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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세미나 발제문
소리 / 2017-03-31 / 조회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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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배려 (heautou epimeleisthai)의 탄생 맥락

이번 강의에서 푸코는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 배려(heautou epimeleisthai)를 얘기합니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배려, 너 자신을 돌보아라(occupe-toi de toi-même)라는 말이 등장 하는데는 3가지 맥락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정치·사회적인 맥락입니다. 알키비아데스처럼 귀족 사회에 소속된 엘리트 계급의 젊은이들은 타인을 통치해야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것을 요구받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타인을 통치하기 위한 자기 배려가 중요했습니다. 둘째로, 아테네의 교육의 부실성 때문입니다. 집단적 규율을 통한 연속적인 엄격성을 갖는 스파르타의 교육법이나, 젊은 군주들에게 필요한 4대 덕을 가르치기 위한 4대 스승을 둔 페르시아아 달리 아테네의 교육은 취약했습니다. 아테네 교육의 취약성은 소년애 문화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아테네의 교육은 성인남성과 소년 간의 사랑인 소년애를 기반으로 행해졌는데, 유년기를 지난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 젊은이들에게는 정치의 실천을 위한 교육이 필요했으나 성인 남성들은 이를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교육과 사랑의 이중적 결핍의 상황 속에서, ‘다스림 받기’가 되지 않은 귀족 젊은이들에 대한 “자기 자신을 돌보기(epimeleia heautou)”가 요청됐습니다. 셋째로 이중의 무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알아야 할 사물들에 대한 무지와 이 사물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기에의 무지라는 이중의 무지 상태입니다.

 

 

*자기 배려란 무엇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요청된 자기 배려와 관련된 앎에 대한 테크닉은 <알키비아데스>를 비롯한 다른 플라톤의 대화편과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도 발견됩니다. 정화의 의식, 영혼을 집중시키는 의식, 은거의 테크닉 등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수련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 내 곳곳에 존재했고, 금욕주의와 함께 피타고라스주의(금욕주의적, 신비주의적 요소 多)와 같은 철학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1,2세기 로마 시대까지도 자기 테크놀로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자기 테크놀로지의 예는 꿈에 대한 정화준비와 단련 테크닉입니다. 음악을 듣고 향수를 맡으며 의식을 점검하고, 그날 하루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단련 테크닉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고, 자신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플라톤의 철학적 사유 내에서 자기 자신 돌보기(epimeleia heautou)가 등장하기도 전에 자기 테크닉은 발견됩니다.

 

너 자신을 알라 gnônai heauton

이제 <알키비아데스>로 돌아가서 자기 배려를 해야 한다고 하는 127e구절을 살펴봅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배려(epimeleia)는 무엇인가?’하는 두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알키비아데스>의 핵심질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인 ‘자기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대화하면서 델포이 신탁인 “너 자신을 알라(gnônai heauton)”의 내용을 언급 합니다. 첫 번째 용례는 알키비아데스가 도시국가를 통치해야 할 만한 상태인지를 먼저 알려주기 위해 사용합니다. 즉, “내가 어떤 종류의 동물에 속하고,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 용례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heauton(자기)’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관계는 무엇이며, 재귀대명사 heauton은 무엇을 지시하며, 주체의 측면이나 대상의 측면에서 동일한 이 요소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내 자신을 돌보아야 할 자는 나이며, 이후 나와 동일한 무엇을 돌봐야하고, ‘~을 배려하는’ 주체와 동일한 무엇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heauton(자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psukhê)입니다. 이런 답을 했을 때, 플라톤의 다른 책인 <국가>에서 나타나듯이 영혼의 위계와 통치 기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에서는 그런 위계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는 이 귀결에서 행위의 주체로서의 영혼, 신체와 신체 기관, 그리고 언어와 같은 신체의 도구들을 사용하는 한에서의 영혼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쓰인 ‘사용하다’라는 그리스어인 (v.)khrêsthai/(n.)khrêsis는 다양한 뜻을 갖습니다. ‘사용한다, 이용한다, 행동이나 태도를 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khrêsthai/khrêsis는 자기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지칭합니다. 주체가 운용할 수 있는 대상, 자신이 관계를 맺는 타자, 자신의 신체, 그리고 자신과 관련한 초월적 위치를 말 합니다. <알키비아데스>에서 나오는 khrêsthai/khrêsis는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닌, 주체로서의 영혼을 염두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배려는 우리가 다수의 ‘무엇인가의 주체’인 한에서의 자기 배려이며, 행위의 주체, 행동의 주체, 관계의 주체, 태도의 주체인 한에서의 자기 배려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자기 배려에서 주체인 영혼을 목표로 하면서부터, 자기 배려는 외견상으로는 자기배려와 관련 깊어 보이는 의사, 가장, 연인이라는 세 유형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돌보는 tekhnê는 육체를 돌보는 의사의 tekhnê, 자신이 소유한 것을 돌보는 기술인 가정 관리술의 가장의 tekhnê, 육체의 아름다움만을 배려하는 연인과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젊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 점은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알키비아데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epimeleia heautou에서 스승의 위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스승이라는 타인과의 관계를 거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스승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배려를 배려하는 자이고, 제자를 사랑하면서 제자가 자신을 배려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의사, 가장, 연인과 스승의 차이와 이행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이 문제들이 자기 배려와 자기 배려의 테크닉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환기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 배려와 의학, 자기 배려와 신체의 배려, 자기 배려와 양생술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됩니다. 둘째로 사적인 의무인 사회활동(가정 관리술) 간의 관계 문제가 제기됩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가정 관리술과 자기 배려를 분리시키려고 하고, 스토아주의자들은 둘을 연루시키려 합니다. 셋째로 자기 배려와 애정 관계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명을 거치며 점차적으로 자기 배려와 연애술과 분리됩니다.

 

 

*배려란 무엇인가?

이제 푸코는 배려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 배려의 목적은 자기를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을 때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파악하여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자극하기 위한 의미의 자기배려의 말로 쓰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 언급은 자기 배려의 권고 이후의 방법론적 형태의 질문입니다. 이제 배려해야할 자기 heauton이 무엇이며, 그것의 의미와 참조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세 번째 언급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지 자문할 때 발생합니다. 이 순간 너 자신을 알라(gnôthi seauton)이 등장합니다.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완전한 의미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순간은 플라톤주의의 구축의 순간이며, 자기 테크닉과 자기 배려의 역사에서의 핵심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식, 자기 인식과 동일시할 수 없는 실천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인식은 수많은 실천들을 포함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을 되돌아봐야하며(인식), 우리를 기만하는 감각으로부터 벗어나야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인식(gnôthi seauton)’을 중심으로 사유의 집중, 자기 자신의 중심으로의 영혼의 밀착, 자기 자신 안으로의 은둔, 인고와 같은 기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들이 재구성됩니다. 푸코는 자기 인식에 부여된 특권과 관련한 자기 배려를 재출현시키고자 합니다.

 

눈의 비유

이제 <알키비아데스>에서의 gnôthi seauton(자기 인식)의 세 번째 재출현에 대해 검토합니다. 여기서의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자기 스스로 인식하는 것은 눈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눈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속성의 같음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둘째, 눈은 시각의 원리 속에서 자신을 봅니다. 즉 타자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각 행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영혼을 대입하여 생각하면, 영혼은 자신의 시선을 자시니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 한 요소로 향하는 한에서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혼의 속성을 만들어 내는 동일한 원리인 사유와 지식이라는 원리 안에서만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영혼은 더 밝고 맑은 거울인 신 안에서 들여다 볼 때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요소 내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신성과 접촉하여 신성을 파악할 수 있을 때, 신성이라는 사유와 인식의 원리를 사유하고 인식 할 수 있을 때 영혼은 지혜를 갖게 됩니다. 지혜를 갖게 된 순간 영혼은 이승 세계로 방향을 돌려,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를 발전시켜 <알키비아데스>의 다른 구절을 통해 배려의 대상에 대해 말합니다. 자기 인식이 된 주체는 이제 ‘정의’를 배려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정의를 문제 삼는 것은 초기 대화의 양식과는 다릅니다. <알키비아데스>에는 두 요소, 두 층의 텍스트가 합쳐져 있는 것 같고, 그것이 경합하다 통합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가설도 존재합니다.

 

플라톤주의의 역설

<알키비아데스>에서의 자기배려는 타인에 대한 통치, 교육에 대한 문제 그리고 남성의 연애술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테마들은 자기 배려의 역사를 구성하는 변화들과 함께 해온 테마들입니다. 푸코는 <알키비아데스>를 통한 문제제기를 통해 자기 배려의 긴 역사를 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보편적 자기 배려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적인 자기 배려 형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주의/신플라톤주의적 전통의 특징은 첫째로 자기 인식으로부터 자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로 자기 인식이 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대준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진실 접근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재확인 해준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고대 사상사와 17세기까지의 유럽 사상사에서 중요한 ‘플라톤주의의 역설’을 발견합니다. 그 역설이란 플라톤주의는 신성을 자기 안에서 확인하는 행위인 자기 인식에 의해서만 인식과 진실 접근을 이해하기 때문에 다양한 영성 운동의 주요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플라톤주의는 인식과 진실 접근이 자기 자신과 신성과 관계를 맺는 영혼의 영성운동을 통해서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주의는 합리성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식과 진실의 인식은 영성이 요구하는 것들을 자기 안에 흡수하여 제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플라톤주의는 고대 문화와 유럽 문화 전반에 걸쳐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진실 접근을 위한 영성 조건들을 부단히 다시 제기함과 동시에 인식, 자기 인식, 신성 인식, 본질 인식 속에서 영성이 요청하는 바를 제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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