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관하여 발제문
정아은
/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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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세미나 <천의 고원>
2017. 3. 3. 정아은
11. 1837년: 리토르넬로에 관하여
리토르넬로는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교향곡에서 사용된 음악형식으로, 독주 사이사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후렴구를 이릅니다. 이 후렴구는 나올 때마다 약간씩 차이를 주며 반복되었습니다. A라는 최초의 후렴구가 있다면 그 다음 이어지는 B이후에는 A에서 약간 변형된 A2가, C이후엔 A3가 이어지는 식이지요. A-B-A2-C-A3-D-A4같은 도식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11장을 어둠 속에 있는 아이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노래를 불러 리듬을 만들어 공포를 이겨내는 아이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채우는 리토르넬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리토르넬로는 주로 음향에 관련된 것이지만, 리듬적인 인물 및 선율적 풍경과 결부된 것, 반복의 양상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리토르넬로의 세 가지 성분 일단 방향적 성분을 들 수 있겠습니다. 방향적 성분은 방향을 표시하는 성분으로, 출생과 같은 영토적인 기원을 담고 있는 성분이지요. 카오스와 구별되는 영토적 배치의 기초를 이룬다는 점에서 ‘하부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차원적 성분을 들 수 있는데요. 차원적 성분은 표현적인 질서를 구성하는 성분입니다. 이는 배치의 내부에서 배치를 특정한 표현형식으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내부배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행적 성분입니다. 이는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이행하게 하는 성분입니다. 이는 두 가지 상이한 배치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사이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오스, 환경, 영토 카오스에서 리듬이 생겨나면 이는 환경이 됩니다. 이는 영토적 배치의 기초를 이루지만 그 자체만으론 영토라고 할 수 없고, 영토적 대위법이라는 차원적 성분을 통해 표현적인 질을 획득할 때 영토가 발생합니다. 또한 하나의 영토 위에서 이행적 성분을 통해 상이한 배치로의 이행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미학적 질이라고 부르는 표현적 질들은 확실히 ‘순수한’ 질에 관한 것도, 상징적 질에 관한 것도 아니라 고유한 질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영유적인 것이며, 환경의 성분에서 영토의 성분으로 넘어가는 이행에 관한 것이다.”
영토의 특성 영토는 사실 하나의 행동이어서, 환경과 리듬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영토화합니다.’ 영토는 환경과 리듬을 영토화한 산물입니다. 하나의 영토는 모든 환경으로부터 차용하며, 그것을 장악하며, 억지로 그 신체를 잡습니다. 그것은 환경의 측면들 내지 몫으로 구성되며, 그 자체로 외적 환경, 내적 관경, 매개적 환경, 부가적 환경을 구성합니다. 영토가 존재하는 것은 리듬의 표현성이 존재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이를 리토르넬로와 연관지어 말하면, 리토르넬로는 그것이 표현적인 것이 됨에 따라 영토화되고, 영토화하면서 표현적으로 된 리듬이요 선율입니다.
표현적 질의 두 요소 표현적 질의 두 요소는 영토적 모티프와 영토적 대위법입니다. “영토적인 모티프는 리듬적인 얼굴 내지 인물을 형성하고, 영토적인 대위-점들은 선율적인 풍경을 형성한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인물, 하나의 주체 내지 하나의 충동과 결부된 하나의 리듬이라는 단순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을 때 리듬적인 인물이 존재한다.” 또한 영토화하는 표시들이 모티프와 대위법을 통해 전개되는 것과 그것들의 기능을 재조직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힘을 재그룹화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집니다.
영토와 배치 영토적 배치 안에서 기능이 되었던 것은 다른 배치의 항상적 요소가 되며, 다른 배치로의 이행의 요소가 됩니다. 긍정적 사랑에서 그렇듯이 하나의 색깔은 ‘구애’의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영토적 존재가 됩니다. 영토적 배치는 구애의 배치로, 혹은 자율화된 사회적 배치로 개방됩니다.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의 그러한 개방은 세부적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극히 변이됩니다.
배치와 이행 배치의 변환이 일어날 때 변경되는 요소는 다른 배치로의 개방과 이행을 야기하는 “이행의 작용소요 벡터고 배치의 변환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토적 배치 안에서 새로운 배치의 형성을 항상화하는 것인데, 이는 내부 배치에서 사이 배치로 넘어가는 운동이고, 이행 및 교대의 성분을 갖는다. 암컷을 향한, 혹은 그룹을 향한 영토의 혁신적 개방이 수반된다.” 이처럼 하나의 영토적 배치는 끊임없이 다른 배치로 이행합니다. “하부 배치가 내부 배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 배치 역시 사이 배치에 우선하지 않는다. 이행은 필연적이며 ‘경우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하나의 영토는 언제나 탈영토화의 도중에 있으며, 최소한 잠재적으로나마 다른 배치로의 이행의 도중에 있다.”
일관성 일관성은 “영토적 배치의 성분 전체를 하나로 묶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예술, 배치 같은 개념과 관계되어 있지요. 또한 일관성은 “상이한 배치들이 이행 및 교대의 성분과 더불어 존속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행을 통해 상이한 배치들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의미지요.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관성은 어떠한 영토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 하므로 잠재성의 차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탈영토화된 거대한 리토르넬로로서의 우주”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지요.
유착(응고) Consolidation. 원래 철학자 뒤프렐의 개념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질적인 것이 합쳐져서(con) 강한(solid) 것이 됨을 뜻합니다. 이질적인 질료들을 하나로 묶을 때 ‘유착’이 진행됩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소재를 점점 더 풍부하게, 점점 더 일관되게 세공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점점 더 강렬적인 힘을 포착하기 쉽게 하는 것이지요. 소재에 점점 더 풍부함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이질적임을 멈추게 하지 않고서도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묶는 것으로는 진동자, 최소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삽입적 신디사이저가 있습니다. 일관성, 응고, 유착, 등의 개념은 이질적인 성분들이 보존되면서도 각각 일정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면에서 앞 장에서 보았던 ‘~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착의 세 가지 요소 유착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하는데요. “첫째, 선형적으로 계속되는 ‘시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윤달을 삽입하는 행위에서 그렇듯이 밀집화, 강밀화, 보강, 주입, 첨가 또한 있다. 둘째, 그 반대는 아니지만, 응고시키기 위해서는 종종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간격의 이동, 불균등의 분배가 있다고 해야 한다. 셋째, 박자나 운율을 부과하지 않으면서 행해지는 이산적인 리듬의 중첩, 간-리듬성 내부에서의 분절이 있다.”
기계와 생명 어떤 배치가 탈영토화하는 운동 속에서 포착될 때면 언제나 하나의 기계가 발동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기계는 종적인 영토적 배치에 연결되며, 다른 배치를 향해 그것을 개방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동일한 종이 사이 배치를 통과하게 하지요. 더 나아가 기계는 모든 배치를 흘러넘쳐 우주를 향한 개방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절대적 탈영토화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기존의 기계론에서 기계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았던 ‘생명’은 저자들의 새로운 기계론에서 어떻게 정의될까요? 저자들은 생명이란 일관성의 이득을 뜻한다고,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을 원래 그것이 속해 있던 지층에서 떼내고 그것들에 일관성을 부여해서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예술가 예술가는 “대지의 한계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미경과 결정, 분자와 원자, 미립자에 관심을 갖는 바, 그 과학적 적합성보다는 운동에, 다름 아닌 내재적 운동에 주목합니다. 예술가는 이 세계가 상이한 측면을 가지며, 또 다른 측면을 가지 것이라고, 그리고 다른 행성에서라면 이미 다른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술가는 하나의 ‘작품’ 안에 이 힘들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우주를 향해 개방하는데, 이러한 개방을 위해서는 거의 어린애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수단이 필요하며, 또한 민중의 힘이 필요한데, 민중의 힘은 아직 결여된 것이라고 저자들은 생각합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 고전주의 예술가가 신의 임무를 수행하여 카오스를 조직했다면, 낭만주의 예술가는 신이 아니라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영웅을 만들어냈습니다. 독단주의, 환경의 카톨릭주의를 비판주의, 대지의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대체한 것이죠. 낭만적 예술가는 카오스의 빈 구멍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 끌려갑니다. 낭만주의에는 대지와 영웅이 있을 뿐, 민중은 없습니다. 저자들은 대지의 힘에 호소하는 대표적인 음악가로 바그너를, 민중의 힘에 호소하는 음악가로 베르디를 듭니다. 히틀러가 대중 선동에 바그너를 이용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무솔리니가 베르디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차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이 문장은 이진경의 <노마디즘> 참조).
모던 모던은 우주적인 것을 말합니다. 배치는 고전주의에서처럼 카오스의 힘과 대면하지 않고, 낭만주의에서처럼 대지의 힘 내지 민중의 힘 안에서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힘을 향하여 개방됩니다. 화가 밀레는 “그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농민들이 실어나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정확한 무게이다”고 말했습니다. 즉 본질적인 것은 형식과 질료에 있는 것도, 주제에 있는 것도 아니며, 힘과 밀도, 강렬도에 있다는 말이지요. 이는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는 힘입니다. 저자들은 이 부분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리토르넬로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간결성 분산된 것들을 일관성으로 종합하는 과정에는 모호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잡음, 소음이 발생하여 검은 구멍을 만드는 공명통이 생겨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질료의 탈영토화, 소재의 분자화, 힘의 우주화를 소음 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간결성이 될 것입니다. 클레는 우주적인 힘을 드러내기 위해 가능한한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려야 했고, 그래서 어린애가 그린 것 같은 선을 이용했지요.
암살자와 시인 암살자란 모든 배치를 끊임없이 폐쇄하고 점점 더 넓고 깊어지는 검은 구멍 속으로 기존의 민중을 밀고 가는 분자적 군집들로써 그들을 폭격하는 자인 반면, 시인은 분자적 군집들을, 도래할 민중의 씨를 뿌리고 나아가 그들을 발생시키리라는 희망, 도래할 민중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 우주를 개방하리라는 희망 속으로 풀어놓는 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도래할 민중’이겠지요. 잠재적 배아 상태에 있는 리토르넬로. 비가시적이지만 가시적이 될 기운을 머금고 있는 리토르넬로. 이 부분 읽으면서 뭉클했습니다. 현시국의 우리나라를 떠올리기도 했고요. 순실 근혜 쇼가 개봉하기 전, 우리는 그런 싹을 머금고 있는 민중이었을까요?
리토르넬로를 탈영토화하라 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탈용토화된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고, 그것을 우주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주적 힘을 향해 배치를 개방하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소리의 배치에서 음향화하는 기계로. 음악가의 어린이 되기에서 어린이의 우주적으로 되기로.
첨언 우리 일상에서 리토르넬로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생각해봤는데요. 얼핏 떠오르는 게 책읽기였습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시기를 달리하여 읽으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히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죠.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그 전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읽히고요. 책읽기, 공부, 글쓰기, 모두 차이를 품은 반복이라는 면에서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생각해봤습니다. 또는 들뢰즈의 천의 고원 이 책 자체도 리토르넬로인 듯. 각 고원들이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주선율을 반복한다는 면에서...리토르넬로적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