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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2 발제문 +1
하파타 / 2017-03-04 / 조회 1,857 

본문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2

 

 70. 사형수는 다른 사람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된다. 죄가 있다고 해도 죄가 처벌되는 것은 아니다.
 71. 희망은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인간이 다른 심한 재앙에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72. 선과 악에서 저급한 인간과 더 고상한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보통 체험의 양이 아니라 체험의 질이다. 여러 가지 상황, 동정, 격분 등이 자신을 어디로 몰고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자신이 얼마나 흥분하게 될지 모른다.
 73. 동지들의 악평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가련하고 무력한 영혼을 가진 자)는 동지들의 말과 시선의 압력 속에서 본의와는 전혀 무관한 선택들로 한 사람의 영웅, 그리고 마침내는 위대한 순교자가 된다.
 74. 극단적 행위는 허영, 평범한 행위는 습관, 소인배적인 행위는 공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75. 덕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따라서 덕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76. 금욕자는 덕에서 고난을 만들어낸다.
 77. 인간의 존경심은 물질적인 것으로 전이된다. 
 78. 도덕적 감정은 아무런 명예심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명예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도덕적 감정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79. 인간의 정신 활동의 동력으로써 허영심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80. 자신의 힘이 쇠퇴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노인이 서서히 진행되는 고갈과 해체를 기다리는 것이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목적을 추구하는 것보다 명예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 경우 자살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이며, 이성의 승리로써 당연히 외경심을 불러일으킬 일이다.
 종교는 자살의 요구에 대해 핑곗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을 통하여 종교는 삶에 반해버린 사람들에게 아부한다.
 81.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하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측정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기준과 피해자의 기준은 서로 다르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에 대한 감정과 사상들은 해석자에 따라 달라진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과 고통당하는 괴로움은 같지 않다.
 82. 허영심은 영혼의 피부이다.
 83. 만약 덕이 잠을 잔다면, 한층 더 원기왕성하게 일어날 것이다.
 84.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정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 부끄러워한다.
 85. 대부분의 사람은 악하게 되기에는 너무나도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다.
 86. 우리들의 판단력을 빛나게 할 기회가 얼마나 주어지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87.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 -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14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88. 우리에게 어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있지만, 그의 죽음을 앗아갈 권리는 없다. 이는 단지 잔인함일 뿐이다.
 89. 우리에게 사람들의 좋은 평이 중요한 이유는 먼저 그 좋은 평이 우리에게 이로우며, 다음은 우리가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득이나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는 마음은 제외한 채 사람들의 좋은 평만이 중요시되는 경우 우리는 이것을 허영심이라 말한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만 실은 이웃의 희생을 요구할 뿐이다. 이때 인간은 자신에 관한 잘못된 의견을 가지도록 이웃 사람을 현혹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임이 틀림없을(질투심이 자극됨으로써) ‘좋은 평’을 목표로 한다.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권위에 대한 강한 습관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자기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권위를 통해 지탱할 수 있을 때까지 강요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이러한 욕구는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그리고 너무 높은 평가를 내리도록 현혹하며, 결국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장점조차도 등한시하게 된다.
 90. 다른 사람을 바보, 나쁜 녀석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은 , 만약 그 사람이 결국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이면 화를 낸다.
 91.도덕성은 얼마나 많은 만족을 가져오는가. 그러나 이러한 만족은 완전한 무책임에 대한 믿음이 우세해진다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92. 거의 동등한 권력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서로에게 손해만 초래할 경우에는 합의를 통해 서로의 요구를 협상하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의의 최초의 성격은 거래의 성격이다. 정의는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적 습관에 따라 소위 올바르고 정당한 행위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게 되었으므로, 공정한 행위가 점차 비이기적인 행위인 듯 보이는 겉모습이 형성된다. 그러나 공정한 행위를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겉모습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존중받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지속적으로 커져간다. 존중받는 것은 헌신적으로 추구되고 모방되며 복제되어, 이미 인정된 것들의 가치 위에 모든 개인의 수고와 노력의 가치가 다시 더해짐으로써 커져가기  때문이다.
 망각이 없었다면, 세계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보잘것없어 보일까!
 93. 권리란 원래 한 편이 다른 편보다 가치 있고, 중요하며, 버릴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 정도까지 통용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더 약한 자 역시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확보하고 있는 힘만큼의(정확히 말하자면, 확보하고 있다고 믿는 힘만큼의) 권리가 있다는 저 유명한 말이 성립한다.
 94. 지금까지의 도덕성의 세 단계
 1) 인간의 행위가 순간적인 안락이 아니라 영속적인 안락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래서 인간이 공리적이고 합목적적이 된다면, 그것은 동물이 인간이 되었다는 최초의 표시이다.
 2) 이성의 자유로운 지배력이 깨어 나고, 인간이 명예의 원리에 따라 행동할 때 좀더 높은 단계가 달성된다. 이는 오직 개인적인 이익이 그를 이끌었던 단계보다 더 높이 인간을 고양시킨다.
 3) 인간은 존경하고 또 존경받기를 원한다. 즉 인간은 이익이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지금까지의 도덕성의 최고 단계에서 사물과 인간에 대한 자신의 척도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 명예롭고 무엇이 유용한지 그 스스로 규정한다. 그는 더 높이 향상된 이익과 명예의 개념에 따르는 의견의 입법자가 된 것이다. 그는 집단적-개인으로 생활하고 행동하게 된다.
 95. 지금까지 사람들은 개인적 감점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을 도덕적 행위의 본래적인 특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철저히 개인적인 행위야말로 (보편적인 이익으로서의) 도덕성의 개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더 잘 통찰할 수 있다.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웃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자신의 이득이라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미숙하고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조잡한 개인은 그 이득 역시 가장 조잡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96.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힐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세대를 거치면 거칠수록 관습은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97. 사람들은 익숙해진 일을 더 쉽게 더 잘하며 더 즐겨한다. 그들은 그때 쾌감을 느끼며 습관화된 것은 그 무엇을 보증한다는 것, 즉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된다.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이미 보증된 삶의 지혜이다. 인간은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곧 자신의 인륜을 관철시키고 실행하기 위해 그 압력을 행사한다. 마찬가지로 개인으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인륜을 강요하는데, 바로 여기에 오류가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인륜 안에서 쾌감을 느끼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성취해나가는데, 사람들은 오직 강요된 인륜 안에서만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안락은 다른 인륜에서도 똑같이 성립될 수 있으며 훨씬 더 높은 정도까지 달성될 수 있다.
 어렵고 힘들고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에서조차 겉으로 나타나는 최고의 유익성 때문에 인륜은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인륜, 가장 힘든 인륜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편안하고 부드러워져서, 가장 엄격한 생활양식 역시 습관화되어 쾌감이 될 수 있다.
 98.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쾌감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쾌감을 추가로 얻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쾌감의 영역을 현저하게 더욱 확장시켜간다.
 공동의 기쁨, 즉 함께 즐겼던 쾌감은 쾌감을 한층 더 높여준다. 그것은 개인에게 자신감을 주고 선하게 만들며, 불신감과 질투심을 해소시킨다.
 쾌감을 같은 양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감정이란 동일한 어떤 것이라고 공감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의 고통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래서 흔히 그것을 기초로 가장 근본적인 동맹이 결성된다. 동맹의 의미는 모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위협적인 불쾌함을 공동으로 제거하고 방어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본능은 이처럼 쾌감에서 성장해 나온다.
 99.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개인이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는 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능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덕이라 불린다.
 100. ‘신비’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수치심이 존재한다.
 수치심은 처음에는 아주 공간적인 것이었다. 이 감정은 여러 가지 다른 관계로, 예를 들면 성적인 관계들로 옮겨갔다. 마찬가지로 내적 상태의 모든 세계, 소위 ‘영혼’도 무한한 시간을 통하여 신적 기원으로서 그리고 신적 교제로서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어온 후부터, 철학자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다. 따라서 영혼은 하나의 성소이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101.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금의 판단 기준이 그때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표상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02.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는 것’과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에)’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103. 악의의 목표는 그 대상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쾌감이다. 우리가 몰랐다면 책임이 없다고 느끼는 것과 관련지어 본다면, 악의적 행위는 주체가 대상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도덕적인 것이 되며, 악의에서의 주체의 쾌감은 대상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쾌감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쾌감 자체를 음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쾌감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오로지 이익의 관점에서, 즉 후에 따를지 모를 징벌이나 복수와 같이 불쾌감을 불러올 결과를 고려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악행을 저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악의의 목표가 다른 사람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정이 목적하는 것 또한 다른 사람의 쾌감은 아니다. 동정은 적어도 개인적 쾌감 그 자체의 두 가지(어쩌면 더 많은) 요소를 그 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형태로 자기만족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비극에서의 동정과 같은 종류인 감동의 쾌감이며, 다음은 동정이 행위를 충동할 경우, 힘을 행사할 때의 만족의 쾌감이다. 거기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까이 있으면, 우리는 동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고통을 덜고 있는 것이다.
 104. 정당방위가 보통 도덕적 행위라고 간주된다면, 소위 거의 모든 비도덕적 이기주의를 표명하는 데도 역시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국가의 처벌도 이런 관점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고 해를 가하는 경우에는 물론 비도덕적이란 것이 있을 수 없으며, 우연에 지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우리의 실존, 우리의 안락함을 유지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 곳에 의도적인 해를 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인한 행위를 할 때 순수한 악의에서 해를 가하는 일이 있을까? 행위의 도덕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고통을 주는지 완전히 알 수 있을까? 고통과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며, 어쨌든 우리는 소위 악의로 해를 가할 때 발생하는 고통의 정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행위 할 때 어떤 쾌감이 있는 한, 그 행위는 개인의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다. 쾌감이 없는 곳에는 삶도 없다. 쾌감을 위한 투쟁은 삶을 위한 투쟁이다. 개인이 이러한 투쟁을 사람들이 선이라고 부를지 악이라고 부를지의 문제는 그 개인의 지성의 정도와 천성이 결정할 것이다.
 105. 완전한 무책임에 대한 이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소위 처벌하고 보상하는 정의를 결코 정의의 개념 속에 더 이상 넣을 수 없을 것이다. 일어난 행위는 달리 일어날 수 없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벌당한 사람과 보상받은 사람은 그 자체로 책임과 자격이 없으며, 단지 그와 그 밖의 사람들의 앞으로의 행위에 대하여 경고와 격려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과 보상이 폐지된다면, 특정 행위를 멀리하게 하고 특정 행위를 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러한 동기가 필요하며, 또한 그 동기의 작동을 위해 허영심 또한 필요하다.
 106. 폭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수없이 굴절되며, 소용돌이치고 부서지는 물살에서 의지의 자유와 성향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필연적이며, 모든 운동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행위자의 자유의지는 환상인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107. 인식하는 자가 삼켜야만 하는 가장 쓴 물약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본질에 대해 완전히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만약 인식하는 자가 책임과 의무를 인간성의 특별 표창장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 있었던 경우라면 말이다. 그의 지난 모든 인식과 판단은 가치를 상실하고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다. 선한 행위와 나쁜 행위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개인의 유일한 욕망은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대로, 즉 행해야만 하는 대로 만족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욕망에 의해 어디까지 끌려가게 되는지는 판단 능력의 정도가 결정한다. 항상 모든 사회에 그리고 개인에게는 선의 위계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는 행위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척도는 끊임없이 변한다.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가 어리석다.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통찰하는 일은 심한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위안이 찾아온다. 그와 같은 고통들은 산고이다. 그 슬픔의 능력을 지닌 그런 인간들에게서, 인류가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최초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필연이다.
 만물은 흐름 속에 있다. 극복되어야 할 유전적인 습관들이 우리들 내부에서 끊임없이 지배할지라도, 그런 습관은 점점 자라나는 인식의 영향을 받아 점점 약화되어갈 것이다. 새로운 습관, 즉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미워하지 않고 달관하는 습관은 우리 속에서 조금씩 같은 땅을 경작하여, 수천 년 후에는 아마도 현명하고 죄 없는(무죄를 인식하는) 인간을 규칙적으로 산출해낼 힘을 인류에게 부여할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지금 인류가 현명하지 못하고 부당하며 죄의식을 가진 인간을(그들은 전자의 필연적인 예비 단계이지 반대가 아니다) 산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댓글목록

방향님의 댓글

방향

'자유의지'에 대한 나의 오해와 집착이 나와 타인에 대한 책임추궁수단으로 쓰인다..라..
이 오랜 습관은 지금도..아마도 앞으로도 바꿀수 없는 조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조금 두렵습니다. 가끔 내의지인지, 내생각인지, 내감정인지 모를 '전생에' '무슨죄를 지어서'라는 식의 뜬금없는 말이 입에서 나와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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