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성> 18 ~20장 발제문 (3/6)
삼월
/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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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18 ~ 20장 바르나바스 가족의 수난과 K의 도착
카프카세미나 20170306 삼월
18 아말리아의 벌
올가와 K의 대화가 계속된다. 조르티니와 아말리아의 편지사건 이후 마을 사람들은 아말리아 가족과 관계를 끊으려한다. 올가는 자기 가족의 몰락이 성과 연관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철수하는 건 눈치챘지만 성에 대해선 전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전에도 성의 보살핌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우리가 어찌 지금이라고 무슨 급변화를 알아챌 수 있겠어요. 이런 고요함이 가장 골치였어요.” (241쪽)
이전에 성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에도 성에서 공식적인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이전의 영예를 되찾을 방법도 없었다.
“우리가 그냥 스스럼없이 와서 편지 이야기로 한마디라도 허비하는 일 없이 옛 관계를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했으면 그걸로 족했을 거예요. … 하지만 그러는 대신 우린 집에 앉아 있었어요. 난 우리가 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아말리아의 결심인 성싶어요.” (243쪽)
이때부터 아말리아는 거의 가족과 대화하지 않으면서 침묵으로 가족을 통치하게 되었다. 바르나바스네 가족의 수난은 장기화되기 시작했다. 살던 집은 빼앗기고, 어머니는 아프기 시작했으며,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가족의 이름은 바르나바스로 대신해서 불리게 되었다.
19 탄원
K는 아말리아가 뻔뻔하다고 비난하지만, 올가는 오히려 자신들이 아말리아를 배신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말리아가 내린 침묵의 명령에서 벗어나 허황된 해결책에 매달렸다. 아버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탄원을 시작했으나, 공식적인 잘못이 없으므로 어떤 용서도 받을 수 없었다. 뇌물로 맺은 관리와의 관계에 희망을 품었으나, 그마저도 돈을 계속 마련할 수 없어 끊기게 되었다.
“아마 관이 할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에요. 판결일 뿐이지. … 다만 행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뿐인데 그러기 위해선 다시 공식 절차를 일러줄 수밖에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경로를 거쳐 뭘 해내는데 완전히 실패하신 거라고요.” (251쪽)
아버지는 관리의 마차가 지나다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큰길에 앉아 하루 종일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어머니까지 함께 하다가, 결국 두 사람 모두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말리아가 부모님을 간호하여 지금의 상태로 회복시켰다.
20 올가의 계획
이 무렵 올가는 희망의 실마리를 조르티니의 심부름꾼에서 찾기 시작했다. 편지사건에서 언급되는 일이란 심부름꾼에 대한 모욕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가는 헤른호프의 심부름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나, 조르티니의 심부름꾼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내가 마구간에서 하인들과 일주일에 두 번씩 밤을 보낸 지도 두 해가 넘어요. … 심부름꾼은 오늘까지도 찾아내지 못했으며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는 조르티니에게서 근무하고 있으며 조르티니가 먼 근무처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갔다고 해요. … 내 계획은 실패한 셈이지만 완전히 그런 건 아니에요. … 날 관찰한 사람이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나에 대해 더 후한 평가를 갖게 되고 혹 내가 더구나 비참하게 가족을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아버지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도 몰라요. 만일 그렇다면 내가 하인들로부터 돈을 받아 우리 식구를 위해 쓰는 것도 용서할 거예요.” (258 ~ 259쪽)
올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하인들에게 매춘을 하여 생계를 돕고 있다. 하인들과의 약속에 기대를 품는 일이 어리석다는 걸 알지만, 희망을 버리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올가는 바르나바스를 성의 심부름꾼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 실패한 일을 이제 바르나바스를 통해 다른 확실한 방법으로 이룰 셈이었어요. 우리가 심부름꾼을 욕보여 앞의 사무실에서 내쫓았으니 바르나바스라는 새 심부름꾼을 제공해 바르나바스로 하여금 모욕당한 심부름꾼의 일을 수해하도록 하고 욕먹은 자는 원하는 기간 동안, 모욕을 잊는 데 필요한 만큼 멀리서 조용히 있도록 해주는 것 이상으로 더 합당한 게 어디 있을까.” (262 ~ 263쪽)
올가의 천진하다고까지 할 만큼 허무맹랑한 계획을 바르나바스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심지어 성의 일을 하게 되는데 공명심까지 느껴 시건방져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르나바스의 근무는 허울뿐이었다. 하인들은 올가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바르나바스가 내민 편지를 구겨서 버렸다. 바르나바스는 더 이상 올가에게 기대지 않게 되었으며, 용기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K가 왔다. K에게 편지를 전하는 일은 바르나바스가 심부름꾼이 된지 두 해 만에 얻게 된 첫 임무였다.
올가와 바르나바스는 급하게 옷을 관복 비슷하게 수선하여 K의 눈을 속였다. K에게 전하는 두 통의 편지가 그들 가족이 삼년 만에 받는 은총의 표시라 여겼기 때문이다. 올가는 자기들의 운명이 K에게 예속되어 있다고 말하며, 자신들을 의심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또 편지의 내용과 그 해석에 관련하여, K와 자기 가족들에게 유리하도록 속임수와 기만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힌다.
이때 K의 조수 하나가 바르나바스네 집을 찾아온다. 놀란 K는 올가의 도움을 받아 뒷문으로 나간다. 헤어지기 전 K는 자기가 올가를 이해하고,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아말리아보다 올가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편 조수는 뒷문으로 나온 K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혼자 있는 조수 예레미아스는 외모도 더 나이 들어 보이는데다가 K를 위압적으로 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을 가혹하게 대한 K를 비난하며, 갈라터라는 사람이 K를 흥겹게 해 주라며 자신들을 보낸 사실을 털어놓는다. 프리다를 안심시키기 위해 찾아온 예레미아스는 더 이상 K의 조수가 아니며, 프리다의 새 연인이 되었다. 예레미아스는 뒷문으로 나온 K와 그를 도운 올가를 모욕하고, 비난한다.
소수자와 소수자의 만남
들뢰즈-가타리는 소수성을 ‘사회의 척도에서 벗어남’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소수성은 수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척도가 추상적 개념인 한에서, 우리의 실존은 모두 척도에서 조금씩은 벗어나있다. 그러므로 만인은 소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드러난 소수자와, 숨어있는 소수자가 있을 뿐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되기’의 개념은 이 소수성과 관련이 있다. ‘되기’는 단순히 소수성을 자각하는 문제를 넘어 한 존재가 자신을 (소수적인) 무엇인가로 생성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마을의 외부자인 K와 마을 안의 고립자인 바르나바스 가족은 어떻게 스스로를 규정하고, 서로를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는가.
이들의 만남은 서로의 절박함으로 인해 단단해진다. 애초에 마을에 정착하려는 K는 편지를 전달하러온 바르나바스의 옷차림에 그가 충실한 심부름꾼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올가와 바르나바스는 바로 그 믿음을 얻기 위해 급히 옷을 수선하여 K의 눈을 속였다. 이들을 만나게 한 것은 클람, 혹은 클람의 대리자, 그것도 아니면 성 안의 누군가이다. 성은 이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 관계를 맺게 했다. 애초에 이들을 불러들이거나, 몰락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착과 집안의 회복을 위해 서로가 필요해졌다. 어쩌면 서로에게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끼리 힘을 합쳐야만 한다. 이들이 서로 만났을 때 받는 모욕과 비난은 따로 있을 때보다 더욱 강도가 세어진다.
마을 사람들이 이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이유는 사실 이들이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서 올 수 있다. 올가는, 프리다가 아말리아의 편지 사건을 퍼트린 데 대해 반감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 자신도 다르지 않게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프리다와 자신들에게 등 돌린 마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수성을 자각하거나, 그 소수성이 외부에 드러나는 일을 경계한다. 때문에 타인들의 소수성에 공명하지 않으려 하며,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느껴 그 소수성을 혐오하기도 한다. 사회의 척도(다수자)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한, 소수자(만인)는 스스로 늘 외부에 있거나 고립되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외부성이나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척도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척도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후기에서 계속해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