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417 4장 세미나 발제문
소리
/ 20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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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세미나] <성의 변증법> “4장 아동기를 없애자”
2017. 4. 17. 월
발제자: 소리
4장 : 아동기를 없애자
여성들과 아이들의 특별한 유대는 문화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 유대의 본질은 억압이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 서로를 강화시킨다. 여성해방과 아동해방은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 억압의 핵심은 자녀 출산과 양육의 역할이다. 이 역할과 억압들은 생물학적 가족 권력의 위계질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가부장제 핵가족에서 극심하며, 이는 아동기에 대한 숭배로 이어진다. 아동기에 대한 숭배를 알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가부장제 핵가족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가부장제 핵가족
파이어스톤은 우리가 쉽게 과거로 회귀하여 원시적 모계제에 갖는 향수, 환상에 대해 지적한다.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생물학적 가족이 있어왔고, 그에 따른 여성과 아이에 대한 억압도 정도의 차이를 가지며 존재해왔다.
그녀는 엥겔스나 라이히 보다 더욱 솔직한 지적을 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의 내용을 가져온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는 필수적인 단계로 존재한다. 이 이유는 여성의 특권이라는 것은 여성의 긍정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약점에 기초한 것이며, 여기서의 여성은 자연의 모든 불안한 신비들이 구현된 존재이다. 남성들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려 했고, 이것의 승리가 가부장제인 것이다. 여성에게는 생명의 신비로운 과정에 구속되어있었고, 남성과 함께 노동방식과 사고방식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남성은 여성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모계제는 남성의 완전한 자기실현으로 가기위한 한 단계에 불과하며, 여성의 생식 생물학에 입각한 억압과정의 한 단계일뿐이었다. 남성은 여성을 통한 자연숭배에서 자연정복으로 나아간다. 여성은 좋은 운명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다.
숭배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머릿속에서 행해지는 객관화 과정이다. 숭배당하는 여성은 결국 객체로서 주체인 남성의 머릿 속에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계제 사회 내에서 가부장제 사회보다 여성에 대한 대우는 조금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계제 안에서도 여성은 주체가 될 수 없다.
가족(Family)은 로마인들에 의해서 아내, 자녀 그리고 노예를 지배하는 사회적 단위의 우두머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또한 “famulus(하인)”는 가정 내의 노예의 수를 의미했고, “familia(식솔)”는 한 남성에게 속한 총 노예의 수를 의미했다.
가부장제는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로 등장하지만, 가부장제 핵가족의 형태는 가장 최근의 형태이다. 가족이라는 가치의 성장 또한 최근의 문화적 배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핵가족의 발달의 결과는 아동기와 연결된다. 파이어스톤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에 근거해 분석한다.
가족의 개념은 중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4세기부터 가족이라는 부부단위의 혈통문화와 재산상속을 위한 법이 제정되었고 남편과 아내의 공동 재산과 상속인들에 의한 공동소유가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부르주아 가족이 부상하게 되었다. 부권이 커지면서 부부의 공동 재산은 폐지되고, 모든 아들들에 대한 공동 상속이 장자 상속으로 대체되었다. 도상학적으로도 중세 시대에는 혼자 있는 사람이나 무리의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모여 연회를 여는 것이 표준이었다. 사람들이 은퇴해도 이 끊임없는 사회작용의 공동체에서 유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다형의 조직체가 깨어지고, 다수의 작은 사회인 가족, 그리고 소수의 대규모 집단인 계급으로 대치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개인의 심리학적 구조 자체와 심대한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서 생겨난 중요한 개념들로 ‘사춘기’와 ‘아동기’가 있다.
아동기의 신화
중세 시대에는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생각했다. 아이들은 태어난 계급과 가문에 따라 명확히 정리되어 사회적 지위에 오르도록 운명을 타고난 ‘작은 어른’이었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어른의 사회로 편입되기를 요구받았고, 그들 스스로도 도제 단계를 거치는 미래의 어른으로 자아를 형성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경제적 의존성에서만 찾을 수 있었고, 이들은 사회의 일종의 하인계급으로 사용되었다. 귀족의 아이도 약 7살 때부터 다른 가정으로 들어가 도제살이, 집안일을 했고, 이러한 시중의 일은 천대받지도 않았다. 어른도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부모에게 심하게 의존적으로 자라지 않았다. 전문화된 기술을 배우기 위한 학교의 도제제도는 어른과 아이들에게도 열려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오락, 옷, 학급은 없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부르주아지와 경험과학의 발달은 이 상황을 바꾸었다. 아동기라는 개면이 현대 가족의 부속물로 발달되었다. 아이들과 아동기를 묘사하는 용어가 나타났고, 이 용어들은 예술과 생활방식에서 다양하게 쓰였다. childreness와 같은 용어는 유행이 되어 여자친구에게 쓰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도 발달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목마처럼 작은 어른을 위한 크기만 다른 장난감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즐기는 오락은 하층의 문화로 넘겨지고, 성인용, 아이용으로 분류된 배타적 선택에 의한 오락이 발전되었다.
17세기까지 아동기는 새롭게 유행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아이들의 ‘순수성, 순진무구함’에 대한 다양한 개념과 묘사가 만들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악에 아동이 노출될까 염려했고, 아이들에 대한 분리와 소외가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가족은 아동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감시를 수반했고, 초기의 아이들에게 부여된 독립성은 사라졌다.
아동기의 복식사
이러한 현상은 아동 복식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복식은 사회적 신분과 번영을 표시하는 방법으로써, 성과 계급을 드러내는 확실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동기의 개념이 형성된 중요한 시기인 16세기에는 최초의 특별한 아동 복식이 나타났다. 아동의 의복은 어른의 고풍스러운 옷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배제시키는 것을 상징화했다.
17~18세기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 양쪽 어깨 아래에 부착되어 등을 따라 늘어지는 두 개의 넓은 리본을 매야했으며, 이것은 아동기의 옷을 표시하는 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없었다.
남자아이의 복장은 성과 아동기의 경제적 계급을 드러낸다. 남자아이의 복장은 3단계를 거친다. 유아는 배내옷에서 여자용 원피스로 바뀐다. 다섯 살 때쯤에 깃이 있는 남성 복장의 요소를 가진 옷으로 바뀌고, 마지막으로 소년이 되면 군인 휘장을 완비한 옷으로 나아간다. 의복은 남성의 통과의례의 한 형태이며, 현재에도 존재한다.
아동 복식의 역사에 반여된 성인기로의 통과의례 단계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일치한다. 남성은 여성이라는 하층계급에서부터 인생을 시작한다. 여자처럼 입었고, 여자아이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어머니에 대한 동일시를 한다. 그리고 5살 무렵에 남성의 ‘깃’이 있는 옷을 입으며 아버지를 모방하며 어머니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여성으로부터 탈피한 어른의 복장, 앞으로 가지게 될 완전한 성인 남성의 힘에 대한 약속이 군사적 휘장으로 보상받는다.
반면 소녀들의 복장은 어떨까?
아동기는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여자아이는 배내옷에서 곧장 성인 여성의 복장으로 간다. 여자아이는 아동기를 구조화하는 제도인 학교에 가지 않으며, 9~10살에 ‘작은 숙녀’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성인 여성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열살이나 열두 살 정도의 사춘기에 이르자마자 그녀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성에게 시집 보내진다.
이렇게 아동기의 계급적 기초는 드러난다. 소녀들이나 노동계급의 소년들이 옷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들의 성인으로서의 역할이 상층계급의 남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떄문이었다. 소녀들은 성장할 이유가 없었다. 여성과 하층계급의 남성들의 의복 스타일은 계급적 종속과 여성 역할의 열등성과 완전한 연결이 있는 것이었다.
아동 교육제도
아동기가 추상적 개념이라면 근대의 학교는 그것을 현실화한 제도이다. ‘청소년기’라는 개념은 병역에서 징병을 용이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근대의 학교는 아동기로부터 남성기로의 과정에서 사회적 입문의 정상적 도구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통상적인 견혜와는 반대로 근대 학교의 발달은 중세의 전통적인 고전학문이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과학의 발달과도 관계가 없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문학사가들은 학교의 구조에 있어서 인문주의적 전통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진정한 근대 학교의 설계자는 17세기 도덕가이자 교육학자들인 예수회, 오라토리오회, 얀센파의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근대적 아동기의 개념을 적극 발전시켰고, ‘순진무구함’에 대한 신봉자였다. 이들에게 “훈육”은 배움이나 정보의 전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근대 학교교육의 핵심이 되었고, 훈육을 통한 도덕적, 영적 진보를 이루려 했다. 즉 커다란 공동작업에 필요한 내적 도덕과 금욕적 가치의 배움이 강조되었다.
학교는 아동양육을 담당했다. 이렇게 아동들은 어른들과 분리되었고, 성인기로 이행하는데 요구되는 가혹한 입문과정은 아이들의 능력에 대한 멸시와 체계적인 과소 평가가 커져갔다. 현재에 아동들의 ‘조숙함’은 사라졌다. 모차르트의 재능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고전학문과 실용적인 도제훈련을 이론교육으로 대치하면서 학교의 수가 늘어났다. 이 학교들은 배움 그 자체를 전수하기보다는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근대의 학교교육은 성장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지체시키는 것에 가깝다.
아동기의 신화 그리고 여성성의 신화
결국 근대 가족의 발달이란 크고 통합된 사회가 작고 자기중심적인 단위로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런 부부단위에서 아이의 존재는 중요해지는데, 아이는 그것이 유지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아동은 가족 내에서 오래 머물러야하는 존재이자 신과 가까운 순진무구한 ‘아기천사’로서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인정되지 않았다. 아동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학교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갔다. 아동을 대하는 방식은 예속의 방식들로써, 가족 내에서 제도화 되었고, 학교를 통해 억압된 계급의 체계화와 지속을 가능케했다.
파이어스톤이 지적한 것처럼 엥겔스도 가족의 위계질서와 경제적 계급 사이에 강한 연관성이 있다고 말한다.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심리의 유사성도 밝혀졌다.
아동기의 신화는 여성성에 대한 신화와 대응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순수’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열등한 지위는 정교화된 ‘숭배’ 하에 나쁘게 은폐된다. 사람들은 여성과 아동의 앞에서 그들에 대한 욕이나 욕설을 하지 않앗고, 여성과 아이들은 화려하고 비활동적인 옷으로 구분되어 특별한 과제(가사노동과 숙제)가 주어졌다. 그리고 둘 다 정신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여성과 아동 둘 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아동성과 여성성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특수한 복장과 교육, 예절과 같은 문화적 도움을 받은 육체적 차이점은 문화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이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차이점으로 쉽게 과장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계급억압은 ‘귀여운’ 어법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공개적인 억압보다 투쟁하기 어렵다. 남성들은 여성이나 아이가 상냥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해야한다고 느낀다.
여성, 아동, 흑인 또는 노동자가 투덜거리는 것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피억압집단도 그들의 억압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즉 웃는다는 것은 노동자가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한 희생자가 그의 억압을 묵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미소거부(smile boycott)이 필요하다. 실제로 진짜 웃을 일에만 웃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남성들은 그들이 쉽게 느끼는 친밀감이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동이나 여성의 내면의 진정한 인격이 그들에게 귀여움을 받거나 주목받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노동계급과 소수집단의 일원이 ‘아이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여성들이 늘 그래온 것처럼 모든 계급의 아이들은 하층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동기가 확장되고 그 신화가 견고해져가면서 여성의 모성애로의 속박도 확장되어간다. 여기에 아동의 출산과 양육에는 창조성이라는 신화까지 첨가되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기르는 최선의 방법은 그만두는 것이다.
신화의 확장
아이들의 사이비 해방은 여성들의 사이비 해방과 대응한다. 대량 소비주의 사회로 변모한 현대에는 아이들의 육체적 취약성에 기대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산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건강 이상으로 현대의 아동기를 이해하게 하는 핵심단어는 행복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단 한 번의 아동기만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행복의 실체여야만 한다. 행복의 신화를 위한 주요 보호막은 사회로부터의 엄격한 분리이다 이 행위는 아이들을 다른 인종으로 만들어버렸다. 연령에 따른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동기에 대한 행복의 신화는 아동의 욕구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고된 일과 근심걱정으로 자유로운 때를 인생의 노년에 기대할 수 없는 어른들은 그러한 인생의 시기를 이미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동에 대한 억압은 네 가지의 억압으로 구성된다.
첫 째로 육체적, 경제적 의존이다.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해 자연적으로 육체적 열등감을 가지는데 이것은 현대의 문화에서 보상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아이들은 법적 미성년자로서, 시민권도 없으며, 부모의 임의적인 소유물이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더 나쁜 일을 겪을 수 있다. 그 중 경제적 의존이 가장 큰 억압인데 이것이 아이들의 수치심의 기초이다.
두 번쨰 억압으로는 성적 억압이있다. 전형적인 어린이는 순수한 쾌락을 위한 능력은 가졌으나 그 쾌락을 전적으로 만끽할 수 없다. 사회화는 억압이며, 이 과정, ‘현실원칙’의 개입은 곧바로 시작된다. 이들은 양분화된 성역할과 이성애 질서를 주입받으며 성적으로 억압받고, 정상적인 놀이로서의 자위행위도 사춘기 이전까지는 부정당한다. 이들은 사춘기 이전까지는 무성적인 존재로 취급되며, 강요된 무성성은 좌절을 낳는다.
세 번째 억압은 가족의 억압이다. 가족 생활의 미묘한 심리학적 억압은 모두 가지고 있다. 실제로 행복한 가족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도 라이크의 글을 읽으면 그 미묘한 심리적 눈치게임을 인정할 것이다.
네 번째 억압은 교육적 억압이다. 억압이 굳어지는 것은 학교에서이고, 남아있는 자유에의 환상은 재빨리 일소된다. 모든 성적인 활도이나 육체적 노출은 금지되며, 놀이도 감시당한다. 놀이는 이제 사회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뿐이다. 진보적인 선생님이 있어도 감옥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본질상의 감옥일뿐이다. 아이들의 흥미와 학교의 개념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아이들은 놀 재료와 놀 장소, 놀이 친구조차도 선택할 수 없으며, 문화도 선택되어지며, 창으력을 잃는다. 이에 비해 하층계급의 아이들은 놀이 방법이나 성적으로도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계급의 아이들이 더 나쁘게 되는데, 그들은 혼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산계급의 것과 다른 ‘현실원칙’에 직면해 좌절한다. 그들은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은 그들의 상상력부족과 거친 아동기의 문제가 아닌 어른들이 만들어낸 일상적 억압이다. 빈민가 아이들은 상대적으로만 자유로우며, 이들은 의존적이고 경제적 계급으로서 억압된다.
아이들은 좁은 삶에 대한 규제에 직접 비례하는 소망-환상의 부담을 지고 있으며, 매 순간 억압당한다. 경제적, 성적, 일반적인 심리적 억업에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악의적인 정체를 스스로 드러낸다. 이 불쾌한 특성은 아이들을 소외시키고 그것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들의 인격형성에 있어 가장 어려운 시기를 여성에게 양도되는데 여성은 같은 이유에서 이들과 비슷한 인격적 특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은 여성의 책임이 아니며, 아이들과 여성은 같은 종류의 억압을 경험하는 존재들이다. 아이들의 억압을 보며 같은 억압을 느끼는 여성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대 모성애가 탄생한다. 그러나 울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 완전한 인간 조건을 얻기 위한 동맹으로서, 아동기의 해방을 여성의 해방과 함께 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