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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주체의 해석학 0414 _ 4강 발제 +4
아라차 / 2017-04-13 / 조회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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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4강 1982년 1월 27일 강의 발제 _ 아라차

1,2세기 자기배려 실천의 일반적 특성에 대한 환기

자기실천은 이제 교육자의 교육과 장년 생활 간의 분기점이 아닌 생애 전체, 실존 전반을 가로지르는 요청이 되었다. 훈육보다는 교정이 더 중요해졌고 의학과 더 밀접한 관계가 도출되었다. 따라서 자기실천의 목표는 노년의 준비이고, 노년은 실존의 특권적 순간이 되어 주체가 되기 위해 늙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등장했다. 자기실천은 신분과 같은 선천적 조건이나 기술적․직업적․사회적 목적이 전혀 없이 만인에 적용되고 만인에 의해 실천가능한 규칙으로 제시된다. 정치를 하기 위해 혹은 타인을 통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는 관념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인과 관계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가질 능력을 갖춘 사람은 소수였다. 이는 폐쇄적 집단에의 귀속, 경제․사회적 형태의 격리로 나타났다. 자기실천의 목적은 자기다. 이 목표는 생의 궁극적 목표지만 동시에 희귀한 실존의 형식이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역사를 관통하는 대범주를 발견한다. 이 구원과 관련하여 고대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사유가 어떤 내용을 부여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구원의 형식과 거기에 부여해야 할 내용간의 매개자인 타자의 문제, 타자와의 관계의 문제라는 선행적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자기실천이 규정하는 형식이 실제적으로 그 대상인 자기에 도달하고, 또 자기로 채우기 위해 타자는 꼭 필요하다.

 

타자의 문제: 플라톤 대화에서 세 유형의 숙달

타자의 문제를 분석해 보기 위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대화를 보자. 여기에 세 종류의 타자와의 관계가 젊은이의 교육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한다. 첫째 모범의 숙달. 모범은 영웅․민담․서사시를 통해 알아야 할 위인들이나 유명한 연장자들, 도시국가에서 명성을 떨치는 노인들의 현존을 통해 습득한다. 둘째 유형의 숙달은 수행능력의 숙달, 어린 자들에게 지식․원칙․소질․수완을 전승시킬 수 있는 능력의 숙달이다. 셋째 유형의 숙달은 소크라테스처럼 대화를 통해 곤경과 발견의 달련이다. 이 세 종류의 숙달은 각기 무지와 기억의 놀이에 기초하고 있다. 무지로부터 앎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기억이고, 무지는 알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결과적으로 지식이 무지 자체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임무였다. 소크라테스의 실존 및 그의 질문의 필요성은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타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헬레니즘․로마 시대: 주체화의 숙달

타자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무지의 사실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타자의 필요성은 주체는 본질적으로 모른다기보다는 교육을 잘못 받고 왜곡되어 있으며 악습에 젖어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무지를 대체할 지식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도덕적으로 곧은 행위와 유효한 주체를 특징짓는 합리적인 의지적 관계를 자연과 맺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개인은 생활의 어떤 순간에도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주체의 위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무지를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비주체를 자기와의 충만한 관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의 위상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신을 주체로 구축해야 하며, 바로 여기에 타자가 개입해야 한다. 스승은 타자가 모르고 있는 바를 그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스승은 개인의 개혁과 개인이 주체로서 자신을 구축하는 일을 지도하는 자이다. “나쁜 습관들을 버리고, 개인의 존재 방식을 변형시키며, 스스로를 교정할 필요가 있을 때 더욱 더 스승이 필요하다.”(무소니우스의 저작들 중)

 

세네카의 stultitia 분석

세네카의 저서에서 stultitia는 사유의 동요, 우유부단을 의미한다. 스스로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도와주어야 한다. stultitia는 스토아철학의 일반적 논거다. 자기를 아직 배려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stultitia의 상태에 있다. 따라서 자기실천은 stultitia와 관련되고 그 목적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stultitia의 상태에 있는 자인 stultus는 자기배려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정신 속에 외부 세계가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이 들어오도록 방치하는 자이다. 표상들을 검증 없이 분석할 줄 모른 채 받아들인다. 그 표상들의 내용과 주체적인 요소들의 구분, 즉 discriminatio를 못하게 된다. stultus는 생을 흐르도록 방치하고 끊임없이 견해를 바꾼다. 그의 생과 실존은 기억이나 의지없이 흐른다. stultus는 자기의 노년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며, 노년의 자기완성에 집중되어야 하는 생의 시간성을 생각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끊임없이 생활 방식을 바꾼다. stultus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은 의지이다. 꾸준히 욕망하지 않는 의지. 자유롭게 욕망한다는 것은 욕망하는 바가 어떤 사건이나 어떤 표상, 어떤 성향에 의해 결정됨이 없이 욕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한정 없이 욕망하는 것이다. stultus는 외부에서 오는 것에 의해 결정됨과 동시에 내부에서 오는 것에 의해 한정된다. 품위있게 욕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욕망하는 것이다. stultus는 동시에 여러 가지 것들을 욕망하며 이것들은 서로 모순적이지 않고도 상충된다. 그는 하나만을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후회한다. 영광을 갈망하지만 평온하고 관능적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stultus는 욕망하지만 무기력 속에서 욕망하며 게으름 속에서 욕망하고 그의 의지는 부단히 끊기고 목표를 바꾼다. 자유로이 욕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욕망하는 것이고, 항상 욕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고 절대적이며 항구적인 의지의 대상은 무엇일까. 의지가 다른 것에 개의치 않고 절대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백히 자기이다. stultus는 본질적으로 욕망하지 않는 자이고, 자기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 자이며, 의지가 자기라는 유일한 대상을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항구적으로 원하지 않는 자이다. stultitia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스스로가 자기를 욕망하도록 하는 것, 자기를 자유롭고,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주체화의 스승인 철학자상

stultitia에서 벗어나기는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stultus한 개인과 sapiens한 개인 사이에는 타자가 필요하다. 자기배려는 타자의 현전․삽입․개입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타자는 기억의 스승, 교육자가 아니다. 자신을 주체로 구축하는 데 필요한 타자의 행위는 무엇일까. 단순한 교육과는 다르고 또 교육이상의 것인 이 ‘끌어내기’는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등장하는 매개자, 주체가 자기와의 관계구축에 등장하는 이 행위자. 개인이 자기에 도달할 수 있게, 자기에게 지고성을 행사할 수 있게, 이 관계 내에서 충만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자, 바로 철학자다. 이 점은 모든 철학 사조에서 발견된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자만이 타인을 지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스토아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철학자들 주변에서 사람들은 적절한 행위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철학자에게 자기를 이끌어 가는 방법을 물어야 하며, 자기를 이끌어 가는 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철학자는 사람들을 통치하는 자들을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자로서 등장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제도적 형식: 에피쿠로스 학원과 스토아주의 모임

그렇다면 철학자와 철학은 자기 자신의 현존과 개인의 자기 실천의 구축․전개․조직을 어떻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철학은 도구로서 무엇을 제시하나.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헬레니즘적 유형과 로마적 유형이다. 헬레니즘 형식은 학파이다. 학파는 개인들의 공동체적 삶을 전제하면서 폐쇄적 특성을 가진다. 피타고라스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다. 이 두 학파에서 영적 지도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극히 복잡하고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해 조직되었으며 일련의 개인들이 존재했고, 그 중 제일인자는 현자였으며 유일한 현자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의식지도 실천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 자신의 지도를 담당하는 인도자․지도자가 꼭 필요했다. 둘째 이 지도 관계는 강도 있는 애착관계, 즉 우정 관계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지도는 parrhêsia로 명명된 ‘말하는 방식’, ‘말의 윤리’를 전제하고 있다. Parrhêsia는 마음 열기이고 두 파트너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전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이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는 우정과 더불어 지도의 중요한 윤리적 원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있어 의식지도 실천이 다소 폐쇄되고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단체의 실존과 덜 연관되어 있다. 특히 우정의 요청은 덜 명확해 보인다. 에픽테토스의 텍스트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에픽테토스의 학원은 진정한 공동생활의 장소가 아니라 아주 빈번하고 엄격한 회동의 장소였던 것 같다. 일종의 기숙사 형식으로 제자들은 하루 온종일 도시의 일정한 장소에 머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일상생활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제자들은 사회생활에 입문하기 전에 연수하러 오는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정규 제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학교에서 교육과 교양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학자가 되기 위해 온 제자들이다. 철학에 헌신하려는 한 제자에게 에픽테토스는 견유주의적인 삶의 초상을 설파한다. 이 초상에서 견유주의적 삶은 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와 동시에 이 초상은 그 어려움과 필연적인 금욕주의를 보여준다.

에픽테토스의 학교를 철학자들을 위한 일종의 사범대학교로 소개하는 언급도 있다. 에픽테토스는 약간 변형된 소크라테스의 논지를 다시 언급한다. 즉 사람이 악을 행하면 그것은 추론의 오류, 지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 사람이 악을 범할 때는 거기에는 makhê, 즉 전투/싸움이 있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악을 행하는 자도 모든 사람과 같이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실은 실리와는 거리가 멀고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가 진실되지 않은 것을 진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pikra anagkê 씁쓸한 필연성, 즉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바를 포기해야 한다는 씁쓸한 필연성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이 필연성을 실수를 범하고 착각에 빠져 있는 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이 싸움 makhê, 의지없이 행하는 바와 원하지만은 행하지 않는 바 간의 싸움 속에서 타자에게, 자신이 지도하는 자에게 이 투쟁이 무엇인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자를 에픽테토스는 deinos logô(담론의 기술에 강하고 능숙한 자)라고 불렀다. Protreptikos와 elegktikos이다. Protreptikos는 정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교육을 행할 수 있는 자이다. Elegktikos는 오류에서 진실을 끌어내서 오류를 논박하여 참된 명제로 바꾸게 해주는 토론 기술, 지적인 토론에 능한 자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영혼은 자신이 깨닫는 진리에 따라 기운다. 이렇게 타자의 정신 속에서 전개되는 싸움을 조정할 수 있고, 충분한 담론기술로 타자가 믿는 진실을 논박하며 정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행위의 능력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진정한 철학자이다. 반대로 타자를 올바로 지도하지 못한 경우, 자신이 지도하는 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힐책해야지, 자신이 설득시키지 못한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거나 지배할 수 없는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사물들에 대해 자신이 갖는 표상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업의 자문을 구하는 자에게는 질문의 관점을 바꾸어 인생, 실존의 선택, 표상들과 관련된 질문으로 변형시킨다. 순전히 철학적인 비판들도 있었지만 이런 모든 질문들의 목적은 철학연수를 위해 학원에 올 것을 권유하는 것으로 통한다.

 

로마의 제도적 형식: 실존에 대한 사적인 조언자

로마 형식은 사적인 고문의 형식이다. 서로 사회적 위상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두 개인 간에 불균형한 서비스의 교환을 함축하는 준계약적 의존관계를 의미한다. 학원에는 철학자가 있고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서 간곡히 그에게 청원한다. 반대로 사적인 고문 방식에서는 거대한 귀족 가문이 있고, 가장이 있고, 중요한 정치 책임자가 있고, 그들이 자기 집에 철학자의 방문을 받거나 그를 자기 집에 거주하게 하며 그를 고문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트라제아파에투스는 제자들 무리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고문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이 고문의 역할은 스승의 역할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의 역할도 아니다. 이 고문은 또한 한 클럽을 위한 문화적 동인이다. 그는 클럽에 이론적 지식들과 실존의 실천적 도식들을 소개하고, 또 정치적 선택을 소개한다. 특히 제정 초기에 군주제 형태의 전제주의와 개화되고 완화된 군주제, 공화정의 주장 등과 같은 중대한 선택을 도입했다. 이 모든 것들은 고문 역할을 맡은 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토론의 중대한 대상들 가운데 하나였고, 또 그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대분쟁․처형․반란들과 연루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한 고문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자기실천에서 타자에 대한 의존은 더욱 필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철학의 필요성이 주장되면 될수록 순수 철학적 기능은 더욱 약화되고, 또 더욱 철학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할 수 있었던 보편적 모델들이 아니라 신중에 대한 조언, 상황적 조언을 하는 실존의 고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즉 의식지도 실천은 철학자들의 직업의 장을 넘어서 개인들간의 사회적 관계 형식으로 변해갔다.

 

기원 후 1,2세기의 직업 철학자와 그의 정치적 선택

자기배려가 명령․규칙이었고 또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적 제도와 더불어 특권화된 관계를 갖는 행위 방식이 된 것에 대해 좀 더 논의를 해보자. 이 자기실천이 보급됨에 따라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늘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대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야기한 직업 철학자의 형상은 점차적으로 모호해진다. 기원 후 2세기, 직업적 철학자는 웅변술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또 정치적인 이유로 불신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볼 것을 설파하고 요청하며 주장하는 직업 철학자들의 실존은 상당수의 정치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에 대한 아주 의미심장한 논의도 있었다.

 

플리니우스의<서한집>에서의 반견유학파주의자 유프라테스

플리니우스의 서한집에서 등장한 중요한 철학적 인물, 유프라테스. 그는 젊었지만 어린아이나 학교 수학기의 청소년은 아니었다. 플리니우스는 그와 사귀었고, 아주 내밀하게 사귀었다는 사실. 플리니우스는 그와 실존을 공유했거나 적어도 인생의 상당한 시기를 그와 함께 했었다. 그들 사이에는 강도높은 애정 관계가 있었다. 우정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니며, 두 개인의 직접적인 소통이 아니었다. 한 사람을 중심축으로 하지만 그의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이 위치는 각자의 노력에 의해 변화하는 그런 우정의 구조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있을 수도 있는 erôs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우정에서 있을 수도 있는 erôs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아무튼 대단히 다른 그런 우정이었다. 유프라테스라는 인물의 묘사에는 대단히 강조되고 과장된 예찬이 있다. 철학자가 아니었던 플리니우스는 유프라테스를 대단하다고 찬양하고 그의 모든 성품을 미화시키며 강도있는 애정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예외적인 인물로 변화시켜 버린다. 아무튼 유프라테스라는 인물을 통해 사람들은 철학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식으로 철학자를 묘사하면서 전통적으로 직업 철학자를 특징짓는 특징들을 체계적으로 소거했다. 유프라테스는 철학적 실천과 정치활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플리니우스는 철학만을 하는 전통적인 철학자상을 탈전문화시키면서 유프라테스를 찬양한다. 그는 유프라테스를 일종의 사회화된 지혜의 위대한 대가로 등장시킨다.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학원 밖 철학: 세네카

소피스트․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시대에도 타자는 독특함 속에서 자신의 능력이나 소피스트적 수완에 의지하는 스승이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신성하고 영감을 받은 자의 소명에 근거한 스승이었거나 플라톤의 경우처럼 이미 지혜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스승이었다. 1,2세기의 스승은 사라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실천이기도 한 자기 실천에 의해 침식당하고, 포위당하고, 도전받게 된다. 자기실천은 사회적 실천과 연관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네카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세네카는 직업 철학자였다. 그는 정치활동과 행정활동을 했다. 그의 의식지도를 받은 사람들은 세네카가 또 다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었던 사람들이다. 반은 친척관계이자 우정과 보호가 필요한 관계였다. 플루타르코스도 누군가를 지도하려고 개입해 조언을 할 때마다 실은 사교관계나 신분 관계 또는 정치적 관계를 변조시켜 이용했다.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는 타인을 지도하기 위해 직업 철학자의 자격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가 영혼의 봉사라는 임무와 또 타자가 자기 자신을 적절히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간섭과 조언의 토대를 세울 수 있도록 일종의 과업과 의무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세네카의 <영혼의 평정에 관하여>에 세레누스의 고백이 있는데 그는 세네카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한 경험, 결과적으로 가능한 지도자의 시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방식에 대한 증언이 여기 있다.

 

프론토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간의 서신: 실존의 지도에서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의 체계화

프론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다. 그는 철학 선생이 아니라 웅변술 선생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프론토 덕분에 권력 행사가 얼마나 많은 위선을 야기시키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우리의 귀족제 내에서 ‘감성을 갖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 요소는 프론토가 위선과 아첨 등과 대립되는 정직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또한 아우렐리우스가 프론토에게 보낸 편지 속 내용들은 우정, 애정, 부드러운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것들을 내포하는 애정과 사랑의 관계이다. 이 편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하루 일을 세심하게 언급한다는 점이다. 이 편지에서 언급된 모든 것들을 세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다. 우선 건강과 양생술에 대한 세부 사항이 있다. 다음으로 가사와 종교적 임무를 보고한다. 이는 가정관리 생활, 가족관계, 주변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가족․재산․노예 등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 활동의 양상이다. 마지막은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두 남자의 사랑과 두 여자의 사랑의 강도․가치․형식을 비교하는 아주 이상한 일종의 개인적 질문이 문제이다. 이 세 가지는 당대에 자기 실천이 항구적인 상호 참조를 통해 구체화되는 주요 세 영역이었다. 양생술에서 가정관리술로, 가정관리술에서 연애술로 이어지는 세 영역 간의 관계와 현전하고도 강한 상호 참조가 존재한다. 이 세 요소는 양상은 다르지만 <알키비아데스>에서도 마주친 것들이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배려해야 했던 자기가 바로 영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만약 돌보아야 할 바가 영혼이라면 자기 배려는 신체의 배려도 아니고 재산의 배려고 아니며 사랑의 배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세 영역은 성찰의 표면의 자격으로 즉 내가 나 자신의 실존의 규칙이자 목표인 자기 실천을 체험하고 훈련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의 자격으로 재통합된다. 이 세 가지가 자기 실천의 적용 영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의식점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 의무적으로 해야 했던 재점검, 또 자신이 본래 해야 했던 바와 자신이 실제로 한 일, 그 일을 하는 데 본래 사용해야 했던 방식과 실제로 사용한 방식에 대한 결산을 가능케 하는 재점검을 한다. 그리고 이 재점검을 해명한다. 그런데 이것을 ‘부드러운 스승’에게 해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지도가 이미 어떤 시기 이후부터 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경험이 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되어 버린 방식에 관한 흥미로운 예를 발견하게 된다. 강도있는 애정관계를 맺고 있는 소중한 친구에게 자기반성을 토로하는 것. 그를 자기의 의식지도자로 삼고, 단지 친구이기 때문에 철학자 자격이 있던 없던 그를 의식 지도자로 취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기 실천의 발전을 통해, 자기 실천이 일종의 사회적 실천이 됨을 통해 아주 새롭고 중요한 것이 발전하게 되는 그것은 바로 일반적인 언어나 담론의 윤리가 아닌 타자와 맺는 언어 관계의 윤리이다. 타자와 맺는 언어 관계의 새로운 윤리가 parrhêsia라는 근본적 개념에 의해 지시된다. parrhêsia는 의식지도의 실천에서 사람들이 타자와 가져야 하는 언어 행동의 원칙이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좀 길쥬?
세미나 전에 줄일 수 있으면 좀 줄여보겄슈.

삼월님의 댓글

삼월

우와. 책 내용을 거의 그대로 복기할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하고 자세한 발제로군요.
줄이기엔 아까워요.
세미나 진행에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소리님의 댓글

소리

와우!!!!!!

유택님의 댓글

유택

참 기시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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