추었습니다.” 정말 완벽한 의미부여다. 다만 나는 나의 입장에서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멈춘 것은 유족들의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시간, 따라서 세월 그 자체라고. 세월이 멈추었다고. 어떤 불의(injustice)가 이 세월을 멈추었다고. 햄릿의 말처럼, “시간이 끊어졌다”(Time is out of joint). 이렇게 멈춘 세월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다시 흐른다 해도, 적어도 예전의 그 세월이 다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것은 (단 번에 오는 종말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종언의 시작(a beginning of the end)을 표시한다. 새로운 세월을 시작하라고 명령하는 그 모든 원혼들, 유령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 무엇을 맹세할 것인가?
유령 (지하에서) 맹세하라. / 그들이 맹세한다(<햄릿> 1막 5장).
햄릿 오 이런, 호레이쇼, 이 일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내 더럽혀진 이름은 내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다면 자네의 행복을 한동안 잊고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주겠나,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말일세(5막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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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님의 댓글
희음
“‘국가에 의한 인민의 교육’이라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정반대로 국가야말로 인민에 의한 매우 근엄한 교육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라니요. 맑스 답습니다. 너무나도 시원하고도 뼈아픈 일갈!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던 햄릿, 끝날 것 같지 않던 머뭇거림을 삶처럼 입고 있던 햄릿은 이제 죽고, 그 세월을 이어받아 이제 우리가 남은 거로군요. 데리다의 말처럼 '단순하'고 '자동적'이며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그 날짜와 그 장소 앞에 우리는 매번 다시 섬과 동시에, 실천을 해야겠군요. 시간이 끊어진 그곳에서 유령들과 함께 다시 무엇이든 시작해야겠군요.
최원님의 댓글
최원예, 박근혜는 물러났지만 세월호에 대한 애도작업은 끝날 수 없겠지요.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고민해봅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최근 저는 고골의 '외투' 결말에 나오는 유령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자신이 생전에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 한다는 그 신파다운 설정에,
현실이 들어맞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파면시키는 그 힘의 몇 할은 분명 유령들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 유령들의 힘을 빌리고, 목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최원님의 댓글
최원저는 고골의 '외투'는 보지 않았지만, 데리다는 확실히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를 유령적인 것/회귀하는 것과 관련시킵니다. 삼월 선생님이 주목하는 부분에서 데리다도 사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