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자기 배려의 시작 (3/24 세미나후기) +6
삼월
/ 2017-03-31
/ 조회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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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주체와 진실’이다. 푸코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주체의 문제로,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를 꺼낸다. 고대부터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만 푸코가 보기에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의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감이 있었다. 델포이 신전의 문구 ‘너 자신을 알라’가 우리에게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를 일상적 의미가 아닌 철학적 의미로 사용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자기 배려의 필요를 강조하면서, 설득의 과정에서 자기 인식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지 못하므로, 자기를 배려하는 문제에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후 자기 배려의 문제는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화 전반에 걸쳐 철학적 태도에서 중요한 특징이 된다. 자기 배려는 고대철학과 초기 기독교를 관통하는 총체적 문화현상이며, 근대까지 내려오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 자기 배려의 문제가 등장하는 순간을 사유의 역사 내에서 포착하려 한다. 기독교 안에서 자기 배려는 개념이 확장되고, 그 의미들이 배가되거나 변형되었다. 그 개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 사물을 고려하는 방식, 세상에서 처신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과 같은 일반적인 태도의 테마
2. 주의 시선의 일정한 형식: 시선의 변화,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
3. 실천: 항시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형·변모시킴
푸코가 보기에 서구의 사상과 철학은 근대에 올수록 자기 배려를 희생시켜, 자기 인식에 특권을 부여하였다. 푸코는 이 책임을 기독교에 묻지 않는다. 기독교는 자기 배려를 금욕주의의 모태로 삼는 등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자기 배려의 전통을 유지·확장시켜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푸코가 중요하게 주목하는 부분은 흔히 ‘데카르트의 순간’이라 불리는 지점이다. ‘데카르트의 순간’은 사실 데카르트 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순간에 일어난 일도 아니지만, 철학적으로 분명히 자기 배려를 축소시키는데 기여했다.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근본통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배려는 우리를 동요시키는 힘을 유지하며, 여전히 철학의 저변에 살아있다. 자기 배려라는 말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우울, 윤리적 단절, 허세, 위협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체와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이 강의의 첫 부분에서 유독 흥미로운 부분은 푸코가 보여주는 ‘철학’과 ‘영성’에 대한 정의이다. 푸코는 철학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철학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묻는 사유형식이다. 또 이 물음에 대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거나,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철학이 진실의 문제에 이렇게 접근해갈 때,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을 푸코는 ‘영성’이라고 부른다. 이 ‘영성’의 개념은 이후 기독교에서 받아들여 변형시킨, 신과의 합일을 향해가는 영성과는 다르다. 이 영성의 개념으로 인해 진실이 충만한 권리로 주체에게 주어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진실은 주체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일련의 변형을 통해 주체의 존재를 완결시키는 무엇이다.
너무 늦었쥬? ㅠㅠ 죄송합니다. 주체가 진실을 향해 가는 여정이 참 아득~~합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아 지난주 후기군요 ㅎㅎ
지난주에는 확실히 구분했던 자기인식과 자기배려가 이번주에는 묘하게 착종되고
불분명했던 영혼, 영성의 개념이 이번주에는 그 실체(?)를 드러낸 느낌입니다.
2강 세미나를 마치고 복습하듯 읽는 지난 주 후기도 좋네요^^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후기가 넘 늦었습니다.
또 여러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기도 하고요.
예습인지 복습인지 알 수 없는 후기와,
예습도 복습도 소용없이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푸코의 강연록을 읽으며
문득 이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듭니다.
이제야 조금이라도 변형의 준비가 된 것일까요?
진실까지는 아직 멀더라도,
어떤 뒤틀림, 균열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준비가!
ㅎㅎ 잠을 못 자고 또 세미나하러 나가는 길이라 그런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게 됩니다.
winaa_님의 댓글
winaa_
삼월 후기 잘 읽었어요~ 저도 오늘은 부담없이 댓글을 보태봅니다.
푸코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가 시작될 무렵인거 같네요~
그의 질문들 - 동성애가 언제부터 부정적 정서를 갖게 되는지,
광기는 언제부터(어떻게) 처벌의 대상이 되는지, 주체는 언제부터 어떤방식으로 구축(?)되어 왔는지...
이렇게 녹록찮은 주제들을 놓고 역사의 흐름을 관통하는 푸코의 작업이,
그러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제반환경이, 또 그의 통찰력이 부러웠습니다.
니체와 푸코가 요맘때 저에게 엄청난 활력소예요~ 함께 하는 시간들에 지금은 그저 고맙네요 :-)
삼월님의 댓글
삼월
우와. 이 댓글을 보니 뉴미님이 푸코를 정말 좋아하시는 걸 알겠어요.
푸코가 했던 중요한 작업들을 꿰고 계시군요.
푸코 강연록 읽기가 조금 정체되었다고 느낀 때쯤 문득 나타나 함께 해 준 뉴미님, 저에겐 나름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조금씩 섞이고 쌓여가는 말들도 좋고요.
오래 함께 해요. 니체 얘기도 함께 더 나누고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다들 푸코 참 좋아하네요 ㅎㅎㅎ
삼월님의 댓글
삼월
제가 아무리 푸코를 좋아한들 여행가서도 푸코 책 읽는 유택님만 하겠습니까!
이 애정에 밀리지 않도록 분발해야 할 텐데.
역시 답은 수련 밖에 없는 겁니까. 읏샤읏샤! 이얍이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