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전반부 발제 +2
방향
/ 20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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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35.심리학적 관찰의 장점들--
심리학적 관찰의 기술을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곧 정신의 침착성을 주고 권태로운 환경 속에서는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험난하고 불쾌한 시절에는 금언을 찾아낼 수 있어 그것으로 조금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범한 독자 또한 그대가들에게서 저 예술가의 형식이 그에게 주게 될 것보다 훨씬 적은 즐거움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그 기술을 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거기에서 경쟁하지 않았다면, 금언을 연마하는 기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언에서 특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쁜 아니라 적은 즐거움조차 느끼지 못한다 : 그들은 좋아할 수 없기 때문에 칭찬을 하며 곧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더 빨리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36.반론--심리학적 관찰이 현존의 자극제, 치료제, 진정제에 속한다는 명제에 대해 반대명제가 있다는 말인가? 교양인의 눈길을 이 기술에서 고의적으로 돌리게 할 만큼 사람들은 지금 이 기술의 불쾌한 결과에 대해 충분히 확신이라도 했단 말인가? 인간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선에 대한 일종의 맹목적인 신념, 인간 행위를 분석하는 데 대한 뿌리 깊은 반감, 영혼의 노출에 관한 일종의 수치심등은 전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별 경우에 심리학적인 예리함이 지닌 유용한 특징보다 사실상 더 바람직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선에 대한 믿음, 덕 있는 인간과 그 행위에 대한 믿음, 비개인적인 호의가 세상에 충만하다는 믿음은 이것이 똑같은 인간들에 대하여 의심을 덜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인간을 훌륭하게 만든 셈이다.
라 로슈푸코 <도덕의 격언과 금언>
“세상 사람들이 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사람이 원하는 것을 벌을 받지 않고 성취하기 위하여 적당한 이름을 붙여놓은 것으로, 우리의 정념이 만든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감각의 기원과 역사를 추구하고 학문이 진보하면서 복잡해진 모든 사회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나가야만 하는 학문이 특별히 요구된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오류도 대체로 특정한 인간 행위와 감각을 잘못 설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 잘못된 분석, 예를 들면 소위 비이기적인 행위를 기초로 잘못된 윤리학이 수립되었으며 그 윤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종교와 신화적 비본질을 인정하게 된 것, 그리고 끝으로 이건 음산한 유령의 그림자들이 물리학이나 세계관 전체에도 드리워졌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관한 수많은 개별 관찰은 학문적 인식이 아니라 재치 있는 인기 전술을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하는 데 습관화되었던 특정 사회 계층에서 먼저 발견되고 밝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도덕적 감각의 기원에 대하여> “도덕적 인간이 육체적 인간보다 예지적(형이상학적)세계에 더 접근해 있는 것은 아니다.
38.어느 정도 유용한가--심리학적 관찰이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올지 아니면 해가 될지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 학문은 심리학적 관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학문은 궁극적인 목적을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자연이 궁극적인 목적을 모르는 것과 같이. 자연이 때로는 의도하지 않고서도 최고의 합목적성을 가진 사물을 만들어내듯, 참된 학문 또한 개념에서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때때로 인간의 이익과 복지를 발전시키고 합목적적인 것을 달성하기도 한다. 이 또한 의도되지 않은 것이다.
39.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있는 감각, 도덕의 감각의 역사의 주요단계
사람들은 동기는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악으로 결정한다.-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곧 인간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그와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반대로 추론했다.
자유, 자유의지, 행위, 본질, 존재, 불만의 권리?, 불만?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을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게다가 이 불만(후회나 양심의 가책)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와 관련하여 전혀 불만이 없는가 하면,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느끼기도 한다. 불만은 지극히 가변적이고 도덕과 문화의 발전과 결부된 사항이며, 세계사에서 비교적 짧은 시기에만 있는 것이다. 이는 판단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개인이 자기자신을 판단할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 명제는 햇빛처럼 밝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든 사람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그늘과 진리가 아닌 것 속으로 후퇴하려 한다.
40.초월-동물--우리 안에 있는 야수는 기만당하기를 원한다. 도덕은 그 야수에게 물려 찢 않기 위한 필연적인 거짓말.
41.변하지 않는 성격--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특성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주장들이 제기된다.
42.선의 위계와 도덕--선의 위계 그 자체는 도덕적 관점에 따라 수립되고 전복되지는 않는다. 그때그때의 결정에 따라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니면 비도덕적인지 결정된다.
43.낙후된 자로서의 잔인한 인간들--
현재 잔인한 인간들(?) 과거문화의 단계(?)
유전의 과정에서 모든 가능한 우연들에 의해 뇌가 섬세하고 다양하게 발달되지 못한 낙후된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한 조각 화강암이 화강인 것에 책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책임이 없다. 인간의 각 기관의 형태에는 물고기 상태일 때의 기억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뇌에도 그건 의견에 상응하는 도랑이나 굴곡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도랑이나 굴곡은 더 이상 현재 우리 감각의 강이 흘러갈 강바닥은 아니다.
44.감사와 복수--
은인이 강자의 영역에 베푸는 것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고 침범해 들어간다.
강자는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은인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그것은 복수의 좀더 부드러운 형식이다. 감사의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무기력하게 보이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선한 사람, 근본적으로 강자의 사외는 감사를 첫 번째 의무 중의 하나로 삼는다.
스위프트는 인간은 같은 상황에서 복수심을 품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감사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다.
45.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
1)‘선한 사람’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한다.
2)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
여기서는 그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모든 다른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 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46동정은 고통보다 훨씬 강하다(?)--동정이 실제 고통보다 더 강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친구 중의 한사람이 어떤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면 우리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저지른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느낀다. 1)우리는 그의 성격의 순수성을 본인보다 더 믿는다. 2)그가 자신에 대해 가진 사랑보다 더욱 강하다.
47. 우울증--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과 배려로 인해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 그때 생기는 일종의 동정은 병일뿐이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언제나 눈앞에 그리는, 고독하고 종교적으로 감화된 사람에게 엄습하는 그리스도교적 우울증이라는 것이 있다.
48.친절의 경제학--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잇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사람들은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49.호의--크고 드문 것보다는 작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해서 아주 영향력 있는 것에 학문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런 것들 중에는 호의도 포함되어야 한다 :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미소, 눈웃음, 악수, 유쾌함과 같은 교제에서 친절한 마음의 여러 가지 표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량함, 우정, 마음의 정중함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비이기적인 충동이 발산된 것이며, 동정, 자비, 헌신이라고 불리는 충동의 잘 알려진 표현보다도 훨씬 강하게 문화에 종사해왔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들을 과소평가하곤 하지만, 사실상 거기에 비이기적인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이기적인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은 양을 모두 합한 것은 강력해서, 그 총체적인 힘은 가장 강한 힘에 속한다.--이와 같이 흐린 눈으로 볼때마다 사람들은 세계에서 훨씬 많은 행복을 발견한다. 즉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속에서 모든 인생, 가장 궁핍한 인생에서조차도 하루하루가 풍요롭도록 하는 저 즐거움의 순간들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50.동정심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라 로슈푸코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은 동정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런 일은 서민들에게 맡겨버려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서민들은 고통받는 자를 돕거나 불행에 처했을 때 힘차게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정열을 필요로한다. 로슈푸코와 플라톤의 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정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힘, 즉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함께 있는 사람이 표현하는 동정은 약자와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불행한 자는 동정 베풂이 자신에게 입증해주는 우월감으로 인해 일종의 쾌감을 얻는다 :자신은 아직도 세상에 고통을 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그의 자만심도 커진다.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로슈푸코의 생각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질문과 대답의 3/4이 상대편을 조금이라도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 그런 이유로 사교를 갈망한다. 사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사교는 삶의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다. 호의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는 치료제의 역활을 하는것과 같다.
51.가상이 어떻게 존재가 되는가--배우는 자기 자신의 관객이 되어 자신의 고통이나 그것의 현상을 보고 운다. 언제나 같은 역을 연기하는 위선자는 결국 위선자이기를 그만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집요하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면, 결국 그에게는 다른 무엇이 되는 일은 어려워진다. 거의 모든 인간의 직업, 하물며 예술가라는 직업조차도 위선과 함께, 외부의 모방과 함께, 영향력 있어 보이는 것을 모사함으로써 시작된다. 항상 친절한 표정의 가면은 쓰고 있는 자는 결국에는 친절함이 표현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호의적 기분을 조절할 힘을 반드시 획득할 것이다.--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호의적인 기분이 다시 그를 지배한다. 그는 호의적이다.
52.사기 행위에서 정직이라는 것--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 이 믿음이 기적적이고 압도적으로 주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교조들은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유능한 사기꾼과 구별된다. 교조들에게는 자신이 의혹에 압도되는 가장 밝은 순간이 거의 없다 : 그들은 대개 이 가장 밝은 순간을 사악한 악마의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교조와 사기꾼이 크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자기기민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명백하고 강력한 믿음이 된 것의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53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는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사람들은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 것이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인 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4.거짓말--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유는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첫째.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 진리에 대한 감각, 거짓말 자체에 대한 반감등이 그에게는 전혀 생소하고 익숙해지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천진난만하게 거짓말을 한다.
55.신앙 때문에 도덕을 의심하는 것--카톨릭 교회에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힘들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의 눈빛과 피로한 육체는 철야, 단식, 열렬한 기도, 아마 채찍질하는 것까지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불안하게 만든다 : 만약 그렇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혀로 하여금 던지게 하는 전율할 만한 질문인 것이다. 그들인 이와 같은 의혹을 퍼뜨림으로써 쉴 새 없이 반복하여 새로운 것으로 자신들의 권력의 기둥을 쌓아올리다. 자유사상가들조차도 “그대 기만당한 자들이여, 기만하지 말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 오직 통찰의 차이만이 자유사상가들을 이 몰아 상태에 있는 자들과 구분하고 있는 것이지, 선함 또는 나쁨의 차이에서 구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56.근본악에 대한 인식의 승리--
과거 어떤 기간 동안 철저하게 악하고 타락한 인간에 관한 표상이 존재했다면 사실은 현명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와 같은 표상은 그 반대의 표상과 마찬가지로 거짓이다.
그 표상들을 이해하고 넘어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죄는 없다는 것, 같은 의미로 미덕 역시 없다는 것, 윤리적 표상의 이러한 영역 전체가 끊임없이 동요한다는 것, 선과 악,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에 관한 좀더 고상하고 같은 개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물에서부터 이 같은 인식 이상의 것을 얻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영혼의 안정에 이르고, 기껏해야 무지로 인해 잘못하는 일은 있어도 욕망 때문에 잘못을 범하기는 어렵다. 욕망을 비방하고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가능한 한 잘 인식하고자 하는 유일한 목표는 그를 냉정하게 하고 그의 성향에 있는 모든 광포함을 진정시킬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통스러운 많은 표상에서 벗어나, 지옥의 형벌, 죄악, 선에 대한 무능이라는 말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 그는 거기에서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의 희미해져가는 그림자만을 인식할 뿐이다.
57.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룬다.
58.약속할 수 있는 것--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 증오,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 어떤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도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59.지성과 도덕--주어진 약속을 지키려면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하고,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60.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독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전자를 나쁜 것으로 평가한다.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 것이다.
61.기다릴 수 있다는 것--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어서 최고의 시인들도 기다릴 수 없음을 그들의 동기로 삼을 정도이다.
위대한 남자들의 삶에서 비극적인 것은 흔히 시대와 동시대인의 저속함과의 갈등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을 한 해 두 해 미루는 무능력함에 있다 : 위대한 인간들은 기다릴 수가 없다.
62.복수에 탐닉함--거친 성격의 사람들은 모욕을 느끼면 모욕의 정도를 가능한 한 심하게 받아들이고 심하게 과장하여 그 원인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래서 한번 눈을 뜨게 된 증오감과 복수심에 완전히 탐닉한다.
63.비방함의 가치--인간들은(자신의) 자존심을 잘 유지하고 행동할 때 일종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인간을 생각속에서 깍아내리고 비방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64.성질이 급한 사람--우리에게 성질을 부리는 사람 앞에서는 과거에 우리의 목숨을 노린적이 있는 사람 앞에서 만큼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은 죽일 힘이 없었다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눈초리만으로 충분했다면 우리에게는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육체적 광포함(저 차가운 눈초리)을 드러내며 공포심을 자극해서 누군가를 침묵시키는 것은 미개 문화의 잔재이다.
65.정직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는가?--자신이 행했던 행동의 동기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동기와 선과 악의 모든 동기에 대하여 정말 정직하게 말해버리는 나쁜 습관을 가진 자. 그는 처음에는 불쾌감을, 다음에는 의혹을 야기 시켰고, 점차로 배척되어 사외에서 추방되었다. 보편적인 비밀을 지킬 줄 아는 과묵함의 결여와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한 무책임한 성향이 그를 감옥으로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내몰았다.
66.처벌받아야 하지만 결코 처벌되지 않은--범죄자(?)들에 대한 우리의 범죄는, 우리가 그들을 불량배(?)처럼 취급하는 점이다.
[차라]에서 “적”이라고 부를지언정 “악한”이라고는 부르지 말라, “병자”라고 부를지언정 “무뢰한”이라고는 부르지 말라. “바보”라고 부를지언정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말라.(와 비교해석)
67. 덕의 신성한 단순성--모든 덕은 특권을 가지고 있다 : 예를 들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를 화형하기 위한 장작더미에 덕이라는 조그만한 뭉치의 장작을 곁들이는 것이다.
68. 도덕성의 결과--사람, 행동하는 사람 모두 결과에 따라 도덕적인 것 또는 비도덕적인 것을 확정한다. 동기와 의도는 대부분 명료하거나 단순하지 않으며 기억조차도 결과로 흐려져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동기를 부여하거나 비본질적인 동기를 본질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성공은 어떤 행동에 선한양심의 정직성을 띠게 하고, 실패는 가장 존경받을 만한 행위마저 양심의 가책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그리스도교가 더 위대한 진리임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더 거칠고 강제적인 것이 좀더 정신적인 것과 섬세한 것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9. 사랑과 정의
Q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은 과대평가하고, 정의보다 사랑이 고상한 본질인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의 심리학적 금언
1.만일 우리들에게 결점이 없었다면 남의 결점을 깨달을 경우에 이렇게 까지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2.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타이를 경우에, 날뛰는 것은 친절보다는 오히려 오만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훈계하는 것은 저들의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훈계하는 것은 저들의 과오를 교정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들이 과오 따위를 범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에게 믿게끔 하기 위함이다.
3.아무리 불행한 사건이라도 유능한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무엇이고 얻는 바와 이로운 점이 있고, 또 아무리 행복한 사건일지라도 분별이 없는 사람이라며 복을 바꾸어 재앙으로 삼는 일이 있는 것읻.
4. 사람들이 종종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악한 일을 해도 벌을 받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오는 것이다.
5.사소한 몇마디 말로서 많은 일을 이해시키는 것이 큰 인물의 특질이라면, 소인은 그것에 반하여 많은 말은 늘어놓고도 하나도 쓸모 있는 말을 못하는 천부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6.사람은 남을 칭찬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이익을 보는 일이 없이는 결코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다. 찬사는 교묘하로도 은밀한, 그러면서도 미묘한 아첨이니, 그것을 주는 자와 받는 자를 개별적으로 만족시킨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재능의 보수로서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기의 공정성과 식별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는 것이다.
7.행위와 계획 사이에는 어떤 균형이 없어서는 안된다. 두가지 것에서 생겨나는 결과를 모조리 손에 넣고 싶다면
8.선에 있어서의 영웅이 있는 것처럼, 악에 있어서도 영웅이 있는 법이다.
크나큰 결점을 갖는 것은 위대한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10.사람은 늙어감에 따라 점점 어리석어 가기도 하고, 또 반대로 현명해지기도 한다.
11.세상에는 노래로 불려 질 사이도 없이 사라져가는 유행가와 같은 사람이 있다.
12.극에 달한 용기라는 것은,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해치우는 것이다.
13.자기의 실력을 감출 줄 아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실력이다.
14.상대방이 눈앞에 없게 되면 평범한 사랑은 식고 큰 사랑은 타오른다. 바람은 불면 촛불은 꺼지고 화재는 더욱 일어나는 것과 같이.
15.정말로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6.약한 사람은 솔직할 수가 없다.
댓글목록
방향님의 댓글
방향
아~잘림현상이 이거였군요?
17.우리가 조그마한 결점을 노출시키는 것은 오직 큰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에게 믿게 하기 위함이다.
18.남에게서 혹심한 대우를 받는 것은 우리들이 자신에 대하여 내리는 혹심한 정도만큼은 쓰라리지 않다.
19.가지고 있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것보다도 가지고 있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20.한번도 위험한 곳에 몸을 던져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용기를 장담할 길이 없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자료 업로드시 텍스트 잘림현상에 대한 대처 ]
한글.워드문서를 복사해서 홈페이지에 붙여넣을 때, 텍스트가 부분만 나타나는 잘림현상이 생깁니다.
그것은 한글.워드문서에서 웹문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한글.워드문서의 속성(밑줄, 볼드, 크기)들이 웹문서의 html태그로 변환되어 용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글.워드문서의 텍스트를 복사해서 --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 홈페이지에 올리면,
원본문서의 속성들이 지워지면서 잘림현상이 해소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홈페이지 개발도구인 그누보드가 적절한 대처법이 없는 듯합니다. 그누보드는
무료료 제공된 오픈소스이므로, 우리 요구에 최적화하기보다, 소스의 특성을 살펴가며 사용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최적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프로그램에 맞추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기계가 들어와 있고 기계에도 인간이 내장되어 있어서, 인간과 기계가 공생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