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403 《성의 변증법》 1주차 1&2장 세미나 후기
소리
/ 2017-04-12
/ 조회 1,112
관련링크
본문
후기 업로드가 조금 늦었습니다. 써놓고 요즘 정신이 없어서 업로드가 늦었네요.
다음부터는 한 주가 넘어가지 않도록 더 신경쓰겠습니다.
--------------------------------------------------------------------------------------------------------
[페미니즘] 《성의 변증법》1주차 <1장 성의 변증법 ~ 2강 미국의 페미니즘> 후기
첫 페미니즘 세미나는 무척이나 열정적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는 부분들과 동의하지 못하겠는 부분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얘기를 하다 보니 각자의 과거의 경험들에 대해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파이어스톤은 맑스와 엥겔스의 경제적 계급 분석 방법을 성적 계급 분석에 적용합니다. 성적 계급은 경제적 계급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지만, 평등하다고 교육받고 자랍니다. 여성 스스로도 그것을 믿고 자랍니다. 그 믿음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여성이 최초로 자신이 하녀의 지위로 전락함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결혼’의 순간입니다. 남성과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여성은 자신이 평등한 존재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엄청난 투쟁과 거부와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을, 어린 시절부터 체감하던 그 차별의 눈빛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별의 근거가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결점과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여성이라는 ‘나의 존재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부당한 것임을 깨달을 때의 좌절과 비탄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그것도 온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는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고, 때로는 남성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상황을 부정합니다. 그런 여성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습니다. 잘한 것도 없습니다만, 그런 그녀들을 만든 것도 가부장적 사회질서, 즉 남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들’ 조차도 부정 할 수 없는 순간이 결혼 이후의 순간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동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의 노동이라고 분류되는 출산, 돌봄, 감정 노동의 무임금/ 저임금화 문제는 같은 맥락에서 해석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대리자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의 교사들의 폭력문제에 열분을 토합니다. 그 교사들은 주로 여성들입니다. 이 돌봄 노동을 행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만큼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들은 여성의 노동을 하는 대리자이며, 동시에 노동자이지만, 기본적인 휴식과 급여조차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이중 잣대가 작용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어머니'의 노동을 대신하는 대리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어머니들이 그래야하듯, 이상적인 '어머니 상'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정해두고 돌봄 노동을 행하는 교사들에게도 강요합니다. 이들은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사생활에서도 간섭과 감시를 받습니다. 사생활의 부분은 업무 외적인 측면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들에게 도덕적으로 소위 '올바른' 자질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여성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돌봄과 감정 노동에 대한 무평가와 저평가의 관습은 전세계적인 현상이고, 이것을 철폐하기 위한 움직임도 세계적 현상입니다. 끊임없는 경쟁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생물학적, 노동적, 경제적 착취를 통해 사회를, 국가 전체를 지탱하는 얕은 기반의 그러나 뿌리깊은 젠더계급의 역사를 파이어스톤의 얘기를 따라가며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권운동이 활발했던 1960년 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1960년대 민간에서부터 시작된 운동이 여성운동이지만, 이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이 당시의 여성운동은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했습니다.
젠더 계급의 철폐를 목표로 진행되던 거대한 해방-독립의 운동은 투표권 획득이라는 단기적 목표가 전부인 것처럼 축소되었습니다. 그 결과 투표권의 획득과 함께 해방-독립의 거대한 에너지는 갈 곳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인권에 대한 여성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거대한 에너지는 흑인 인권운동, 환경운동, 성소수자 운동 등등의 다양한 진보 운동으로 포섭되었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여성운동 자체의 활동력은 저해되었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보다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았고, 여성 인권을 저해하는 진보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운동의 본질적인 목표를 잘 알고 있었고, 투표권을 줌으로써 그 운동에 항복하듯 보였지만 두 보 전진을 위한 한 보의 후퇴와도 같은 전술이었습니다.(참고로 여성의 투표권은 흑인의 투표권보다 나중에 이뤄집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혹은 진보진영에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모습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소위 진보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하는 한국의 정당들, 그리고 많은 단체들은 여성문제를 자신의 당의 진보성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여주기 식으로 여성문제를 다룹니다. 그 결과 여성문제의 본질적 해결방안인 젠더 계급 철폐가 아닌 시혜적인 호의 배풀기 식의 방안만을 내놓습니다.
진보진영에서 여성의 문제는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고, 항상 뒤 켠에 있는, 투표 때 여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시혜적 입장에서 주는 무엇으로 다뤄집니다. 그리고 진보라는 가치는 젠더 계급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진보라는 가치는 '남성들의 진보'의 가치를 표방하고 있으며, 여성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해일 앞에서 조개를 줍는"다는 진보 남성의 말은 이 맥락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입니다. 남성적 질서 하의 진보 진영에서 '대의'에는 여성문제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젠더문제를 다루는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서도 여성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할 말이 많았고, 여성이라는 성과 젠더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자신의 얘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얘기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굉장히 혁명적이고 힘있는 글빨의 파이어스톤의 앞으로의 논의와 그것을 토대로 나아갈 세미나의 내용도 무척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