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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첫 번째 세미나(2017/04/04) 후기 +9
최원 / 2017-04-06 / 조회 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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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첫 번째 세미나를 무사히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세미나라 좀 서먹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전에 철학학교 짓다에서 이미 인연이 닿은 분들이 여럿 있었고, 새로 합류한 분들도 세미나에서 논의되는 주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주어서 좋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의 1장의 첫 절반을 함께 논의했는데, 아즈마가 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의성polysémie과 산종dissémination입니다.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으로서 텍스트의 저변에 있는 어떤 콘텍스트(들)의 풍부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산종은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오히려 기록(에크리튀르)이 그 모든 콘텍스트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풍부함입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작품이 원래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들(콘텍스트들)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파악한다면, 이는 다의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기록이며, 이 기록이 그 후에 오는 다양한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으로써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면, 이는 산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다의성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 안에는 아무리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어떤 한정된 숫자의 다양성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하나하나 이끌어내는 작업은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만일 산종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이라는 기록은 도래할 그 모든 무한수의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끝이 없는 의미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다의성과 달리 산종은 어떤 기록이 콘텍스트를 만나 비틀어지는 현상을 일컫고, 그러므로 언제나 사후적인 방식으로만 생산되는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단수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산종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는 마이클 라이언을 비판합니다. 라이언은 맑스의 ‘물상화’(물신화)를 산종의 억압 또는 소외라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산종 개념을 오해해서 생겨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산종(다양성)이 기원적으로 있고, 그러고 나서 그 다양성이 억압되어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억압될 기원적, 실체적 산종과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산종은, 이 기록이 콘텍스트와 마주치거나 다시 스스로를 그 콘텍스트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세미나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제기 가운데 하나는, 기록(문서)은 오히려 의미의 무한대로의 다양화 또는 산종을 막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혜원 선생님의 문제제기였는데, 예컨대 대한민국의 헌법이라는 문서는 적어도 시민들 사이에 어떤 공통감각과 같은 것을 형성해주는 기준을 만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었지요. 또 다른 예로, 성경책의 경우엔 수없이 많은 언어로 번역이 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동일한 사상을 전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비슷한 의미로 습득하게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종 선생님은 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먼저 있으며 다양한 의미는 그 후에 생산/산종 된다는 논점을 상기시켜 주면서, 이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제 경우에도, 그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이라는 기록이 촛불 시민들의 콘텍스트와 만날 때와 박근혜 지지자들의 콘텍스트와 만날 때 그것은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면, 헌법이라는 기록 자체가 의미를 한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일었습니다. 성경책 역시 다양한 문화권에서 각기 다르게 수용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김혜원 선생님의 또 다른 문제제기는 주체의 부재나 주체로부터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는 기록이 다양성을 만들어낸다고 보기보다는 주체의 현전이야말로 의미를 다양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부르디외를 전공한 심성재 선생님은 이 문제를 피에르 부르디외와 주디스 버틀러의 논쟁에 준거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심선생님에 따르면, 구조의 완고함을 주장하는 부르디외에 대해 버틀러는 데리다의 인용가능성(citationability) 개념, 반복(불)가능성(iterability) 개념을 가져와서 구조가 수행적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의 실천의 예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살던 당시 미국에 운행중이던 버스에는 백인과 흑인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파크스가 하루는 그냥 백인이 앉는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고, 그것이 어떤 큰 변화를 초래했던 사건을 예로 들면서, 버틀러는 '보라, 구조가 변하지 않는가?'라는 비판을 부르디외에게 가했던 거지요. 심선생님은 버틀러가 파크스의 행위를 바로 데리다적 의미에서의 인용가능성, 반복(불)가능성의 실천으로 파악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 대해, 그런 버틀러의 해석이 과연 데리다 자신의 주장에 충실한 것인가 하는 점이 조금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어쨌든 데리다는 수행적인 것을 상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오스틴의 언어행위이론을 그가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또 다른 논의는 ‘흔적’이라는 데리다의 개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희음 선생님은 ‘흔적’이란 선행하는 어떤 것의 흔적이며 일종의 찌꺼기, 잉여, 나머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최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하나의 흔적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2차적인 자리를 갖는 것이 아닐까? 이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제기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즈마의 데리다 해석 자체가 어떤 면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제가 제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연 아즈마가 말하듯이, 기록이 먼저 있고 그것이 사후적으로 다양한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으로써 산종의 효과가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이 콘텍스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마치 콘텍스트들이 텍스트의 바깥에 선재해 있다는 듯이 가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 아즈마 히로키를 충분히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함께 열심히 읽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세미나에는 끝나고 뒤풀이를 하자고 중지를 모았습니다. 세미나가 아주 흥미진진해서 매주 화요일이 기다려질 것 같군요.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후기만으로도 흥미진진함이 충분히 느껴집니다.
저는 '산종'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처음 보았는데, 무척 인상에 남습니다.
다양하면서도 심도깊은 논의들을 선생님이 차분히 정리해주신 덕에 세미나의 열띤 분위기도 아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님의 댓글

최원 댓글의 댓글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좋은 세미나를 열도록 허락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신 우리실험자들 매니져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산종이라는 말은 데리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지만 또한 매우 난해한 개념이기도 해서 잘 살펴보지 못했었는데 이 세미나를 통해 조금은 감을 잡기 시작한 듯하여 저로서도 아주 기쁩니다.

서여진님의 댓글

서여진

모두 흥미롭게 첫 세미나 마치셨을텐데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급하게 마감할 일이 있어 당분간 세미나 참석이 어렵습니다. 3주차 발제까지 맡아 놓은 상태라 최대한 민폐 끼치지 않으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하게 다음 세미나부터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염치없지만 제 발제 부분은 부디 다른 분께서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직접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연락처를 알지 못해 이렇게 글로 남기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혹 6월 이후 여석이 있다면 다시 끼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찬 세미나 되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여진

최원님의 댓글

최원 댓글의 댓글

이것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한 일이 우선이지요. 잘 마무리 하시고, 나중에 다시 좋은 인연 이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서여진 선생님, 6월이면 <데리나의 엽서> 세미나의 다음 책이 시작될 무렵이니, 그때 선생님의 자리 하나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 글을 다음 세미나의 신청 댓글로 간주해도 될 것 같아서요. 반장님과도 이야기해 봐야겠지만.)

namu님의 댓글

namu

"'산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단수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산종되는 것이다.", "억압될 기원적, 실체적 산종과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구절을 통해 '산종'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박태선)

최원님의 댓글

최원 댓글의 댓글

앞으로 세미나가 이어지면서 서로의 인식을 확장할 수 있게 되길 바래봅니다.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우리실험자들에 적을 둔 분들 중 세미나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이 후기를 읽고, 다의성과 산종에 대한 설명이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그 개념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리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후기 올려주시고 또 세심하고 친절한 발제로 길 밝혀주신 반장님께 너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물론 그 때문에 반장님이 좀 밉기도 합니다. 2주차 당번인 저에게 보다 무겁게 얹혀버리고야 만 부담 때문에 말입니다.^^

최원님의 댓글

최원 댓글의 댓글

희음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첫 세미나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후기를 우리 실험자들에 계신 많은 분들이 좋게 읽어주신 듯하여 참 기쁩니다. 희음 선생님의 역량이면 2주차 당번으로서 저보다 더 훌륭한 모습 충분히 보여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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