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인간적인1> 종교적 삶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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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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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자와 성자들은 삶을 아직은 견딜만하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적인 적’과 가끔씩 전쟁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의 삶을 부단한 전쟁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선한 정신과 악한 정신이 승리를 위해 교대로 싸우는 전쟁터로 간주하기 위해서 그의 허영심, 명예욕, 지배욕과 같은 감성적 욕구들을 모두 활용한다. 이 투쟁을 통해 그들의 황폐한 삶은 즐겁게 유지된다. 그러나 이 전쟁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참여와 감탄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게 보이려면, 감성이 더 많이 이단시되고 나쁜 것으로 낙인찍혀야만 했다. 성자가 아닌 자들에게 자신들을 거의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새롭게 표현해줄 보편적으로 인정된 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욕망과 안정된 마음의 변화가 그런 것처럼 오만과 겸손의 저울판이 상하로 동요하는 것은 골똘해 있는 그들의 머리에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가능한 자신을 나쁘고 사악하게 보기를 원했다.그리스도교 원전에 있는 개개의 도덕적 주장을 점검해보면 여기저기서 인간이 충족시킬 수 없는 갖가지 요구들이 과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도는 인간이 더욱 도덕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을 가능한 죄 많은 자로 생각하는 데 있다. 만약 인간에게 이 감정이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와 같은 표상을 만들어내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것에 집착해왔는가? 인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을 죄 많은 존재로 느껴야 했고, 그럼으로써 자극되고 활기를 얻고, 고무되기도 했다. 여하튼 자극되고 활기를 얻고 고무되는 일—이것은 쇠약해지고 너무 성숙된 그리고 너무 문명화된 시대의 표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