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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1장 후기 +2
방향 / 2017-02-17 / 조회 2,592 

본문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질문은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수 있는 것일까?등이다.

 

무의식중에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영원한 진리이며,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변하는 존재, 사물의 정확한 척도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며, 역사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제1장은 역사적 관점에서, 제2장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쓰여진듯 하다?? )

과거에는 정신이 엄격한 사고에게 혹사당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달라져 상징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하위문화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예술까지도 점점 더 지적으로 되어가듯이, 기분 좋은 것에 대해서도 100년전과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다.  우리의 생활양식 또한 더욱 정신적으로 되어가는 것은, 고대의 시간으로 보면 더 추악하게 보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재치있는 시각이 아름다운 체격과 숭고한 건축물보다도 더 중요하게 간주되나, 고대의 시각으로는 그것을 통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니체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종교적, 도덕적 그리고 미학적 감각의 대상들 역시 모두 사물의 표면에 속한 것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기서 적어도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닿아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밤하늘의 별들이 자신의 운세를 둘러싸고 돈다고 믿고, 도덕적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물의 본질이고 중심이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 

언어로 세계의 본질을 인식, 규정, 창조하며, 그리하여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인간이 사물에 대한 최고의 지식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사실 언어는 학문을 위한 노력의 최초단계일 뿐이다. 자연에 대한 영적인 해석 즉 미신, 의미부여, 기만, 세계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해당된다.

인간에게 가치 있고 놀랍고 기쁨에 넘치는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 즉 그 가정들을 만들었던 것은 정열, 오류, 그리고 자기기만이다. 최선의 인식 방법이 나리라 최악의 인식방법이 이를 믿도록 가르쳐왔다.

종교, 예술, 도덕이 성립하는 것을 진술할 때, 시작과 진행과정에서 형이상학적 개입이라는 가정이 없이는 그것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형이상학의 근본문제는 논리적인 것의 제1단계는 판단이다. 뛰어난 논리학자들의 규정에 따르면 판단의 본질은 믿음속에 있다. 모든 믿음의 밑바닥에는 느끼는 주체와 관계된 즐거움 또는 고통의 감각이 깔려있다. 우리들 유기적 존재는 근원적으로 어떤 사물이 유쾌함이나 고통으로 우리와 관련되지 않는 한 어떤 흥미도 느기지 못한다. 처음부터 모든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원시신앙은 아마도 다른 모든세계는 하나이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믿음일 것이다. 논리의 원시단계에서 가정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인과성에 대한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감각과 행위는 자유의지의 작용이라고 믿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행위의 주체와 행위, 행위의 표상은 별개여야한다-라는 차라의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를 생각나게 한다. 언더그라운드 니체에서는 자유의지와 꿈의 해석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의지의 자유에 대한 믿음은 모든 유기체의 근본 오류이며, 논리적인 것의 움직임이 그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진부한 것이다. 

▶29.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에서 :: 인간이 오류가 없는 순수한 인식이었다면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워내지 못했을거라고 말한다. 여기서 '순수한'을 나는 이데아적인 올바른것, 변하지 않는 것, 참인 것, 진리인 것, 아름다운 것등으로 읽었다. '순수하다'라는 것은 아포리즘 31, 32,33에서 계속하여 비논리적인 것, 불공정함, 오류의 불가피함과 대조되어 쓰인다.

​29.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인간이 더 깊이 생각할수록, 더 섬세하게 느낄수록,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할수록, 다른 동물과의 거리가 더 멀어질수록--그리고 동물 중의 영장으로 더욱 돋보일수록--그만큼 세계의 참된 본질과 세계의 인식에 더 가까워진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 인간은 학문을 통해 실제로 그것들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는 종교와 예술을 통해 좀더 많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순수한 인식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있으며,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아면 얼마나 좋겠는가!--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33.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모든 순수하지 못한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 그것은 오로지 인류의 보편적인 삶과 고뇌에 대한 동감이 개인에게는 아주 미약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하게 불평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고 있고, 이로써 현존의 가치를 믿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만을 원하고 주장하며 그 예외자들처럼 자신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모든 탈개인적인 것인 그들이게 전혀 인지되지 못하든지 아니면 기껏해야 희미한 그림자로 인지될 뿐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보통 사람에게 삶의 가치란 오직 자신을 세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앓고 있는 심한 공상결핍증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는 가능한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 자는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 만약 그가 인류의 총체적인 의식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그사람은 현존을 저주하면서 쓰러질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그 속에서 위로와 의지가 아니라 회의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무목적성을 보게 될 때,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의 활동도 낭비라는 특징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꽃이 자연에 의해서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보듯이 바로 우리가 인류로서 자신이 낭비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은 모든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다.
▶마지막 아포리즘 34. 안정을 위하여는 :: 개인적으로 감동을 넘어선 감동이다--진리는 삶을, 더 좋은 것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질문! 사람이 의식적으로 진리가 아닌 것에 머무를 수 있을까? 또는 그래야만 한다면 죽는편이 더 낫지 않을까? 당위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도덕이 당위였던 이상, 그 도덕은 우리의 고찰 양식에 의새 종교처럼 소멸된다. 인식은 동기로서 쾌감, 불쾌감, 이득, 손해를 존속시킬 쁜이다. -생략-

▶결국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절망을, 이론적인 결론으로는 파괴의 철학을 일끌고 오는 사고방식만 남게 되지 않을까? -- 인식의 영향에 대한 판정은 개인의 기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에는 좀더 과격한 욕망이라는 낡은 동기가 오랫동안 유전되어온 습관으로 인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겠지만 정화된 인식의 영향으로 점차 약해질것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으며 자연속에 있는 것처럼, 칭찬도 비난도 흥분도 없이, 지금까지는 공포만 느껴야 했던 많은 것을 연극을 보는 듯 보고 즐기면서 살아가게 될것이다. 과장을 탈피하게 될 것이며, 인간은 잔지 자연인 것만은 아니다, 또는 자연 이상의 존재다 라는 사상이 주는 자극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좋은 기질 필요하다.

그 기질은 확고부동하고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쾌활한 영혼이고 교활한 함정과 갑작스런 감정의 폴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것을 표현할 때도 투덜거기는 소리와 화가 나 굳은표정, 즐 오랫동안 사슬에 묶여 있던 늙은 개와 인간의, 잘 알려진  그 불쾌한 특징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 마음이다. 오히려 좀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 단지 그 이유때문에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을 벗어버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것, 나아가 거의 모든 것을 질투와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 도덕, 법칙, 사물에 대한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한다. 그는.................

댓글목록

하파타님의 댓글

하파타

니체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그것이 삶에 이로운지 아닌지를 따져 묻지요.
 진흙탕에서 뒹구는데 결벽이 지나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건강하게 견디려면 몸에 묻는 진흙을 긍정하지는 못해도 인정하고 그냥 넘겨야 하는 태도도 필요합니다.(물론 이는 결과의 영역에서의 얘기입니다.)
 그렇기에 니체는 삶을 위해 기꺼이 삶의 오류들마저 품으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인간적인 너무나인간적인1>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는 형이상학의 기원에 대한 것입니다.
세계를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 논리와 비논리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보는 형이상학의 기원을 분석합니다
.
니체는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수 있는 것일까?

1장의 전반적인 맥락을 읽어내는 방향의 즐거운 강독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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