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주체의 해석학》 3/24 발제문 +2
삼월
/ 2017-03-23
/ 조회 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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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 문제들의 환기: 주체성과 진실, 새로운 이론적 출발점: 자기 배려
푸코가 이번 강의에서 다루려고 하는 문제는 ‘주체와 진실’이다. 문제의 출발점은 ‘자기 배려’ 개념이다. 여기서 자기 배려라고 번역되는 Epimeleia heautou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이다. 푸코가 주체와 진실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철학사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이 개념을 선택한 일은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델포이의 gnô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이 주체의 문제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푸코의 첫 강의는 Epimeleia heautou(자기 배려)와 gnôthi seauton(자기 인식)의 관계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델포이 신전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에 대한 해석들
델포이에 각인된 ‘너 자신을 알라’는 원래 철학적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신의 견해를 들으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행위와 연관된 규칙과 권고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세 가지 격언과 그 의미들은 다음과 같다.
1. 결코 도를 넘어서지 말 것: 과도한 질문을 하지 말고, 필요한 질문만 하라
2. 보증금: 지불하지 못할 것을 약속하지 말고, 지키지 못할 맹세를 하지 말라.
3.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한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인식의 원리가 아니며, 신중의 보편적 원칙들이라 볼 수 있다.
배려의 인간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세 발췌문 분석
‘너 자신을 알라’가 철학적 사유로 등장할 때는 소크라테스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는 자주 ‘자기 배려’의 문제와 연결되고 접합된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합이 아니라, 자기 배려에 종속된 상태에서 표현되는 자기 인식이다.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라는 보다 일반적인 범주의 한 형식이나 결과, 또는 구체적으로 한정된 보편적 규칙의 특수한 적용으로 등장한다. 플라톤의 텍스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배려를 주장하고 선동한 최초의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텍스트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타인에게 자신을 돌보라고 선동한다. 그 선동을 위해 개인적 이익을 포기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자기 돌봄’의 문제에 있어 스승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소명이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데 있다고 믿으며, 여기서 자기 배려는 최초의 각성 순간으로 간주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동물들을 물고, 움직이고, 동요시키는 등에와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자기 배려는 인간 신체에 달라붙은 등에와 같다. 인간을 물고, 달리게 하고, 동요시키며, 살아있는 한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푸코는 이토록 중요한 자기 배려의 문제가, 자기 인식의 명성으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고대의 철학적·도덕적 삶의 계율로서의 자기 배려, 초기 기독교 텍스트에서의 자기 배려
자기 배려와 연관된 규율들은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화 전반에 걸쳐 철학적 태도를 특징짓는 항구적 원리이기도 했다. 플라톤과 에피쿠로스, 견유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들, 그리고 에픽테토스에게도 자기 배려의 개념은 중요했다. 헬레니즘·로마를 거치면서 자기 배려는 철학뿐 아니라 총체적 문화현상이 되었다. 푸코는 이처럼 한정된 폭을 갖는 한 문화현상이 실제로 근대적 주체의 존재양식에까지 관여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순간을 사유의 역사 내에서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배려의 개념은 고대철학 전반과 초기 기독교를 관통하고 있는데, 배려의 개념은 기독교의 윤곽을 구축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성 내에서도 재발견된다. 자기 배려는 여기서 기독교 금욕주의의 모태가 된다.
일반적 태도로서의 자기 배려, 자기와의 관계, 실천들의 총체
기독교 안에서 자기 배려는 개념이 확장되고, 그 의미들이 배가되거나 변형되었다. 이렇게 확장·변형된 자기 배려의 개념들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 사물을 고려하는 방식, 세상에서 처신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과 같은 일반적인 태도의 테마
2. 주의 시선의 일정한 형식: 시선의 변화,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
3. 실천: 항시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형·변모시킴
자기 인식을 위해 자기 배려가 근대에 실추된 이유들: 근대의 도덕, 데카르트의 순간
그렇다면 서구 사상과 철학은 왜 이 자기 배려를 무시한 것일까? 왜 자기 배려를 희생시켜 자기 인식에 특권을 부여한 것일까? 사실 자기 배려의 문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자기 배려는 우리를 동요시키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도덕의 토대로서 현재의 우리를 벗어나는 전통 속에 남아있다. 자기 자신을 고무하고 경배하며,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 자기 자신에 봉사하라는 이 모든 권고들. 우리 귀에 이것은 윤리적 단절의 의미, 허세, 위협, 일종의 도덕적 댄디즘, 초극 불가능한 미학적·개인적인 단계의 단언-도발로 들릴 수 있다. 아니면 집단적 모럴의 붕괴에 직면해 자기 자신만을 돌볼 수밖에 없는 개인의 퇴행에 대한 우울하고 슬픈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 점들은 우리가 자기 배려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 책임을 기독교에 물을 수는 없다. 오히려 푸코는 기원 직전과 기원후 초기의 도덕들-스토아학파, 견유주의, 에피쿠로스학파-에 책임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 배려를 이기주의나 自省자성의 의미로 여기지 않고, 도덕과 관련해서도 긍정적이고 원형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긴 시기도 수 세기 동안 존재했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기 배려의 결과에서 비롯된 엄격한 모럴과 규칙들을, 자기 배려와는 다른 의미로 반복해왔다. 이 엄격한 규칙들은 비이기주의 윤리의 맥락 내에 재적응되었고, 순서가 바뀌어 전이되었다. 때문에 기독교와 근대의 비이기주의 도덕은 우리가 이기주의나 자성이라고 여기는 자기 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푸코는 이로 인해 자기 배려가 역사적으로 경시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진실과 진실의 역사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철학적으로 자기 배려를 실격시키고, 자기 인식을 복권시킨 중요한 지점, 우리가 ‘데카르트의 순간’이라고 부르는 지점이다. 데카르트에 의해 자기 인식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근본 통로가 된다. 그로 인해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복권시키고, 자기 배려를 근대철학에서 배제시키는 데 기여했다.
영지주의의 예외, 철학과 영성
푸코는 주체와 진실을 말하기에 앞서 ‘철학’과 ‘영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철학’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묻는 사유형식이다.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게 하거나, 그럴 수 없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묻는다. 그렇다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를 수 있다. 서구에 등장하는 영성은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영성은 진실이 충만한 권리로 주체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가정한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개심이나 변형이 필요하다.
2. 개심은 주체를 현재의 신분·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활동이다. 이 운동을 erôs(사랑) 활동이라 부른다. 여기에 주체가 자신을 변형할 수 있는 작업, 즉 수련(askêsis)이 필요하다.
3. 영성에 있어 진실은 주체의 인식행위를 보상하고, 인식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주어지는 게 아니다. 진실과 진실에의 접근은 주체의 존재를 완결시킨다.
물론 예외로 볼 영적 인식이 분명히 존재한다. 영적 인식과 영지주의는 진실 접근에서 인식 행위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고대의 절대적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영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순간’을 지나온 근대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주체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인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실의 역사에서 근대는 인식만이 진실에 접근하도록 허용되는 순간에 시작된다. 이제 주체가 진실의 ‘회귀 효과’를 통해 변형·완결되는 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은 끝을 알 수 없고 무한한 진보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동시에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차원에서 볼 때 근대는 다음과 같은 가정으로 시작된다. 주체는 그 자체로 진실의 능력이 있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
영성이 요구하는 사항들의 분쟁적 현존: 데카르트 이전의 과학과 신학 - 고전철학과 근대철학: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
사실 ‘데카르트의 순간’은 순간이 아니며, 데카르트라는 한 인물에 집중된 것도 아니다. 이 단절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식 주체를 통한 진실 접근과, 주체가 자신에게 변형을 위한 작업을 가하여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 사이의 분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푸코는 이 분리의 요소들을 과학보다는 신학으로부터 찾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의 완벽성을 믿는 신앙을 통해 주체의 인식능력을 확인하는 기독교의 사유원리는, 철학에서 영성을 분리·해방시킨다. 5세기 말부터 17세기를 관통하는 기독교의 주요 분쟁은 영성과 과학 간의 분쟁이 아니라, 영성과 신학 간의 분쟁이었다. 따라서 단절은 근대과학의 출현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순간’을 단절의 결정적 지점으로 볼 필요도 없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피노자의 텍스트에서는 분명히 영성의 문제가 발견된다. 18세기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셸링·쇼펜하워·니체·후설·하이데거 등 19세기 인물들도 인식 행위와 영성의 요청을 연관시켰다. 19세기 철학사 전반은, 17세기 데카르트 이래로 영성에서 해방된 철학의 문제들을 재성찰하기 위한 일종의 철학 내부의 압력이었다.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에서도 영성의 요청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에 고유한 영성의 조건들을 사회 형식들 속에 은폐시키려고 시도했다. 라캉은 이를 분석하여, 분석적 지식의 용어로 영성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제기하려고 했다. 주체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의 문제와 주체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받는 영향의 문제가 그것이다.
스파르타의 한 격언 분석: 신분적 특권으로서의 자기 배려
푸코는 철학적 성찰에서 자기 배려가 출현하는 시기를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한다. 소크라테스-플라톤 시기, 기원후 1~2세기의 자기 배려 황금기, 고대 이교문명의 철학적 자기수련으로부터 기독교 금욕주의로 넘어가는 4~5세기이다. 원래 ‘자기 자신을 돌보라’는 말은 그리스 문화, 특히 스파르타의 오래된 금언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노동을 하지 않고, 노예에게 일을 시켰다. 스파르타인들에게 자기 배려는 비철학적 일상의 원리였고, 정치적 특권과 관련된 생활 형식이었다.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알키비아데스의 정치적 주장과 소크라테스의 개입
철학적 성찰과 관련된 자기 배려 출현의 첫 번째 시기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시기이다. 푸코가 이 시기의 자기 배려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이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알키비아데스가 정치에 대한 야심이 있는 명문가의 청년이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자기의 신분적 특권을 타인에 대한 통치로 변형시키려 하고, 소크라테스는 이 순간에 자기 배려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젊은 스파르타인들과 페르시아 군주들의 교육에 비교되는 알키비아데스의 교육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허세와 무능함을 겨냥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테네와 적대하는 나라인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인들의 우월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 왕보다 부유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교육받지도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적들과 비교해보는 신중성에 대한 충고이다. 또 알키비아데스에게 적들과 대적할 수 있는 tekhnê가 없음을 지적하며, 통치에 대한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절망하여 자신의 수치스러운 무지상태를 고백하기에 이른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최초의 자기 배려 요청의 출현 맥락: 정치적 주장, 교육의 결함, 비판적 나이, 정치적 지식의 부재
스파르타인들의 자기 배려가 신분적 특권의 결과였던 데 반하여, 알키비아데스의 신분적 특권은 오히려 자기 배려가 필요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자기를 배려하지 않으면 타인들을 잘 지배할 수 없고, 자신의 특권을 타인들에게 가하는 합리적 행위로 변환시킬 수도 없다. 따라서 자기 배려의 출현 지점은 특권과 정치적 행위 사이에 놓이게 된다. 또 자기 배려는 교육의 결함과, 정치활동을 할 비판적 나이라는 특정한 시기 때문에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기 배려의 필요성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순간 긴급하게 나타난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정치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정되지 않은 자기의 속성과 그 정치적 함의
푸코는 이런 맥락에서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는 우리가 배려해야 할 자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배려해야 하는가이다. ‘너 자신을 돌보라’고 할 때, 그 ‘너’는 보편적 인간성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행위란 무엇이며, 자기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 자기 배려의 방식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어떻게 tekhnê를 습득할 수 있을까? 내가 다스려야 할 타자를 배려해기 위해서는 내가 배려해야 할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결국 이 물음이 고대철학에서 가장 먼저 자기 배려의 문제를 출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1강 읽으며..미묘한 삶의 흐름에 숙연 혹은 허탈 혹은 황홀했더랬습니다.
데카르트의 폐해(?)를 온몸으로 숙지하며 철학을 인식론과 논리학의 영역에만 성급하게 위치시켜 놓고,
맘편히 영적인 서적만 탐독하며 보이지 않는 다수의 까뜨린느를 육성한 시간들이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삶의 배열과 순서가 어쩌면 이리도 영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체의 해석학> 멋있습니다.
어쨌든 1강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게 없는데, 우리 삼월님, 알차게 잘 정리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아라차 님 칭찬, 맛 들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 맛에 발제하죠. ㅎㅎㅎ
뭣보다 텍스트를 이리 사랑해주시니, 세미나에는 그보다 큰 선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