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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3]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후기
희음 / 2017-02-28 / 조회 2,337 

본문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아닐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의지도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마지막 불안의 표시를 지닌 채
그저 시들고 보기 흉할 따름입니다.

 

도시의 온갖 먼지가 밀려와
오물이란 오물은 다 몸에 붙습니다.
천연두 환자의 침대처럼 배척당하고
깨진 접시 조각처럼, 해골처럼,
낡은 달력처럼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대지가 고난을 당하는 때가 오면
대지로 하여금 그들을 실에 끼워 목주를 만들어
부적처럼 몸에 지니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순수한 보석보다 더 맑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눈 못 뜬 짐승과 같고,
한없이 소박하며 끝까지 당신에게 순종하는 종입니다.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요한 건 오직 한 가지,

참으로 있는 그대로 가난하려는 것입니다.
가난은 내면에서 나오는 위대한 광채이기 때문입니다.

 

 

    릴케의 초기 시집인 『기도시집』의 ‘가난과 죽음의 서’의 장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이야기하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집중적이고 기나긴 토론이 있었습니다. 오라클 님은 이 시가 적잖이 불편하다는 의견을 내면서, 시인은 여기서 ‘가난한 자’에 대한 대상화를 통해 시를 전개하고 있는 듯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시가, 경제적, 물질적 빈자에 대한 낭만적인 시선으로써 그에 대한 의미와 정서를 생산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까닭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와 대치되는 의견에 대해서는 조금 구체적인 서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래 한 단락을 통째로 할애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누구로 규정하고 있는가는 이 시의 흐름을 따라 그 전반을 훑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연에서 시인은 ‘가난한 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아닐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단지 부자가 아닌 것만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가난한 자들’이라는 규정이 절대적인 가난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부자가 아닌 자는 가난한 자라 명명될 수밖에 없는가, 가난한 자는 누구에 의해서, 또 어떤 논리에 의해서 가난한 자라고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자가 아닌 것으로서만 불릴 수 있는 자를, 가난한 자로 폭력적으로 뭉뚱그리는 방식,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묻어납니다. 가난한 자라고 규정되고 명명된, 즉 그 말이 고착되어 쓰이게 된 데는 기득권자의 논리와 언어가 작동했을 수밖에 없음을 꼬집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가난을 재정의합니다. ‘의지도 없고 세계도 없는, 마지막 불안의 표시를 지닌 채 그저 시들고 보기 흉할’ 뿐이지만 ‘참으로 있는 그대로 가난하려는’ 자. 그러한 가난은 ‘내면에서 나오는 위대한 광채’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언어나 개념으로 정의될 수도 포섭될 수도 없는 자입니다. 있는 그대로 가난하려는 자, 자신의 비어있음을, 의지도 없고 세계도 없으나 그것 자체로 빛이 될 수도 있는, 자신 안의 꽉 찬 빈틈을 긍정하는 자가 바로 릴케가 재정의하는 ‘가난한 자’입니다.

    ‘마지막 불안의 표시를 지닌’ 채 언제까지나 흔들리면서 위태로운 걸음을 걷는 그들은 우리가 결코 ‘대상화’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걸음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저 열심히 걸어갈 뿐인 우리, 아무리 잘 걸어간다 해도 그 끝에는 ‘마지막 불안의 표시’라는 죽음 밖에 없는 것을 아는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걷고 또 걷게 될 우리가 품은 것이 바로 가난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알고, 가난을 안고, 가난을 무릅쓰고 출렁거리는 이들이라면 그 모두가 ‘우리’일 것입니다.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거기 두 개의 눈망울이 무르익고 있던
아폴로의 엄청난 머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토르소는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사물을 보는 눈이 틀어박힌 채,

 

그대로 남아 빛나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가슴의 풍만함이
너를 눈부시게 하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허리를
조용히 돌리며 보내는 하나의 미소가
생명을 가져다주던 그 중심을 향해 흐르지도 않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이 돌은, 두 어깨는 투명한 상인방 같지만
밑은 흉측하고 볼품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맹수의 모피처럼 반짝이는 일도 없고,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마다 마치 별처럼
빛이 비치는 일도 없으리라. 이 토르소에는 너를 바라보지 않는
부분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토르소란 허리 아래가 잘린 상반신 조각상을 뜻합니다. 이 시에서는 머리 없는 아폴로의 상반신을 시적 대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아폴로의 토르소는 머리가 잘려나갔지만 ‘눈이 틀어박힌 채’ 빛나고 있습니다. 눈이 박혀 있던 얼굴, 즉 머리 부분이 잘려나갔는데도 마치 그 눈이 그대로 남은 것처럼 빛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마다 마치 별처럼/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눈이 사라지니 눈 대신 몸의 모든 표면들이 빛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이 사라졌기 때문에, 상반신의 모든 부분이 눈빛처럼 광채를 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토르소에는/너를 바라보지 않는 부분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말에서, 토르소의 모든 곳에 방향도, 깜빡임도 없는 무한히 방사되는 시선이 태어났다는 게 증명됩니다. 이는, 안면이 사라지면서 육체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오롯이 빛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반추의 고백을 하게 할 만큼 강렬하고도 숭고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그것 자체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을 아우라라고 한다면, 이 시는 아폴로 토르소의 아우라의 순간에 관한 시라고 불려도 좋겠습니다. 신에 대한 비유의 맥락으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신은 얼굴이 없고, 그 얼굴과 그의 능력을 보지 않고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 시의 토르소 역시 얼굴이 없으며, 그 존재만으로도 그것을 대면하는 다른 존재의 무릎을 꿇게 한다는 점에서, 신과 무척 닮아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헤르메스

 

그것은 영혼의 기묘한 광산이었다.
조용한 은광석처럼 그들은 광맥이 되어
암흑 속을 걸어갔다. 뿌리들 사이로
인간에게 이어지는 피가 솟구치고
어둠 속에서 반암처럼 무거워 보였다.
그 밖에 붉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암석과
공허한 숲이 있었다. 허공으로 수없는 다리가 걸쳐 있고
큰 회색빛 흐린 연못이
어느 풍경 위의 비 내리는 하늘처럼
아득히 먼 땅 위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평온하고 한없이 여유로운 초원 사이로
표백한 긴 천처럼 이어진
한 줄기 창백한 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그들은 걸어왔다.

 

앞장선 푸른 외투의 후리후리한 사나이는
초조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앞만 보고 있었다.
씹지 않고 삼켜 버리듯, 그의 발걸음은 성큼성큼 길을 먹어 갔다, 주름진 소매 사이로
힘없이 무겁게 늘어진 손은,
올리브나무 가지로 뻗어 들어간 장미 덩굴처럼
왼쪽으로 불쑥 나와 있는
가벼운 칠현금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감각이 분열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개처럼 앞질러 가서는,
돌아보고, 되돌아왔다는 다시 왔다가는 다시 또 앞서 가
다음 갈림길에서 기다리며 서 있고 하는 동안에도 -
그의 청각은 후각처럼 뒤에 머물고 있었다.
가끔은 이 언덕길을 줄곧 뒤따라와야 할
두 사람의 발걸음에까지
청각이 다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있는 것은 다만
언덕을 오르는 자신의 발소리와 외투를 스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틀림없이 오고 있어, 그는 중얼거렸다.
크게 내뱉은 말소리가 차츰 사라져 가는 것이 들렸다.
틀림없이 오고 있어, 그저 그들의
걸음걸이가 너무 조용한 것뿐일 거야.
그가 한 번 몸을 돌린다면(이 뒤돌아봄이
이제 막 성취되려는 모든 일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없이 뒤따르는
그 조용한 두 사람을 틀림없이 볼 수 있으리라.

 

형안 위에는 여행의 두건을 쓰고,
앞에는 가느다란 지팡이를 들고,
발목에는 날개가 퍼덕이는,
심부름의 신, 먼 전령의 신을,
그리고 그의 왼손에 몸을 맡기고 있는 그 여인을.

 

그처럼 사랑하는 여인. 하나의 칠현금에서
예전의 많은 통고그이 여인들보다도 더 큰 비탄을 자아내게 하고
비탄의 세계가 태어나, 그 속에서 숲과 계곡
길과 마을, 들과 강과 짐승이
다시 한 번 어울려 살게 만들고,
이 비탄의 세계를 에워싸고 마치
또 하나의 지구를 돌 듯이, 태양과
별이 있는 조용한 하늘,
일그러진 별들로 가득한 그 비탄의 하늘을 회전하게 한 -
참으로 사랑하는 그 여인.

 

그러나 그녀는 신의 손에 의지한 채
시신을 감쌌던 긴 끈에 방해를 받아 가면서
불안스레, 차분히, 초조한 기색 없이 걸어갔다.
큰 희망을 품은 여인처럼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앞서 가는 사나이를 생각하지도 않았고,
삶의 세계로 올라가는 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 죽어 있음이
풍요처럼 그녀를 충만하게 하고 있었다.
감미로움과 어둠의 한 열매처럼,
새로워서 전혀 알 수 없는
위대한 죽음으로 넘쳐 있었다.

 

새로 찾은 그녀의 처녀성은
건드릴 수 없었다. 성(性)은
저녁녘의 어린 꽃봉오리 같고
혼례의 관습 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손은
가벼운 신의 한없이 조용해 인도하는 손길마저도
지나친 친절처럼 그녀이 마음을 부담스럽게 했다.

 

그녀는 이미 시인의 노래에 나오는
금발의 여인이 아니었다.
넓은 침대의 향기도 아니고 섬도 아니고,
저 사나이의 소유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처럼 풀리고
땅에 내린 비처럼 몸 바치고
끝없이 나눠 주는 넉넉함 같았다.

 

그녀는 이미 뿌리였다.

 

 

    오르페우스 신화가 소재인 이 시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지하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구출하여 삶의 세계의 출구 가까이까지 동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심부름의 신 헤르메스의 손에 몸을 맡기고 뒤따르는 에우리디케가 믿겨지지 않아 약속을 어기고 뒤돌아봄으로써 그녀를 다시 잃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릴케는 그 초점을 전혀 다른 쪽으로 옮겨가 그만의 독특한 시적 사유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오르페우스의 상실의 비애가 아닌, 에우리디케의 죽음의 친화 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것.
    우리는 흔히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이분하면서 삶과 죽음의 좋고 나쁨과 그것의 환희와 비애를 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지상의 세계와 하데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것 모두가 하나의 과정이고 자연현상이고 그것들 스스로가 어떤 선의나 악의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인데도 말이죠. 그것들은 오로지 인간의 시선과 잣대에 의해 좋고 나쁜 것으로 분류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릴케는 이 시에서 그 지점을 지적하고 비틀려 했던 듯합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 죽어 있음이/풍요처럼 그녀를 충만하게 하고 있었다./감미로움과 어둠의 한 열매처럼,/새로워서 전혀 알 수 없는/위대한 죽음으로 넘쳐 있었다.’
    압권이었습니다. ‘위대한 죽음으로 넘쳐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묘한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죽음의 적막한 에너지를 ‘감미로움과 어둠의 한 열매’라고 말하는 시인의 입술을 따라 어둠으로 출렁이고 싶었습니다. 에우리디케는 그렇게 참다운 죽음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충만해진 것입니다. 진정으로 ‘의지도 없고, 세계도 없는’(「가난한 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세계 없음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시인의 노래에 나오는/금발의 여인이 아니었다./넓은 침대의 향기도 아니고 섬도 아니고,/저 사나이의 소유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라는 부분은 우리들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누구를 위한 누구는 더더욱 아닌, 그 자신으로서의 그녀. 죽음은 그녀를 그녀의 차갑고 적막하고 정확한 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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