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제1장 후반부 발제
희음
/ 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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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령에 사로잡힌 철학(후반부)
코라란 무엇인가
- 장소, 용기, 모판, 국가 등을 의미하는, 에크리튀르의 수용체적 특징, 근원적인 처녀성을 명명하기 위한 것. 하나의 에크리튀르가 복수의 콘텍스트에 동시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용기(코라)에 복수의 콘텍스트가 동시에 의미를 부어넣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소쉬르적 차이세계(다의성의 세계)는 풍선의 비유로써 설명되기도 했다. 무수한 풍선(기호들의 다발)가 집어넣어진 하나의 상자(체계)라고. 이 세계에서는 풍선 자체의 실체란 없다. 즉 어떤 기호의 가치, 즉 풍선의 형태나 크기가 인접한 풍선이 가하는 압력에 의해 부정적,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 그런데 어떤 기호(풍선)가 자의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에서 ‘같은 것’의 운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상자 안에서 어떤 풍선이 점하는 일정한 장소(형태와 크기)에 하나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고 볼 때, 주어진 이름이 원래 지시하고 있던 풍선(동일성)과 그 장소(같은 것)가 절단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풍선의 형태와 크기가 변화된 다음에도 이름만이 같은 장소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장소는 풍선이 변화한 후에도 용기로서 잔존하고, 또 다른 풍선에 의해 점유될 수 있다. 코라로서의 과잉(산종)은 철저하게 공허한 에너지 제로의 과잉이다.
- ‘코라’라는 말은 그 자체가 무수히 다른 해석과 텍스트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그 배후에 대해 확실한 동일성을 결정하지는 못하는 것. ‘코라’는 그런 불가능성 자체, 즉 하나의 말에 복수의 해석자가 다른 의미를 주입하는, 개념의 바로 그 용기성을 가리킨다. 모든 개념은 여러 번 다른 콘텍스트에서 사용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코라이다. 코라로서의 개념은 복수의 콘텍스트 안을 운동하며 각기 다른 해석을 받아들인다.
데리다의 ‘탈구축’
- 에드워드 사이드는 데리다가 탈구축의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들을 문제시했다. 형이상학을 탈구축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럽 철학이나 문학의 중추로 여겨지던 헤겔, 니체, 하이데거, 루소, 말라르메, 주네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중심주의’의 되풀이에 대해.
- 지젝은 그의 탈구축적 방법의 미흡함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스탈린주의의 ‘처럼’의 심급을 예로 들면서. 즉,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탈구축했다고 할 때, 이의 결과로 우리는 니체의 텍스트에 진리가 씌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텍스트가 독해대상으로 선택되고 그에 관한 논문들이 양산된다면, 이 상황은 모두가 니체의 진리를 믿고 있는 것‘처럼’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처럼’이 형이상학을 지탱해가는 힘으로 작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 데리다는 현상학에 존재하는 유럽 중심주의, 혹은 민족중심주의는 소위 문화상대주의에 의해서는 극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설의 다음 말을 반박한다. 유럽이라는 한 지방(특수성)을 넘어선 보편성에 대해. 그리고 그 보편성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따라서 그것은 유럽이라는 고유명 없이는 이야기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즉 유럽이라는 고유성의 보편성에 대해.
- 데리다의 입장은 이렇다. 문화의 고유성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지 않다. 유럽의 고유성은 있으나 동일성은 없다. “하나의 문화는 결코 단 하나의 유일한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고, 문화의 역사에서 단일한 계보학은 항상 기만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비동일적인 고유성에 주목하며 “유럽이 아닌 것, 유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유럽이 결코 아닐 것으로 유럽을 여는” 방법을 주문하기에 이른다. 또한 가능세계의 현실성은 ‘같은 것’의 운동에서 소행함으로써만 생각할 수 있기에, 데리다는 우선 ‘유럽’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 다시금 ‘코라’로써 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겠다. 코라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자유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전미래의 ‘일지도 모르는’이라는 성분을 도려내는, 계열과 규범을 발견하고 구축하는, 직선적 시간성의 경향에 저항한다. 데리다의 텍스트 독해는 개념의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념이 특정 의미를 갖는 바로 그 순간에 ‘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항상 끼워 넣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전적 역사의 외부(초월론적 역사, 텍스트의 바깥)에서 ‘있을지 모르는’ 것 쪽으로!
- 아우슈비츠를 보는 리오타르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눈: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이라고 그는 말하면서, 그것은 늘 아우슈비츠 이후(apres)에 대한 물음이라고 했다. ‘쟁이는 하나의 잘못에서 생겨나고 침묵에 의해 신호가 보내진다. 그 침묵은 많은 문장이 그 사건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이란 그 고통을 말한다.’고 하면서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은 아우슈비츠라는 고유명의 절대성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한다. 바로 여기에서 데리다와의 갈라짐이 생겨난다. 즉 데리다 또한 기억불가능한 것의 기억을 다루지만, 그것은 고유명이 절대성이 아닌, 오히려 그 절대성을 확산시키는(시킬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리오타르의 고유명: 오카자키에 의해 불려나오는 볼탕스키의 작품 또한 고유명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은 ‘타자와의 교환도 불가능하고 일반화도 불가능한, 완전 혼자만의 고독한 경험이나 감정’을 현재화한다. 그러나 그 고독함은 ‘다른 고독과 강하게 결합되어 복수의 고독이 서로 연대’하게 하고, 그것은 다시 고독으로 묶인 역설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카자키는 그것을 ‘센티멘털 장치’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런 작업, 즉 특정한 공동체(이를 테면 역사수정주의자)로부터의 해석을 피하기 위한 논의가 ‘아우슈비츠’라는 외상을 절대화한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위상의 폐쇄적 공동체를 낳는 셈이 된다. 한편, 리오타르와 볼탕스키에 의한 애도작업은 고유명을 절대화함으로써 다음의 무서움을 회피하고 있다. 그 무서움은 바로, 한스가 살해당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스든 누구든 상관이 없고, 오히려 한스가 살해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비극에 있다.
- 데리다는 파울첼란론 <쉽볼렛>에서, 날짜와 장소가 부가된 일련의 시를 제시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세계에서 일 회뿐인, 결코 재래하지 않는 것, 그것 자체의 망령적 재래라는 것이 있다. 날짜는 망령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회귀의 이 재래는 날짜 속에 기재되고, 코드에 의해 보증된 기념일이라는 원 속에 봉인됨으로써 특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달력에 의해.’ 그가 쓰는 ‘망령’ 혹은 ‘유령’의 기억은 리오타르의 감정과는 다르고, 외상의 일회성이 아니라 그 반복가능성과 관계한다. 사건의 일회성은 특정 날짜에 의해 지정될 수밖에 없지만, 날짜 그 자체는 반복가능성(달력)에 의존하고 있다. ‘서명’의 순수성이 동시에 그 불순성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회적인 ‘사건’ 또한 날짜의 구조 그 자체에 의해 그 일회성을 위협하는 반복가능성, 즉 복수성(망령적 재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리오타르의 논의는, 일회성이 파악할 수 있는 사후적 구조(기념일의 돌아옴)을 무시하고 그것을 ‘일찍이 있었던 것’으로서 실체화한다. 그의 ‘감정’이 산종을 다의성으로 실체화해 버리는 것이다.
- 유령적 재래: 어떤 날짜에 파울 첼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날짜(같은 것)는 재래한다. 그것에 의해 그 날짜에 도래할, 일어날지도 모르는 개방성을, 동일하지는 않지만 같은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적 재래이다. 유령의 기억은 항상 눈앞에서 에크리튀르라는 형태로 세계에 달라붙어 있다.
유령의 목소리
-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쓰는 것의 위험성을 강조하는데, 그런 강조는 바로 플라톤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쓰는 것(에크리튀르)을 미아의, 또는 부친살해의 아들로서 고발하고 있으면서, 플라톤은 그 고발을 쓰는 아들로서 행동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상하고 확증한다.” 중요한 건 역설의 장소이다.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에서 역설을 발견한다. ‘쓰지 않는 사람’의 단독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씌어져버린 것, 즉 고유명이 반복가능한 것(에크리튀르)으로 간주되는 과정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논문 제목인 <파르마케이아>의 어원인 ‘파르마콘’은 독이자 약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임과 동시에 살렸음을. 이 과정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이 세계에 새겨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단독성은 그의 목소리가 소멸하고 에크리튀르로써 등록된 후에야 드러나게 되었다.
-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통해 ‘유령’을 본다. 그의 다이몬(daimon, daimonion)을 유령의 목소리로 파악하는 것. <우편엽서>에서 말하듯. ‘악마는 자신의 등장을 반복하고 있는 재래이고, 그것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재래하여,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계승되고 회귀라는 단순한 형식을 통해 인간을 괴롭히며 이제 모든 표면적 욕망으로부터 독립해가면서 끊임없이 반복적이고 자동적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데몬처럼-데몬은 모든 사람에게 쓰도록 하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간주되고 있는 사람에게서 시작하면서-, 이 자동인형은 누구에게도 재래하지 않고 기원도 발신도 발신자도 없는 복화술이라는 효과들을 낳는다. 그것은 그저 우체통에 넣어져 있을 뿐이다, ’순수‘상태의 우편, 목적지 없는 배달부와 같은 것.’
- 데리다 자신의 이야기: 그는 1991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불가능한 것, 나도 아마 그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그런 것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 ’나‘가 저항의 형식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이 고해질 때마다, 하나의 귀속관계가 나를 국한시킬 때마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외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라, 함정이다, 빠져 있구나, 떼어놓아라, 몸을 떼어 놓아라. 네가 몸을 들이밀 장소는 다른 곳에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동일성이 결정된 순간의, 우연성과 복수성의 기억이다. 하나의 문화나 언어 속에 있는 것, 즉 동일성이 동일성으로 주어지는 것, 그 순간에는 이미 유령(에크리튀르)이 침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데리다가 되어 있는 그 우연성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우편엽서>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다양한 사건을 무수한 고유명(인명, 지명, 날짜)과 함께 기록해 간다.(누군가에 의해 기록되어 간다.) 그럼에도 그 개인적 기억은 바로 단독성을 박탈당하여 유령성에 의해 익명적인 이론적 고찰과 단락되어 버린다. 같은 책의 서두에서 그는 ‘자크 데리다’라는 고유명의 복수성 또한 드러내고 있다. ‘데리다의 이름 하에서 ’이 나‘가 기록한다’고. ‘데리다’와 ‘이 나’ 사이의 거리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