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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3] 최승자_상처받은 리얼리즘 +2
오라클 / 2017-03-05 / 조회 2,265 

본문

최승자(崔勝子​) :: 상처받은 리얼리즘

 

출생_1952년 국내 충청남도 연기

학력_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 학사

데뷔_1979.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외 4편으로 등단

 

최승자의 시는 삶에 대한 절망의 언어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 그 자체로의 깊은 함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하여 더욱 강한 삶의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를 담고 있다.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는 이 시대가 파괴해 버린 삶의 의미를 천착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이 호소는 하나의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자유로움을 위한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서는 극한적인 상황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삶의 비극성을 그려낸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세계 전체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수행하는 최승자의 시작 방식을 두고 ‘방법적 절망’이라 평하기도 한다. 인간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전체 아니면 무’라는 비극적 전망을 궁극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시 세계를 일궈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3시집 『기억의 집』(1989)에서는 ‘시를 씀으로써 시를 극복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적 전략을 만들어 낸다. 시로 인하여 알게 된 세상의 극한적인 절망을 견뎌 내고 그 속에서 시를 만들어 내는 동력을 다시 ‘시 쓰기’를 통해 확보하는 시인의 전략은 진정한 ‘강함’과 ‘희망’을 희구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절망에 대한 찬란한 수사와 역설적인 열정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를 아울러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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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시평 :: 내 존재의 부재증명>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詩는 나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는 ‘내 존재의 부재증명’을 말하고 있다.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으므로’, 나의 뿌리는 없으며,

‘우리는 잠시 스쳐갈’ 뿐’, 너는 나를 모른다.

내가 부모 없는 고아이며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할 때, 나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모든 관계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므로, 나는 ‘영원한 루머’-실체 없는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으로도 해명되지 않을 때, 나의 실존은 무엇인가?

나는 존재의 극한에 있게 될 것이다. 2가지 극한으로 흩어지는 나를 보게 될 것인데,

내가 나일 필요가 없는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거나, ‘끝없는 티끌’이 되거나.

어느 방식으로도 나는 내가 아닌 우주의 원소로 떠돌게 될 것이다.

루머처럼 떠돌 때, 나는 자유처럼 흐를 것인가? 티끌처럼 빛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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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시평 :: 청춘에 대한 폭력 혹은 노화에 대한 무책임>

 

삼십이라는 나이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다.

삼십은 죽음과 삶의 어느 방향에도 시선을 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다.

삼십은 청춘과 젊음에 대한 폭력 혹은 노화와 죽음에 대한 무책임이다.

 

이 시는 삼십이라는 나이의 불안정함-불확실함에 대해,

삶에 대한 명랑성, 건강한 냉소로 대답한다.

‘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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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종말

 

 

어느 빛 밝은 아침

잠실 독신자 아파트 방에

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로부터

한때 뜨거웠던 숨결

한때 빛났던 꿈결이

꾸륵꾸륵 새어나오고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그녀의 맨발 한 짝이

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나와 있다.

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

희푸른 희푸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시평 :: 시체처럼 펼쳐져있는 최승자의 감성>

 

여기 절망의 골수분자로 살았던 독신 여자의 시체가 있다. 아침 빛 아래 더 참혹한, 

아무도 거두지 않은 시체로 누워있는 그녀의 생애는 무엇이었나? 

살아 절망했고 고독했고, 시체는 삶으로부터 상처받은 그녀의 전 생애를 증언하고 있다.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 미안함, 그리고

골수에 박힌 절망이 죽어서도 방바닥에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절망–비극-삶’ 혹은 ‘존재 –허무-고독’으로 이어지는 최승자의 감성이 시체처럼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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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 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 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_『이 시대의 사랑』 1부_1981년

 

 

<시평 :: 연애의 상처에 대한 매저키즘적 감각>

 

청파동에 대한 기억은 연애의 상처에 대한 ‘매저키즘적 감각’이다.

겨울에 다정했던, 너는 봄이 오고 갔다.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내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지만‘

‘나는 찔린 몸으로 거어서라도’ 너에게 간다.

그렇게 나의 연애는 극한으로 치닫고 싶다.

 

비극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나는 고통의 ‘감각을 지속’하고 싶다. 

네가 완전히 끝장을 낸 다음에도, 나는 이별의 순간을 지연시킨다. 

그 매저키즘적 감각이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실연은 이 감각을 지속하는 도구이며, 그런 의미에서 ‘방법적 失’이다.

오늘도 나는 매저키즘적 감각을 위해 비극적 연애를 갈망한다.

이 생생한 상처와 감각이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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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_『즐거운 일기』 1984년

 

 

<시평 :: 詩에도 신체가 있다>

 

내가 사는 현실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콘크리트벽 같이 막막하다.

이 현실에서 나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루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보내고 또 너를 살아 기다린다. 너에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내 몸을 분질러 너의 꽃병에 꽂는 너의 기쁨을 상상하며,

나는 기꺼이 ‘사디즘적 헌신’으로 내 몸을 내어준다.

희망은 헛되지만, 하지만 절망의 에너지는 이토록 강렬하다.

 

詩에도 신체가 있다. 

최승자는 신체의 분절을 통해 상처받은 리얼리즘과 동시에 詩의 분절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내 몸을 분질러다오 / 내 팔과 다리를 꺾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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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_『기억의 집』 1989년

 

 

<시평 :: 사랑은 이런 것>

 

나는 너에게 갈 수 없다. 너의 전화를 기다릴 뿐.

너의 전화를 기다리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평생을 뒤척인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간결하고 핵심적인 오라클 님만의 화법으로 그날의 시 읽기를 되새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라클 님!
시평에서 '나' 혹은 '너'라고 말하는 대목들은 어떤 면에서, 시적 화자나 대상을 일컫는 게 아니라
오라클 님 개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서걱거림 없이 착착 붙는다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맞아요, 희음! 나 혹은 너라고 쓸 때, 시적 화자와 내가 포개지는 지점이었어요.
물론 의식하고 쓴 것이 아니라, 희음이 그렇게 말하니 분명해지는 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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