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 비마이너에 대한 오해(2/24 후기) +3
선우
/ 2017-02-28
/ 조회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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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비마이너’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음, 소수자가 되자군. 우리 사회의 소수자, 약자의 마음을 갖자는 건가? 이미 자신이 소수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굳이 ’비(be)‘라고 말하지 않을텐데, 그럼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수자라는 건가? 나는 다수자이고 우리 사회의 척도에 근접해 있지만, 척도와 중심을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억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있을거야, 인가.’
그러나 리좀 님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었기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을거라는 생각 역시 갖고 있었습니다. 지난 세미나는 이런 저의 오해가 해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들뢰즈는 ‘되기(생성)’는 기본적으로 소수자-되기이며 분자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인간/남성-되기는 없고, 여성-되기 또한 몰적 여성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들이 자신들의 유기체와 역사, 주체성을 정복하기 위해 몰적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 더 중요한 것은 몰적 대결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그것들의 아래를 지나가거나 그것들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분자적 여성정치를 사고하는 것입니다. 몰적인 문제가 아니라 분자적이라는 말? 사실 이게 어떻게 한다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요, 리좀 님 말씀에서 좀 더 분명해졌습니다.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 것,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것. 남성, 여성이라는 이항성, 장애인, 비장애인이라는 이항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있기. 그 사이를 통과하기. 간주곡.
다수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추상적 척도 안에서만 포착됩니다. 척도인 표준어를 정확히 구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수자는 어떤 누구도, 아무도 아닌 반면 소수자는 만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델로부터 해방된 만인! 소수자를 대표, 대변하기보다는 자신의 소수성을 자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이 자각은 자신 역시 다수성의 척도에서 벗어난 자리에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건 여전히 척도를 잣대로 하는 몰적인(다수적인) 심급이니까요. ‘되기’는 ‘기억’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기억 없이, 추억 없이 생성하라!! 너무 아팠던 과거의 고통, 슬픔 자꾸 불러올리지 말고...
소수자-되기는 다수적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수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상수를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다수적 생성은 없으며, 다수성은 생성이 아닙니다. 다수성엔 장래(avenir)가 있을지 모르지만 생성(devenir)은 없습니다. 모든 생성은 소수적입니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후기 완전 멋있는데요... ^^
대학로 노들야학 토론회 갔다가 패널들이 나눈
소수(자)/비마이너 이름에 대한 토론도 생각납니다.
어려운거 빼면, 들뢰즈 참 멋있는 분이시네요. ㅎㅎ
선우님의 댓글
선우
유택이 푸코 후기에 자주 첨부하는 푸코의 말, what I am 은 별로 중요한거 같지 않다는.
갈수록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저도 들뢰즈-가타리에 조금씩 빠져들게 된 시점이 '소수성'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였어요.
소수성이 숫자와 관련 있는 게 아니라 척도와 관련 있다는 말이 무척 와 닿았어요.
그 소수성의 개념이 '되기'와 연결되니, 들뢰즈-가타리가 이야기하려는 게 뭔지 조금씩 감이 잡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번에 읽은 10장의 제목이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될 수 없게-되기'라는 게 절묘해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결국 그런 존재-강렬하고, 동물적이며, 지각(규정)될 수 없는 무엇-임을 알게 되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