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꽃테문학 (서언 ~ 소품문의 생기) 발제: 20180912
삼월
/ 20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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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망각
《꽃테문학》 서언 ~ 소품문의 생기
말년의 루쉰은 여전히 외롭다. 집요하게 자기 길을 가는 이에게 걸맞은 외로움이다. 루쉰에게는 속한 진영이 없다. 루쉰이 보기에는 ‘자기 것’을 가진다는 게 오히려 억지스럽다. <양복의 몰락>에서처럼 만주족의 옷도, 양복도 전부 외국의 옷이라 할 때, 도대체 무엇이 중국의 옷이고, ‘자기 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적을 상정하고 적의 외부를 ‘나’로 규정할 때, 루쉰은 의심하며 묻는다. 그 ‘나’가 정말 ‘나’인 게 맞는가. 중국이라는 세계의 지배자는 쉴 새 없이 바뀌어 왔는데도, 중국인들이 무엇인가를 쉽게 ‘자기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무작정 우겨댈 수는 있겠지만, 이는 진지한 선언이 아니라 루쉰의 표현대로 광대가 무게를 잡고 헤이터우 흉내를 내는 천하의 코미디이다.
유머가 되지 못하는 코미디는 때로 비극과 맞먹을 비장함을 띤다. <운명>이라는 글에서 루쉰은 운명에 대한 안분安分을 국민통제수단으로 삼는 정부를 비난한다. <법회와 가극>에서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찮은 존재라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은 부처의 설법을 듣거나, 성묘를 하며 무사함을 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마음을 먹지 못하게 된다. <옛사람은 결코 순박하지 않았다>에서는 옛 문헌들이 필요에 의해 국민들을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루쉰이 꼼꼼하게 뒤져 본 고문헌 속 옛사람들은 순박하지 않았으며, 집권자를 질책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누군가의 엄선을 거쳐 만들어진 옛사람들의 순박함이 당시 중국인들에게 순박함을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일에 루쉰은 개탄한다.
서양의 문화에 반대하며 중국의 고문을 되살리자는 주장은 청년들로부터도 나온다. 고문을 공부했으나 백화를 주장하는 루쉰은 이런 청년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 청년들에게 루쉰은 ‘매국노’이고, 자기 명성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이 책의 제목 《꽃테문학》에는 청년들로부터 받은 공격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청년들과의 싸움은 루쉰이 겪어온 지난 싸움들과는 달랐다. 싸움은 루쉰을 돌아보게 했다. 한때 전사였던 루쉰은 어느새 노예가 되었다. 루쉰은 자신이 노예라고 순순히 인정한다. 글을 그만 쓰고 싶기도 했으나, 누더기가 될 정도의 검열과 삭제를 당하고서도 구차하게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쓴 글이 노예의 글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루쉰은 묻는다. 태어날 때부터 중화민국의 주인이었던 청년들과 달리 청조 말에 태어난 자신을 루쉰은 노예 출신이라고 말한다.
비꼼도 울분도 느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으며, 지금도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에 대해 말할 때, 루쉰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현실과 그 안의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사실을 알아야 노예의 신분을 떨칠 수 있다. 스스로가 영웅인 줄 알고 남에게 분발과 비분강개와 기념만을 열렬히 호소하는 노예는 영원히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비분강개하고 모든 것을 멸시하는 웃음 속에서 휴식과 즐거움을 취하는지 그들은 모른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믿으며, 그들은 분발과 비분강개, 거기에 휴식과 즐거움까지 잊어버렸다. 노예의 망각에서 깨어난 루쉰이 그들을 향해 자신은 노예라고 당당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