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고원] 10.강렬하기- 되기, 동물- 되기, 지각될 수 없게 - 되기 발제문 (2월 17일 ) +3
토라진
/ 2017-02-17
/ 조회 3,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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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세미나 《천의 고원》
제 10 장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할 수 없게-되기
어느 관객의 기억 - <윌라드>라는 영화(윌라드라는 인물의 ‘쥐 되기’)를 통해 들뢰즈는 동물 –되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유사성을 통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유사성이 오히려 장애물이나 정지가 되는 동물-되기, 가족, 직업, 부부관계 같은 몰적 힘들을 침식하는 쥐들, 무리의 증식에 의한 분자-되기, 자기 파멸에 이를 수도 있는 배치, 전쟁기계 혹은 범죄기계의확립, 비인격적인 정동의 순환, 불가항력적인 재영토화이다.
어느 자연사가의 기억 – ‘동물-되기’의 문제를 사유하기에 앞서 동물을 어떻게 사유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질문한다. 자연사에서 동물을 다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계열에 따른 등급화된 유사성(a는 b와 유사하고, b는 c와 유사하다.)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에 따른 비례의 유비(a와 b가 맺는 관계는 c가 d와 맺는 관계와 같다)에 의한 것이다. 구조에 따른 비례의 유비는 동형적인 관계의 형태로서 이미 동일한 모델의 반복이기 때문에 ‘더 이상 모방할 것도 없는 거울 형식의 모방’이다. : 들뢰즈는 융의 원형이론(원형의 계열 속에 통합하는 방식)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관계의 동형성을 중시)의 한계를 지적한다.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기억 – 1)‘되기’는 관계들의 상응이 아니다. ‘되기’는 하나의 계열을 따라서 전전하거나 퇴행하는 것이 아니다. 2)‘동물-되기’들은 꿈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실재적이다. 실재적인 것은 ‘되기’ 그 자체, ‘되기’의 블록이지, ‘되고 있는 것’이 지나가는 고정된 항들이 아니다. 3)‘되기’는 동물이 된 항 없이도 ‘동물-되기’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동물-되기’는 그가 되는 동물이 실재적이지 않아도 실재적이다.(슬레피안의 개-되기) 4)‘되기’는 진화가 아니다. 그것은 혈통과 친자관계에 의한 진화는 아니라 횡적인 결연관계의 선을 따라 이루어진다. 그것은 전혀 다른 생물계와 전혀 다른 수위의 존재들을 이용하는 광범위한 공생의 영역 속에서다.(한스는 말과 짝이 되어 ‘말-되기’의 블록을 형성하고, 슬레피안은 개와 짝이 되어 ‘개-되기’의 블록을 형성하고, 오르키데는 말벌과 짝이 되어 ‘말벌-되기’의 블록을 형성)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이 진화의 형식을 “함입”이라고 한다. ‘되기’는 함입적이고, 함입은 창조적이다. ‘되기’는 리좀이며 일관성을 갖는 동사이다.
어느 마법사의 기억 1– 이제 어느 마법사의 기억을 빌려서 ‘동물-되기’의 세 가지 원리에 대해 다룬다. 1)첫 번째는 다양성의 원리이다. - 우리는 무리에 대한 매혹, 다양성에 대한 매혹 없이 동물이 되지 않는다. 동물들은 무리들이고 무리들은 감염에 의해서 형성되고, 전개되며, 변화된다. 이와 관련해 동물들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오이디프스적 동물들 : ‘내 고양이, 내 개’와 같은, 우리를 퇴행으로 초대하며 나르시스적인 응시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정신분석학은 이 동물들 밑에서 아빠, 엄마, 젊은 남자 형제의 이미지를 더 잘 발견해낸다. 2) 어떤 특성이나 속성을 가진 동물 ; 토템적인 동물이나 국가 동물들이다.(단군신화의 곰, 호랑이···) 3)악마적인 동물들 ; 다양체, 되기, 개체군, 꽁트······를 이루는, 무리를 짓는 감응적인 동물들이다. (오르키데의 말벌, 한스의 말, 슬레피안의 개)
어떤 동물은 오이디푸스적이고 어떤 동물은 토템적, 또는 악마적이다. 즉 치타나 코끼리가 언제라도 나의 작고 귀여운 동물이 될 수 있다. 밴드, 가축 떼, 개체군은 열등한 사회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 더불어 이루는 ‘되기’만큼이나 강력한 ‘되기’ 속에서 동물 전체를 사로잡는 감응, 능력, 함입이다.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밴드들은 감염, 전염, 전쟁터, 격변들과 더불어 증식한다. 유전적이거나 구조적이지 않은 간-계적이며 자연(본성)에 반하는 분점/참여(participation contre nature)이다. 이질적 항들과 감염의 공-기능으로 이루어진 다양성들은 특정한 배치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족과 국가의 밑에서 작동하고, 다른 내용 형태와 표현 형태와 더불어 외부로부터 가족과 국가를 동요케 한다. 무리는 동물적 실재임과 동시에 인간의 동물-되기의 실재이다. 감염은 동물적 번식임과 동시에 인간의 동물적 번식의 증식이다.
어느 마법사의 기억 2 – ‘동물-되기’의 첫 번째 원리가 무리 및 감염과 결부된 다양체의 원리였다면, 두 번 째 원리는 예외적 개체와 결부된 것이다. 윌라드은 벤(쥐)과 에이허브는 모비딕과 결연관계를 맺음으로써 ‘동물-되기’가 된다. 여기에는 언제나 악마와의 협정이 있고, 이 악마는 때로는 밴드의 지도자로, 때로는 밴드 곁의 고독한 자로, 때로는 밴드보다 우월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모든 동물은 자신의 별종을 갖는다. ‘별종’이라는 희랍어 명사는 동등하지 않는 것, 거친 것, 탈영토화의 첨단을 가리킨다. 별종은 가장자리 현상이다. 그것은 다양체를 이루는 무리들의 극한이며,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 무리를 둘러싸는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장자리 내지 별종의 현상을 결여한 밴드는 없다.
어느 마법사의 기억 3 – 세 번째는 변환 내지 되기의 문턱에 대한 것이다. 각각의 다양성은 이미 공생하는 이질적 항들로 구성되며 문턱과 문들을 따라서 연속적으로 다른 다양성들 내에서 끊임없이 변환된다. 각각의 문턱이나 문에서 가장자리의 연속적 선은 인간에게서 동물로, 인간이나 동물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입자로 나아가서 지각될 수 없는 것에까지 이른다. 가장자리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섬유는 탈주의 선, 혹은 탈영토화의 선을 구성하는 것이다. ‘모비딕은 무리의 경계를 이루는 흰 성벽이다. 그것은 또한 악마적 결연관계의 항이다. 또한 그 자체 극한에서는 자유로운 낚시줄이다. 그것은 벽을 가로질러 선장을 이끌고 가는 선이다. 어디까지? 無에 이르기까지······’(모비딕이 에이허브를 끌고간 곳-‘일관성의 구도’)
되기나 다양성들에게 미리 형성된 논리적 질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준은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 기준들이 사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순간 순간마다, 일의 진행과 동시에 행사되며 위험을 헤치며 우리를 인도한다. 다양성이 매번 그들의 차원수를 결정하는 가장자리에 의해 정의된다면 가장자리들이 깨진 선을 그으면서 서로를 잇는 동일한 평면 위로 다양성들을 펼쳐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평면 위에 모든 차원들이 결집되고, 이때 다양성은 평평한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관성의 평면(구도)은 다양성의 차원수를 모두 재절단하며, 이러저러한 차원들로 이루어진 무수한 평평한 복수성들을 공존시키기 위해 그 속에서 교차를 실행한다. 즉 일관성의 평면(구도)은 모든 구체적 형태들의 교차이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 1 – 본질적 형태는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받아왔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었다. : 더 이상 형태도 기능도 갖지 않는, 그러한 의미에서 완전히 실재적임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도달하기, 그것은 운동과 휴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구별된다. 그것은 무한성에 의해서 나아가므로, 수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다. 무한히 더 크거나 작은 것은 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속도, 또는 운동과 휴지의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그러므로 각 객체는 무한한 다양성이고, 자연(Nature) 전체는 완벽하게 개체화된 다양성이다. 자연의 일관성의 평면은 거대한 추상기계와도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 개체적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 적용되는 평면(구도)의 통일체가 있다.
어린이들은 스피노자주의자들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철학자의 아동-되기이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관계 안에서 신체에 귀속되는 입자들의 집합체를 신체의 경도라 부른다. 이 집합체들은 이 신체의 개별화된 배치를 정의하는 관계의 구성에 의해 서로 부분을 이룬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기억 2 – 스피노자는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우리는 어떤 능력의 정도 혹은 이 정도의 한계에 따라서 능력을 갖는 정동들을 신체의 위도라고 한다. 경도가 어떤 관계 하에서의 연장적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면, 위도는 어떤 능력 하에서의 강도적 부분들로 이루어진다. 신체의 경도는 신체적 부위가 어떤 활동을 하는 어떤 기계인가 하는 규정성을 의미하고, 그 신체의 ‘외연’을 의미한다. 그것은 ‘욕망’이며 ‘의지’이다. 또한 신체의 위도는 ‘강밀도’, 내지 ‘내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분포에서 다른 분포로 강밀도를 변환시키는 속도와 정도를 표시한다.
어떤 헥시어티의 기억 – 헥시어티(특개성)이란 이런저런 질료, 이러저런 형상들, 그리고 이런저런 성질이나 특성들이 하나의 특정한 조건에서 섞이면서 지금 한 개체를 특별하게 만드는 ‘개체화의 원리’이다. 어떤 계절, 어떤 여름, 어떤 시간, 어떤 날짜 등은, 비록 그것이 사물이나 주체의 개체성과 혼동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결여하기 않은 완전한 개체성을 갖는다. 하이쿠처럼 복합적 개체를 구성하는 수많은 선과 같은 표지를 지니고 있는 것, 로르카의 ‘오후 5시’ 로렌스에게서, 포크너에게서의 하루의 시간들, 어떤 열의 온도, 어떤 흰색의 강도 등은 완전한 개체성들이다. 개별화된 집합으로서의 배치 전체가 헥시어티인 것이다. 헥시어티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점들로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선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리좀이다.
어느 평면 제작자(구도 기획자)의 기억 – 초월성의 구도와 일관성의 구도가 있다. 초월성의 구도는 발전과 함께 형성되는 조직화의 구조적 구도고, 조직화와 함께 진화하는 발전의 발생적 구도다. 이는 목적론적 구도, 계획, 정신적 원리로 작동된다. 그것은 신의 영혼 속에서 존재할 수 있고, 삶, 영혼, 언어의 무의식 속에서 존재할 수도 있다.
일관성의 구도는 자연적이고 내재적이다. 그것은 증식, 번식, 감염의 구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식은 진화, 형태의 발전, 혹은 형태의 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퇴행이 아니라 함입이다. 내재성의 구도이자 강밀도의 구도이며 기관 없는 신체이다. 일관성의 구도 위에서 나타나는 입자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의 순수한 관계는 탈영토화의 운동을 함축한다. 일관성의 구도는 끊임없이 조직화의 평면으로부터 추출되며, 입자들을 지층 밖으로 빠져 달아나게 하며, 빠름과 느림에 의해 형태들을 뒤섞어버리고, 배치들 혹은 미시배치들의 힘으로 기능들을 붕괴시킨다. 그런데 두 개의 구도를 추상적으로 대립시키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다. 일관성의 구도가 초월성의 구도로 변환되거나 반대로 추월성의 구도가 내부로부터 와해되며 일관성의 구도로 이해하는 경우 또한 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자연님의 댓글
자연집안에 일이 생겨 오늘 걸석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자료 업로드시 텍스트 잘림현상에 대한 대처 ]
한글.워드문서를 복사해서 홈페이지에 붙여넣을 때, 텍스트가 부분만 나타나는 잘림현상이 생깁니다.
그것은 한글.워드문서에서 웹문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한글.워드문서의 속성(밑줄, 볼드, 크기)들이 웹문서의 html태그로 변환되어 용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글.워드문서의 텍스트를 복사해서 --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 홈페이지에 올리면,
원본문서의 속성들이 지워지면서 잘림현상이 해소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홈페이지 개발도구인 그누보드가 적절한 대처법이 없는 듯합니다. 그누보드는
무료료 제공된 오픈소스이므로, 우리 요구에 최적화하기보다, 소스의 특성을 살펴가며 사용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최적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프로그램에 맞추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기계가 들어와 있고 기계에도 인간이 내장되어 있어서, 인간과 기계가 공생해야 하니까요^^*
토리진님의 댓글
토리진오라클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린 글의 봉합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