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근대철학] 니체와 철학 :: 0817(금) 후기 +2
namu
/ 2018-08-22
/ 조회 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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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근대철학] 니체와 철학 :: 0817(금) 후기
니체의 ‘관점주의’란 무엇인가?
니체는 어디선가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다만 관점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인식된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관점주의로 이해할 수 있을 터이지요. 푸코의 텍스트(<<니체, 계보학, 역사>>15쪽)에서는 역사학과 관련하여 관점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진정한 역사학은 또한 전통적 역사가 형이상학에 의존하여 근친성과 거리 사이에 확립했던 관계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 전통적 역사학은 사실 먼 것들과 높은 곳들, 이를테면 가장 숭고한 시기라든가, 최고의 형식, 가장 추상적인 관념들이라든가 가장 순수한 개체에 대한 사고에 시선을 향한다. 전통적 역사학은 가능한 한 그것들에 접근함으로써 이를 완수한다. 즉 저 유명한 개구리식의 관점을 적용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저 스스로를 신등성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반면 진정한 역사학은 자신의 시야를 자신에게 가장 근접한 것들-육체, 신경 체계, 영양섭취, 소화, 에너지-로 축소한다. (----) 진정한 역사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해되는 한 내려다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 진정한 역사학은 위로부터 조망하고 하강하면서 다양한 전망들을 파악하고 분산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사물들은 그것들의 고유한 영역과 강도 속에 흐트러짐 없이 남겨놓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한 말이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전통적(형이상학적) 역사학은 산등성이에 자리하여 위를 바라보는 개구리식의 관점(편협한 하나의 시각)으로, 진정한 역사학(계보학)은 독수리의 눈처럼 위에서 아래를 조망함으로써 다양한 전망들을 파악하여 분산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대립적인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에서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관중처럼 계단식 객석에서 무대를 전망하는 관점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관점주의는 니체의 여러 텍스트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합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도덕의 계보>> 제 3논문(금욕주의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2절에 보입니다.
“오직 관점주의적으로 보는 것만이, 오직 관점주의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 우리가 한 사태에 대해 좀더 많은 정서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가 그와 같은 사태에 대해 좀더 많은 눈이나 다양한 눈을 맞추면 맞출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객관성’은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제 3논문12절]
니체의 관점주의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점은 그 개념이 ‘절대주의’, ‘상대주의’,‘객관주의’ 등과의 연관성 여부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의 눈’만이 필요한 ‘절대적 진리’의 추구는 당연이 반박됩니다. 이는 제반 형이상학적 진리(플라톤의 최고선, 기독교의 신 etc)에 대한 거부일 터입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지요. 이때 ‘인간’은 인류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저마다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절대적 지식(진리)에 대한 부정이자 상대적 진리를 주창했다고 말하는 데요. 사실 진리가 저마다 다르다는 말은 진리는 없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지요. 니체는 이런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자기 나름의 객관성(객관주의)을 전제하는 듯합니다. 이는 철저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로 어느 한 사태를 바라보는 학자(과학자)의 가치중립적인 태도와는 다릅니다. 사물과 세계의 객관적인 이해를 위해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한번 달리 보는 것, 달리 보고자 의욕하는 것은 지성이 미래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적잖은 훈련이요 준비”라고 말하면서, 객관성을 ‘무관심한 직관’이 아니라 ‘지성의 찬반’을 제어하고 지성을 ‘떼었다 붙일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오직 관점주의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정서와 의지를 지성에서 분리하지 않고 사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보려고 할수록 의미의 객관성이 확보되고 의미의 이해는 완벽해질 것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니체의 관점주의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절대적 진리(형이상학)는 진리를 하나의 고정된 시점(원근법)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랄 수 있는데요. 이는 진리를 바라보는 유일한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고 우리를 현혹함으로써 (신화에 불과한) ‘절대적 진리’와 ‘객관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깁니다. 반면, 니체의 진리에 대한 관점은 조각상을 감상하는 방법에 더욱 합당할 듯합니다. 조각상을 감상하는 단 하나의 이상적인 관점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조각상 주위를 돌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감상했을 때 그 상에 대한 더욱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 말로 “좀더 많은 정서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좀더 많은 눈이나 다양한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객관성’은 더욱 완벽해질” 터입니다.
사실 <<도덕의 계보>> 제 3논문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니체 철학의 방법론인 계보학 및 관점주의를 철저히 응용한 구체적인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논문 초반부에서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으면서 서로 다른 시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합니다. 가령, 예술가들(바그너), 철학자나 학자들, 심지어 여성들, 생리적인 실패자나 부조화자들(대다수 인간들), 성직자들, 현자들에게서 말이지요. 성직자들에게는
댓글목록
namu님의 댓글
namu
(끊겨서 여기에 첨부합니다.)
성직자들에게는 “권력의 최상의 도구”이자 “최고의 ‘면허’”라 하고, 성자에게는 “가장 최후의 영예욕”이자 “허무(신) 속에서 안식”이고, “착란의 형식”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개념을 니체는 다각도(여러 관점)로 조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기독교 사제의 금욕주의적 이상입니다. 인류의 보편적 상황(2000년 동안의 서양)이란 인간이란 ‘병든 동물’이지만,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가 없는 것인데요. 즉 ‘고통의 무의미’가 저주라 할 것인데, 기독교는 인류의 “고통을 죄”라는 관점 아래 해석함으로써 인류에 하나의 의미, 목표(피안에서의 구원)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 논문은 그 유명한 “인간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28절)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마무리하자면,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자체는 일종의 니힐리즘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은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28절)(이 모든 내용에 대한 검토가 제 3논문의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니체는 이 구절을 제 3논문에서 두 번 반복하고 있는데, 저도 따라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생에 대한 관점은 무엇일까요? “인간과 대지와 육체를 향한 의지”라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써 인간을 고양시키고 가치를 생성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반면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퇴행(퇴화, 데카당스)시키는 약자들의 삶의 해석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관점주의의 최고 심급은 그 의지가 인류를 병들게 만들고 나약하게 만드는 나약한 노예들의 관점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인류를 고양시키고 가치 생산적인 건전하고 건강한 주인의지의 관점이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지금까지 제가 이해한 니체의 ‘관점주의’를 영 서투르게나마 정리해 본 것입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세미나를 통해 수정 보완되기를 무척 고대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니체, 계보학, 역사>> 영문 텍스트
https://noehernandezcortez.files.wordpress.com/2011/04/nietzsche-genealogy-history.pdf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잘 읽었습니다 나무 님.
발제도 넘 훌륭하셨는데, 이렇게 후기까지...^^ (안 쓰실 줄 알았어요...)
솔릭 덕분에 니체와 철학이 한 주 연기됐지만, 또 그만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네요.
들뢰즈 셈나가 나무님의 열정과 꾸준함으로 '한 번 더'를 계속 불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