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주체의 해석학> 0407 발제 +1
유택
/ 2017-04-02
/ 조회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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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월 20일 강의 발제 (2017-04-07 유택)
한 강의씩 세미나 진도 나가서 정말 다행입니다.
읽다보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
[전반부]
기원후 1,2세기는 자기 배려 역사상에서 진정한 황금기이고, 자기 배려가 개념의 수준에서나, 실천의 수준에서나 제도의 수준에서도 널리 확산된 시대이다.
<알키비아데스>에서 기원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자기 배려의 일반적 변화
이 시대에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배려의 필연성을 특징 지었던 세 한정 조건은 사라진다. 첫째, 자기 배려는 신분과 관계없이 만인에게 항시 부과되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원칙, 정언적 명령이 되어 버렸다. 둘째, 타인을 통치하고 도시국가라는 특수하고 특권화된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고,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갖는다. 셋째, 자기 배려가 자기 인식이라는 유일한 형식 내에서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인식 형식이 완화되고 우리가 확인한 보다 방대한 총체 속에 편입/통합된다는 말이다.이 총체에 대해서는 어휘/유형별 표현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Epimeleia(배려)를 중심으로 한 어휘 연구
Meletan, melete, epimelesthai, epimeleia 등과 같은 일련의 용어들은 일군의 실천들을 지시한다. 그리고 4세기 기독교들의 어휘 가운데 epimeleia가 아주 번번히 금욕적 수련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epimeleia/epimeleisthai가 행동의 형식들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대표적인 표현들
첫째군, 인식 행위를 가리키며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기울이는 주의, 시선, 지각과 연관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기 /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 자기 자신을 점검하기. 둘째군,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며 자기 자신으로 회귀 하도록 유도하는 실존 전반의 운동에 필요한 배려와 관련된다.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 자기 자신으로 후퇴하기 /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 세번째군, 자기 자신에 대한 특수한 행동거지와 관련이 있다. 의학적 표현, 법률적 유형의 표현, 종교적인 표현이 속한다. 네번째군, 자기와의 일정한 유형의 항구적 관계를 지시한다, 자신의 주인 / 자신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어내기 / 자기 자신으로부터 환희를 느끼기 / 자족하기. 이렇게 이 시대에 표현되고 나타나서 전개된 일련의 모든 표현들은 단순한 인식 행위를 넘어서고 있고 자기 실천을 중시한다.
자기 배려의 일반화 : 실존 전반과의 공통된 외연을 갖는 자기 배려
두 축, 두 차원에서 행해지는 자기 배려의 보편화 과정이 있다. 첫째, 개인 생활의 차원에서 일반화가 있다. 어떻게 자기 배려가 개인 생활과 외연을 함께하는 것이며, 또 개인 생활과 외연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강의 전반부에서 설명한다. 둘째, 그것을 제한하는 것들이 무엇이든지간에 자기 배려를 모든 개인들에게 확산되게 만드는 일반화 과정을 후반부에서 분석한다.
텍스트 독서 : 에피쿠로스, 무소니우스 루푸스, 세네카, 에픽테토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이제부터 자기 배려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사이의 시기에 발생하는 교육적 위기에 단순히 관련된 정언적 명령이 아니다. 자기 배려는 인생 전반에 걸쳐 지속되어야 할 항구적인 의무 사항이 된다.
#에피쿠로스
첫째, ‘철학하기’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기’의 동일시가 있다. 둘째, 철학 행위에 제안된 목표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다. 셋째, 자기 배려 행위를 젊던 늙던 전 생애에 걸쳐 실천해야 한다는 점이다.
#스토아주의(무소니우스 루푸스/세네카/에펙테토스)
자기 배려와 자기 실천은 평생의 일이다. 또 그것은 성인의 일이고, 무게 중심과 특권화된 시간적 축이 청소년기가 아니라 중년이 된다.
#견유학파 웅변가 들은 어디에 속하지? 스토아주의자들???
#유대인 고행자 그룹들
필론의 <명상 생활에 관하여>에서 유일하게 언급되는 사람들이다. <알키바아데스>와는 완전히 역전된 전경을 보게 된다. 즉 이 사람들은 생의 시작에서가 아니라 끝에서 영혼을 돌본다. 말하자면 자기 실천의 무게 중심은 이제 장년으로의 이행기라기 보다는 장년 자체에 있게 된다.
#루키아노스의 텍스트
그들은 시장에 생활 방식들을 진열하고, 각자는 제자들을 모집하며 자신의 생활 방식을 팔려고 한다.
#피타고라스
자기 배려 일반화의 윤리적 결과 : 교육적이고 교정적인 축으로서의 자기 배려 : 의학적 행위와 철학적 행위의 근접성 (공통 개념 : 치료적 목표)
청소년기에서 장년기, 장년기 종반부로 중심을 이동하면서 중요한 몇 가지 결과들이 발생한다. 먼저 자기 배려가 성인의 활동이 되어 버린 순간 그 비판적 기능은 더욱 강조된다. 자기 실천은 교정적 기능과 교육적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 자기 실천은 자기 자신, 자신의 문화적 환경, 타인들이 영위하는 삶에 대한 점차적인 비판 행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실천이 비판적 기능만을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교육적 요소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의 실천과 연관되게 된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발전되는 자기 실천에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준비와 연관된 교육적 측면이 있다. <알키비아데스>에서처럼 훌륭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개인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모든 직업의 특화와는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고, 불행, 불운, 몰락 등을 품위 있게 견뎌낼 수 있도록 개인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교육적 측면은 교정적 측면과 분리 될 수 없고, 이 교정 기능은 차츰차츰 중요성을 갖게 된다. 자기 실천은 교육-지식 보다는 교정-자유에 가깝다. 청소년기말에서 성년으로 자기 배려의 시간적 이동이 발생시킨 첫번째 결과는 자기 실천의 비판적 기능이다. 두번째 결과는 자기 실천과 의학의 근접이다. 즉, 의학의 형식과 유사한 형태의 실천에 근접하게 된다. 그래서 의학과 자기 배려의 유비적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더욱 의미심장한 바는 철학이 규정하는 자기 실천이 의학적 수술로 인식 된다는 사실이다. 점차적으로 지지되고 극명해지는 철학과 의학, 영혼의 실천과 인체 의학의 상호 관계에서 세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요소들은 실천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자기 배려를 실천하기 위해 연합한 사람들의 단체나 철학 학파는 영혼의 진료소와 같은 것을 실제적으로 구축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반부]
노년의 특권(긍정적 목표와 실존의 이상 지점)
시간적 이동의 세번째 결과는 분명히 노년이 갖는 새로운 중요성과 가치이다. 그리스의 전통적 문화에서 노년은 분명 영예로운 것이었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배려가 인생 전반에 걸쳐, 그러나 특히 성년에 실천되어야 하므로, 즉 자기 배려가 모든 차원을 지배하고 성년기 전반 내내 효력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자기 배려의 최고 도달 지점과 형식 그리고 그 보상의 순간은 노년에게 주어지게 된다.
보편적 소명으로의 자기 배려 원리의 보편화와 파당적 현상의 결합
이제 사람들은 “너 자신을 돌보아라, 그것이 전부다”라고 말한다. 자기 배려가 만인에게 관계되고 부과되는 보편적 원리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푸코는 역사적이고 동시에 방법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즉 이제 자기 배려가 일종의 보편적 윤리적 법을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푸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바로 법 자체가 에피소드나 일시적 형식처럼 자기에 대한 주체의 테크닉과 테크놀로지의 역사라는 훨씬 더 보편적인 역사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테크닉과 테크놀로지는 법의 형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법보다 우선적이다. 법은 자기와 관련한 주체의 테크놀로지의 가능한 한 양태이다. 정확히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주체와 관련을 맺는 것과 같은 서구의 주체가 그 과정에서 구축된 오랜 역사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푸코는 말한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자기 배려는 개인이 취하는 삶의 방식이 어떠하든간에 모든 개인에게 유효한 보편적 법칙으로 실제적으로 생각되고, 제기되고, 주장된 적은 결코 없었다. 자기 배려는 생활 방식의 선택, 다시 말해서 이러한 방식의 생활을 선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분할을 내포한다. 그러나 자기 배려가 무조건적이고 자목적적이라 해도 보편적 법칙과 동일시 될 수는 없었다. 자기 배려는 원리로서 일반화는 되었지만, 그것은 항상 파당적 현상과 연결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관련된 사회적 범위 : 민중의 문화적 환경에서 로마의 귀족적인 우정의 네트워크까지
그러나 자기 배려가 귀족 사회(엘리트) 사회에서만 발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배려가 주민들 내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종교적/예식적 조직으로 통해서 혹은 적어도 우정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푸코는 큰 두 축으로 정리한다. 한편으로는 더 대중적이고 더 종교적이며 더 문화적이고 이론적으로는 덜 세련된 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개인적이고 더 교양이 있으며 최고 특권층과 더 친숙한 연관이 있는 영혼의 배려, 자기 배려, 자기 실천의 축이 있다. 그러나 오직 두 계층, 요컨대 대중적이고 세련되지 않은 계층과 박식하고, 교양 있고, 우정 있는 계층만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태는 대단히 복잡하다. (역시 푸코 ㅠ)
두 다른 예 : 에피쿠로스학파와 치료사단체
인간 공동체에 단순히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 배려가 출현해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배려는 제한되고 구별되는 단체들 내부에서 종교 예식적인 것, 치료적인 것, 지식과 이론의 접목을 통해 구체화 되지만 단체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례에 따라 가변적인 관계가 문제시 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법 패러다임의 거부
대부분의 단체들이 절대적으로 도시국가와 사회 내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신분의 차이를 나름대로 강조하고 반복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그 단체들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였고, 또 헬레니즘/로마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신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개인들은 모두가 자기 실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출신이나 신분을 이유로 어떤 개인에 대한 선험적 자격 박탈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이 원칙적으로 자기 실천에 접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너무도 보편적인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실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용기 부족, 역량 부족, 인내력 부족, 즉 자기 배려 과업의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이 대다수 사람들이 처한 운명이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자가 소수의 탁월한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배려의 호소는 만인에게 행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만인을 향해 설파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들리고, 극소수 사람들의 복락을 확보하는 중대한 보편적 형식의 목소리가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소의 보편성과 선택의 희귀성 같은 이중 분절의 구조적 원리, 구원의 형식
만인에게 호소되지만 오직 소수만이 들을 수 있는 이 목소리의 형식은 신의 계시, 신앙, 성서, 은총 등의 문제 주변에서 재분절 되어 기독교의 중심부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에서 자기의 문제와 자기와의 관계의 문제가 이미 두 요소(호소의 보편성과 구원의 희소성)를 갖는 이 형식 내에서 문제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보편적 호소에 답해야 하는 구원, 그러나 사실상 소수에게 예정된 구원이 문제이다.
댓글목록
winaa_님의 댓글
winaa_
유택~~~^^ 발제 자료 일찍 올려주셨네요,
덕분에 저도 거침없이 잘 읽어갈 수 있을듯 합니다. (라고 하고는 다시 읽어보니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찍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발제는 아직 멀었지만 여유를 두고 준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