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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주체의 해석학> 0407후기 +4
유택 / 2017-04-08 / 조회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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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0407 후기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저에겐, 저 하늘에, 나와 상관없이 멀리 둥둥 떠 있는 구름들을 잠자리채로 조각조각 낚아채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작년 <에티카> 수업 들으면서 받았던 지독히도   관념적이었던 그 느낌 그대로... 그래요. ‘관념적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겠어요. 그렇지만 또 거기에서 저와 접속되는 지점이 있으리라 믿고 갑니다. 항상 전 뒷북이니까요. 오늘 세미나에서 기억에 남는 것 위주로 중구난방으로 정리를 해볼게요. (이 후기 그나마 써놔야 다가오는 맑스 강의 대비 책읽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기에 ㅠ.ㅠ 정말 제겐 과욕의 1학기인듯 해요 ㅎ)

 

기원후 1,2세기 자기배려의 황금기 때 무수히 등장했던 수많은 학파들. 그것은 어찌 보면 지금 우리들이 관심 있어 하는 공동체들 같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 배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창기 수유너머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분파로 갈렸던 것처럼, 고대에도 그러한 공동체들의 이합집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보면 에피쿠로스든 스토아든 견유주의든 다 자기배려/자기실천을 주장하며 자기를 돌보는 것으로 엇비슷해 보일 뿐인데.. 자기네들끼리는 다르다는 것. 더 공부해야겠네요. 어떻게 다른지. 뒤에 자세히 나온다고 하니 일단 넘어갑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는 도시국가 통치가 그 목적이었습니다. 자기 인식으로 시작하여 자기 배려를 통해 결국 자기 통치를 그리고 타인에 대한 통치를 그럼으로써 그 목적지인 도시국가 통치로 연결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1,2세기 자기배려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것으로 바뀝니다. 도시국가나 뭐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배려가 중요했던 이유는 <알키비아데스>에서 처럼 훌륭한 통치자가 되야 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개인 생활의 차원에서 일반화이지요. 너 자신을 돌보아라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보편적인 소명으로써 자기배려가 말하여집니다.(보편화)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 은 아닙니다. 법의 더 상위에 있습니다. 즉 자기에 대한 주체의 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의 역사에서 자기배려의 실천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푸코는 그럽니다. 그것은 곧 여러 학파들의 여러 표현들(자기로 돌아가기/자기를 점검하기/자기로 후퇴하기/자신의 주인이 되기/자족하기 등등등등~)로 말해지는 낱낱의 에피소드들이나 일시적 형식들이었습니다. 법은 말하자면 자기와 관련한 주체의 테크놀로지의 가능한 한 양태일 뿐입니다. 하위인거죠.

 

고대 그리스에서 방점을 찍었던 시기는 청년기인데 그것이 이제는 장년기로/노년기로 시간상 이동을 합니다. 그 결과로 1)자기 실천의 비판적 기능으로(교육적 역할도 물론 여전히 있지만 이제는 교정-자유 쪽으로..!), 2)의학과 자기실천의 근접으로, 3)노년의 중요성과 가치가 등장합니다. 너무 노년 예찬이 나와서 좀 웃겼습니다. 좀 오바스러워서. 늙음과 죽음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적 현상인데 또 거기에다 대고 의미 부여하고 가치 부여하고.. 어제 본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나온 우주 화면을 보다가 든 생각인데요. 우주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고 그러고, 거기에 인간들이 점처럼 지구라는 별에 붙어서(지구표면의 피부병이라고 했던가요?) 이렁쿵 저러쿵(이데올로기가 있고 제도를 만들고 차별을 하고 옳고 그른게 있다고 강변하고 따따부따 등등등) 하는게 좀 우습기도 하고 다 이것이 뭐하는 짓들인가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ㅎㅎ 휴거 이야기가 나오고, 죽기 전에 생을 완성하고 싶다라는 말도 나왔고, 그래서 책 각주에 나왔던 망각이 중요해집니다. 우리에게 덧 씌어진 이 오류들(내가 그토록 믿었던 교육 제도 사상 윤리 도덕 등)을 걷어낸 이후에야 훌륭한 영혼이 오는 것이랍니다. 이미 생은 훌륭히 완성되어 각자에게 주어졌지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덧씌워진 오류들을 망치와 끌로 깎아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을 작품으로 대하자. 그것이 서문에서 말했던 푸코의 실존 미학이었고요.

 

자기 배려는 이제 자기의 역량에 달린 것으로 바뀝니다. 보편적인 호소를 했으나(‘너 자신을 돌보아라 그것이 전부다’) 개개인의 역량(인내심 용기 등등)에 따라 자기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입니다. 이 아이러니! 호소의 보편성과 선택의 희귀성. 많은 사람들이 쉽게 통과하지 못하도록 왜 이렇게 이//한 장치를 걸어둔걸까요? 이 이중 분절의 구조적 원리. 기독교를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자기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이미 주었지만 그것을 알아 차리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만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그리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테마. 자기배려/자기수련/금욕 뭐 이런 것들이 더 시기가 지나서 기독교 시대에 이르면, 그것들이 기독교에 차용 되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헬레니즘 시대와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욱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어떻게 변해가는지 푸코가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체/진실 뭐 그런 것과 연결 지어서 생각해야겠지요? 아직은 잘 안 잡히고 때이른 것 같고요. 여튼 대단한 의욕으로 시작한 <주체의 해석학>인데 살짝 수렁에 빠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맥락이 손아귀에 꽉 잡히는 느낌이 없고 스르륵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네요. ㅎㅎ 욕심이 과한가요? 노동자가 합목적적 노동(자기 소외의 노동/감독관리하에 억지로 일하기)에서 벗어나 그냥 인간가축/인간동물이 되었을 때(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행복한 거 아닌가 하는 맑스 강의때 내용이 생각납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의 이 긴 역사적 연구. 이거 은근 사람 스트레스 주네요. 허나 푸코 세미나 그만두지는 못합니다. 왜냐? 제가 푸코를 통과해서 만들어야 하는 진실이 있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거대하게 엮어진 음모를 뚫고 환하게 밝혀질 그 진실를 향하여! (좀 제발 그런거 없다고 푸코가 누누히 이야기 했는데 왜 나 갑자기 또 이러시나…) ^^; 이상입니다. 총총~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숙제처럼 후기를 정리해주는 성실한 세미나원이 있어 행복합니다. ㅎㅎ
이번에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주체의 문제와 함께 공동체의 방식 또는 역할에 주목하게 됩니다.
에피쿠로스, 스토아, 견유학파 등의 여러 학파와 철학공동체가 생겨나는 배경에는 그리스의 몰락과 로마제국의 수립이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신분이 높은 개인들이 당연히 도시국가의 통치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면,
로마제국에서는 황제나 몇몇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통치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정치적으로 통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국가의 통치와는 관련이 없는 자신에 대한 배려, 자신의 구원 문제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국가와는 관련없는, 어쩌면 국가의 질서인 신분체계 등에 대항하는 공동체 안에서 자기 배려를 추구하게 됩니다.
호소의 보편성과 구원의 희귀성은 장치로 걸어두었다기보다,
호소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구원은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현실을 지적한 거 같아요.
자기 배려는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면이 있지요.
기독교에서 이 구원의 개념을 차용해갈 때, 그것이 호소의 보편성과 구원의 희귀성으로 정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유택님이 진실보다 엮어가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길 바라며!
뭐, 이미 많이 그러고 계시겠지만. ㅎㅎ

유택님의 댓글

유택 댓글의 댓글

반장 없으면 어찌 이 책의 맥락을 잡을 수 있을까 싶어요. 감사해요.
어서 빨리 이 책 끝내고 <진실의 용기>도 읽고 싶네요.
아참 그리고 4월28일(금) 세미나 혹시 좀 시간 땡겨서 할 수 있나요?
그날 저녁8시부터 근무라.. 스케줄 조정을 할 수가 없네요.
세미나는  빠지기 싫고.. 혹시 2시나 3시나 4시에 그날만 특별히 세미나 좀 땡겨서 하면 고맙겠는데
불가 하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럼~

뉴미님의 댓글

뉴미

공동체의 방식, 공동체를 주체로 놓고, 주체를 공동체로 놓고 다시 보게 되네요~
오늘은 강의록 한주 분량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녹음을 했습니다. (분량이 거의 두 시간 정도 되더라구요)
오며가며 점심시간에든 쉬는시간에든 짬날때마다 들어보려고 합니다.
주말이 아니고서야, 평일에는 책을 펼쳤다가도 금새 놓아버리게 되는, 책에 집중할 수 없는 요즘이에요
꽤나 좋은 방법이쥬~?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유택님의 댓글

유택 댓글의 댓글

녹음을 해서 듣는다고요? @.@;;;
정말 놀라운 열정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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