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주체의 해석학> 0324 후기 +8
유택
/ 2017-03-25
/ 조회 2,092
관련링크
본문
세미나원 각자가 각기 다른 이유로 <주체의 해석학>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여튼 푸코의 원래 강의 제목은 ‘사유체계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주체의 해석학>도 딱 정해지고 주어진 주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푸코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시작합니다. 주체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자기의 테크놀로지(기술)에 의해 고안되고 구축되는 것입니다. 해석해야 할 비밀의 베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창조/변형해야 할 작품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푸코가 항상 관심 있어 하는 것은 구성되고 산출되는 진실 생산 그리고 왜 그 진리가/진실이 그 시대에 진리/진실로 등극했는지, 진실진술체계를 궁금해 하는 것과 같이 말이지요.
고샘의 책 ‘나는 나를 기다린다’도 자기 변형을 이야기 했지요. 주체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자기 변형을 감당해야 한다는데요. 그것은 사유하거나 말하는 바를 행하는 것에 많은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겠다는 말이겠지요.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이겠네요. 사실 오늘날 우리는 진실된 주체이기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바에 대해 말하고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제발 묻지 마시랍니다. 너는 뭔가 주체라고 이름 붙어질 만한 알맹이 같은 것을 전제한 소위 ‘너’를 모른다. 왜냐? 너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는 그러한 주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인식’의 문제 보다는 ‘자기 배려’를 통한 주체의 구축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이 완전히 대립적인 것만은 아닙니다.(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자기 배려’도 ‘자기 인식’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외연이 더 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푸코의 ‘실존의 미학’이 언급될 때 세미나원 모두가 감탄했습니다.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을 들먹이며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완전한 주체/삶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다듬어야 한다. 자기 기술로서! 인식을 통해 다다르는게 아니라 자기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여 가꾸고 구축하고 깎아내라.
제발 타자 해방에만 골몰하지 말고 니 자신의 해방에 골몰해라. 이것은 이번 책 역자 서문의 골자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적/정치적 목표들에 환멸을 느껴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로 퇴각해 어쩔 수 없이 개인 생활의 세심한 연출을 통해 해결책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푸코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가 시도한 자기 테크닉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동성애자/여성/소수민등을 위한 새로운 형식의 투쟁을 명확히 현시하고 또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합니다.
A: 왜에엥~? 내 진실이야! 상관하지마 넌 네 진실이나 챙겨.
B: 고랭? 진실을 언급한다는건 자기 자신(주체)을 다 걸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하는 위험/변형을 감당해야 하는건데..
농담으로 한 소리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집니다. 내 진실은 나만 압니다. 물론 어거지 진실이면 안되겠지만 말이지요. 박그네나 순시리 트럼프처럼! ㅎㅎㅎ 삶의 조건이 다르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삶의 편린들이 다르니 각자의 진실 또한 다르겠지만,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중요한 건 내 진실을 강변하는 문제가 아니지요. 최소한 나에게는! 푸코의 이 책을 끝까지 함 따라가보는 것. 관통하는 것! 그래서 푸코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파악해 보는 것! 그런 연후에 또다시 내 진실을 찾는데 쓰임이 될만한 것들을 건져내는 것이 되겠습니다.
1982년 1월 6일 강의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합니다. 제발 너 자신을 알라. Who am I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자기 배려/자기 돌봄. 자기를 포기하고 어딘가에 복종하여 무언가 안정을 찾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재산/명성 등등 많은 것들에 대해 인생을 통 털어 배려를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여기서 살짝 웃기긴 한데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데 ‘자기 자신’이라고 푸코가 말하는 이 ‘자기 자신’.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나라는 자기 조차도 타인/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할 수 있잖아요. 구성되고 유동되는 내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어떻게 못박나요? 뭔가 좀 이상하긴 하네요. 세미나 시간에 질문은 못했지만.
‘자기 배려’ 이야기 하면서 이것만은 숙지하고 넘어가자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53페이지에서요.
첫째,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의 문제
둘째, 시선의 문제. 자신의 시선을 변화시킬 것.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 여기서 훈련과 명상이 나옵니다.
셋째, 실천의 문제. 자기 자신으로 주의를 돌리는 차원만이 아니라 ‘자기변형의 행위/실천/테크닉’까지 고려하겠다는 것입니다.
‘영성’ 개념도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포섭되어 버리는 바람에 지금 우리가 ‘영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살짝 종교적인 느낌을 갖게 하잖아요. 실은 그게 아니라고 하네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심지어 푸코가 정의하는 철학이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 하는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선우님이 좋아하는 진실진술체계를 따져보겠다는 것이지요.
에로스와 자기수련. 진실이 가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두 주요 형식입니다. 주체의 개심이나 변형 없이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성과 신학. 영성과 과학간의 분쟁이 아니라 12세기 내내 영성과 신학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성이 신학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요.
이번 강의 이후 부터 푸코는 세 시기를 다룰 거라고 합니다.
첫째, 철학적 성찰에서 자기 배려가 출현하는 시기인 소크라테스-플라톤 시기
둘째, 기원후 1~2세기에 위치시킬 수 있는 자기 양성과 자기 배려의 황금기
셋째, 고대 이교문명의 철학적 자기 수련으로부터 기독교 금욕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인 4~5세기.
한참 ‘알키바아데스’ 이야기가 나오고 1강이 끝납니다. 다음 강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됩니다. <주체의 해석학>를 두 번씩이나 읽고 있다는 ‘누구’(뉴규~~~??)를 보면 감히 긍정도 부정도 할 순 없겠더라고요. 그 본인이 자꾸 ‘진실과 주체’ 논의의 전문가인냥 짹짹대며(사실 생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인데) ‘나를 보시라 자기 변형되지 않았느냐’, ‘이것이 자기 배려다’, ‘행복의 기술이 아니라 내 기술(자기의 테크놀로지)이야’ 등등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자꾸 하는 걸로 봐서 <주체의 해석학>에 뭔가 들어 있는게 있는가 봅니다. ㅋㅋㅋ 노다지 캐는 마음으로 다시 걸어 들어갑니다. 푸코 세미나 첫 책 <비정상인들>에 들어가는 그때 그 심정으루다가.. 내 진실을 구축하러! 총총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서문의 그 부분, 실존의 미학 나오는 부분 정말 압권이었어요.
"고대의 윤리적 주체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히려 '나는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였다.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푸코는 지배적인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적 테크닉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오이디푸스적인 탐색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 한다."
마지막 문장은 정확히 들뢰즈의 작업과도 일치합니다. <<앙티오이디푸스>>, 무려 600페이지도 넘는 책을 써가면서까지
오이디푸스적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호소했으니까요. 오이디푸스라는 적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79쪽. 너 자신을 돌보라 에서 그럼 이 너 자신,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의 대답입니다. " 이 문제는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왜냐하면 이 용어는
그리스 텍스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주체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입니다."
유택님, 정신의학의 권력에서 우리가 읽었던 것 기억하지요.
'개인'이라는 것, 그리고 '보편적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축된 관념이라는 것요.
지난 번 맑스도 공동체의 해체로 말미암아 '개인'과 '사회'가 생겼다고 했고요.
지금, 이 자기, 자신은 그런 개인, 인간으로서의 나, 뭐 그런 말이 아니라 그냥 '주체'인 나인 셈이어요. 전 그렇게
생각됩니다. 더불어, 나는 의사다. 나는 주부다 하는 그 언표주체인 나, 정체성의 나도 아니고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나는 누구인가 제발 묻지 마시랍니다." ㅎㅎㅎ
이거 맨날 유택이 후기 마지막에 푸코의 말 삽입하는 그거잖아요. 영어로 된거.
정체성에 매이지 말라는 것, 이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오이디푸스적 자기를 찾고, 경제적 주체로서의 자신 만을
확인하는 것, 이거 좋지 않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자기 인식을 통해 시행되는 진실 접근과 자기 배려를 통해 접근되는 것의 분리는
과학과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과 영성의 문제라는 점 또한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자칫 간과할 뻔 했는데요. 그래서 신학분야에선 이 영성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해서 '영성신학'분과가 있습니다.
보통 신학하면 합리적 성찰, 보편적 인식주체의 원리를 기초하는 조직신학을 말하는 것이고요.
푸코가 말하는 영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과 일치합니다.^^
사랑과 수련에 의한 자기 변형으로 진실에 접근가능하다는 것. 예수를 사랑하고 그를 닮도록 자기를 수련하는 것, 그리할때에만
예수(진실, 진리)를 만난다는 것. 영성이 무슨 신비로운 영적 경험이 아니라는 것.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말한다는 것.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자기 인식의 주체 문제가 사실 만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과 글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 내면으로 내면으로 파고 파고 들어가서까지라도 만나려고 한다는 것.
이런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더 잘 표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읽고, 읽고, 또 읽고 한다는 것...
읽는 것,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실은 '삶'을 조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서문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입니다.
말과 글, 그리고 예술은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
선우님의 댓글
선우
함께 하면 좋겠지만, 제 체력이 달려 이 영성충만한 책을 ㅎㅎ 함께 읽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혼자서라도 진도 맞추어 따라 가 볼께요.
유택이 이렇게 후기 올려주어, 저도 수다 좀 떨었더니, 세미나 한 기분입니다. ㅋㅋㅋ
고마와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선우님 생각하며 후기 작성했습니다.
읽고 코멘트 달아줄거라 예상했었습니다. ^^
개인의 탄생. 그거 알고 있었는데 아직 내겐 장착이 되지 않았나봐요.
그냥 읽고 안다는것과 진짜로 내 몸으로 흡수해서 절감하는것은 천지차이라는 것.
맑스 보다 훨씬 푸코에 집중하는 1학기가 될 것 같습니다.
맑스는 제게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고샘 강의가 있으니 어거지로 따라가는 기분이고요.
푸코는 정말 내겐 큰 공부입니다.
이래서 삼월이가 작년부터 주구장창 귀에 앵이 박힐 정도로
나보고 강의 작작 듣고 니 공부 니 세미나 하라 한건가봐요 ㅎㅎㅎ
걷는이님과 선우님이 빠진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지만
전 필 받으면 즉각적으로 앞으로 쭈욱 셀프 후기 적어댈려구요.
내 진실이야! 내 공부야! ㅋㅋㅋ
삼월님의 댓글
삼월
후기쓸 사람은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여기서 세미나가 다시 펼쳐진 기분이네요.ㅎㅎ
유택님 맥락 정리하는 기술이 날로 늘어,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몇 마디 더 짹짹거려보자면, (전문가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는 그 바로 밑에 있는 자기 배려가 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배려 첫 번째 개념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인데,
이 태도에서는 자기와 타인, 그리고 세계가 맺는 관계를 파악하는 게 문제입니다.
'나라는 자기조차도 타인/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는 유택님 이야기와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맥락인데 자꾸 뭔가 턱턱 걸리는 걸 보면,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거부감(누가 짹짹...거려서 그런가요?)이 내부에서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2번으로 넘어가, 시선을 변화시켜 보시지요. 뭐가 턱턱 걸리는지.
저도 함께 해보겠습니다. 대신 에로스의 동료애는 비난과 막말로 생겨나지는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