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 <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관하여> 후기 +4
namu
/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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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관하여> 후기
지난 주 금요일, [천의 고원] 열네 번째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다른 날보다 간략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차고) 넘쳤었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이 발표된 날이었으니까요. 우리 회원들은 11시 경부터 스마트폰에 모두 펭귄처럼 귀를 쫑긋 모으고 있었더랬습니다. 이정미 권한대행이 “그러나”를 연발하는 순간마다 가슴속 심장 기어가 덜컹, 덜커덩 한 계단씩 내리 주저앉는 바람에 10년 감수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정적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제 2의 광복을 맞은 듯 만세를 외쳤습니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에 내처 세미나를 작파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기어코 오늘의 고원을 등정할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 도중 이렇게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스마트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아마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실험자들] 2017년 10일 오전 11시 21분,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또 하나의 고원을 돌이켜 볼 때마다 우리 회원네분들은 서로를 기억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지 않을까요.
세미나에서는 주로 예술에서 나타나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모던이라는 3종류의 음향적 배치에 대해 논했는데요. 이렇게 저자들이 음향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일련의 되기(여성-되기, 어린이-되기, 동물-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에서 원소-화와 우주-화라는 두 개의 영역으로 동시에 열리는 일종의 탈영토화와 결부된 것으로써 음악-되기가 가장 높은 탈영토화 계수를 갖기 때문이지요. 세미나 시간에 중점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한두 가지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낭만주의(19c)’와 ‘모던(20c)’의 음향적 배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낭만주의는 대지와 영토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배치를 형성하는데요. 예술가는 창조주(고전주의 배치 경우)이길 포기하고 영토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며, 토대를 정초하는 인물이 됩니다. 신이 아니라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영웅이 낭만주의적 배치에 고유한 것이라지요. 그런데 저자들은 낭만주의에 결여된 것은 민중이라고 말하며, 영웅조차 민중의 영웅이 아니라 대지의 영웅이라고 하지요. 지그프리트를 예로 들고 있는데요. 바그너의 4부작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는 대지의 심연에서 지그프리트가 보물을 되찾아온다는 내용이 들어 있답니다. 한편 제 1부 ‘라인의 황금’은 지하의 대지적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고요. 여기서 대지란 영토와는 딴판인 것으로서 아주 깊숙이 영토들을 빨아들이고 영토의 근저에 있는 강밀한 중심이랍니다.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와는 달리 라틴계나 슬라브계는 대지적인 힘조차 민중을 통과하고 민중을 매개한다고 하는데요. 즉 대지로의 영토화가 아니라 민중으로의 영토화가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나부코>에서 탈주하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나 <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대장간의 합창을 예로 들 수 있지요.
“이 경우 영웅은 대지의 영웅이 아니라 민중의 영웅이다. 그는 하나인-모든 것(l'Un-Tout)이 아니라 하나인-군중(l'Un-Foule)과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든 다소 간에 민족주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란 모든 곳에서 낭만주의의 형상을 취하는데, 이는 때로는 동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검은 구멍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독일의] 나치즘이 바그너를 이용한 것에 비해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베르디를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120쪽
‘모던’의 음향적 배치는 존 케이즈의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를 이용한 작품과 에드가 바레즈의 <이온화>를 예를 들어 비교하였는데요. 여기서 쟁점은 ‘탈영토성’이란 개념이었지요. 전자의 경우 ‘소나타와 간주곡 Sonatas and interludes’이란 곡이 있답니다. 이 작품은 현에다가 약음기, 금속(못),고무(지우개) 등을 끼워서 인도네시아 전통악기인 가믈란이나 여러 타악기 음색을 결합한 피아노랍니다.
후자의 경우, 바레즈는 사이렌 소리, 썰매방울소리, 막대 두들기는 소리 등을 관현악적 소리에 섞는다는군요. 중요한 것은 원래의 소리들을 탈영토화하여 탈영토화한 그 소리와 관현악기의 소리를 섞어서 음의 입자를 ‘이온(ion)화’ 하려고 했다는 점이지요.
제가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이 곡을 들어봤는데요(세미나 시간에도 함께 들어봤는데, 토라진 님께선 대단 만족하신 듯). 저는 거기에서 사이렌 소리나 방울 소리를 분간하려고 눈을 감고 온몸이 토깽이귀가 될 정도로 귀를 곤두세웠지요. 사실 그 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는데요. 이게 참 멍청한 짓이었단 걸 세미나를 통해 알았지요. 만일 사이렌 소릴 들었다면 그건 사이렌 소리가 충분히 탈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얘기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어떤 대지나 영토로부터도 벗어난, 영토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주를 향해 열리는 음악이었고, 절대적 탈영토를 향한 음악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원래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존 케이지의 음악은 충분히 탈영토화가 안된 것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우주를 향한 절대적 탈영토화된 음악으로선 미진했던가 봅니다.
바레즈(E. Varèse)의 음악과 관련된 대목입니다.
“일관성의 음악적 기계,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가 아니라) 소리 기계(machine à sons)로서, 음향적 질료를 분자화하고 원자화하며 이온화하며, 우주의 에너지를 포착한다.(---)신디사이저는 일관성을 만드는 자신의 작용과 더불어 선험적 종합판단에서 토대의 위치를 갖는다. 거기서 종합은 분자에 관한 것이고 우주에 관한 것이며 소재, 힘에 관한 것이지, 형식과 질료, 땅(Grund)과 영토에 관한 것은 아니다.” 123쪽
참고로 배치와 일관성에 대한 다음의 문장을 통해 우주를 향한 절대적 탈영토화란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치와 관련해 일관성 개념은 두 가지 상이한 수위에서 사용된다. 하나는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배치가 되게 묶어주는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치를 이루는 요소들이 그 배치의 일부가 되기 위해 탈영토화하는 것을 통해, 나아가 어떤 배치도 될 수 있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이르는 것으로 정의 된다. 전자가 상대적 탈영토화와 결부되어 있다면, 후자는 절대적 탈영토화와 결부되어 있다.” (이진경 <<노마디즘>>에서)
마지막으로 이번 고원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모아봤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못하고는 둘째치고요.
예술(Art)
영토는 예술의 효과다. 예술가란 경계석을 세우거나 표지를 만드는 최초의 사람이다. 소유(propriété)란,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거기서 연원한다. 그것이 전쟁이나 억압을 위한 것인 경우라도 말이다. 소유는 우선 예술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우선 포스터요 플래카드기 때문이다.
예술과 우주 그리고 민중
클레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지로부터 날아오르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을 하며,” “중력을 이기기 위해 원심력의 영향권 아래서 대지 위에 선다.” 그는 추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주위를 응시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이는 창조된 것 안에서 창조의 흔적을, 만들어진 자연[소산적 자연] 안에서 만들어내는 자연[능산적 자연]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예술가는 이 세계가 상이한 측면을 가지며, 또 다른 측면을 가질 것이라고, 그리고 다른 행성에서라면 이미 다른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예술가는 하나의 ‘작품’ 안에 이 힘들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우주를 향해 개방하는데(그러한 작품이 없다면 우주로의 개방은 대지의 한계를 확장할 수 없는 꿈에 불과할 것이다), 이러한 개방을 위해서는 거의 어린애 것과 같은 매우 소박하고 매우 단순한 수단이 필요하며, 또한 민중(un peuple)의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아직도 결여된 것이다. “이 마지막 힘이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민중의 지지를 추구한다. 우리는 바우하우스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다.”(116-117쪽)
소재-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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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님의 댓글
namu
소재-힘
클레: 가시적인 것(le visible)을 되돌려주거나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하는 것(rendre visible)[이 문제].
밀레: 그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농민들이 실어나르는 것―예컨대 그것이 성물(聖物)이든 한 자루의 감자든 간에―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정확한 무게다. 이것이 후기 낭만주의적 전환점이다. 즉 본질적인 것은 형식과 질료에 있는 것도, 주제에 있는 것도 아니며, 힘과 밀도, 강렬도에 있는 것이다.
드뷔시: 음악은 음향적 질료를 분자화하며, 비음향적인 힘들을 지속(Durée), 강렬도(Intensité)로 포착할 수 있게 한다. (122쪽)
우주적 장인(artisan)
모던한 형상은 어린이나 광인이 아니며, 예술가(artiste)의 그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장인(artisan)의 형상이다. (125쪽)
시인과 암살자
비릴리오가 군집의 탈군집화(dépopualation) 및 대지의 탈영토화에 대한 엄격한 분석에서 말했듯이 문제는 “시인으로 살 것인가, 암살자로 살 것인가?”하는 것이다.
암살자란 모든 배치를 끊임없이 폐쇄하고 점점더 넓고 깊어지는 검은 구멍 속으로 기존의 민중을 밀고가는 분자적 군집들로써 그들을 폭격하는 자다. 반대로 시인이란 분자적 군집들을, 그들이 도래할 민중의 씨를 뿌리고 나아가 그들을 발생시키리라는 희망, 그들이 도래한 민중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 그들이 우주를 개방하리라는 희망 속으로 풀어놓는 자다. (125쪽)
리토르넬로: 시간의 선험적 형식
선혐적 형식으로서 시간(le Temps)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토르넬로는 시간의 선험적 형식이며, 언제나 상이한 시간들을 만들어낸다. (129쪽)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지난 세미나에서는 박근혜의 탄핵에 비견될 만한 에피소드가 있었지요.
'암살자가 누구인가?'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쁜 사람이요!'라는 나무님의 대답에 세미나전체가 빵! 터졌지요.
그 대답이 우리를 그토록 유쾌하게 했던 것은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각이지요.
모두가 함께 웃고 같은 신체가 되었던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천의 고원>세미나의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예요 ~~!! ^.^
선우님의 댓글
선우
맑스 숙제하다 들렀는데, 이렇게 반가운 후기가 올라와 있네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며, 무슨 이야기들을 하셨을까 궁금해하며 있었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나무님~
사실 쓰지 않아도 그만일 수 있는데(특히 우리 셈나처럼 반장님이 별 신경 안쓰시는 것 같을 땐 ㅎㅎ)
자신과의 약속, 팀원들과의 약속 , 실제로 지켜내시는 모습~ 멋있습니다.^^
이번 주는 간만에 좀 쉬시고요, 다음 주 건강한 모습으로 봬요~
namu님의 댓글
namu
선우님의 전체를 위한 모습 아릅답습니다. 당신이 종교고 미고 진리라고
함부로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