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학의 고고학> Ⅱ. 문학과 언어 중 두 번째 강연 발제 +3
현
/ 2017-02-08
/ 조회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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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이야기할 때 그 토대가 되는 것은 ‘비어 있음’일 것이며, 이는 곧 문학이 그 자신을 ‘재이중화’하는 언어이다.
비평의 변화
오늘날의 일차 언어(고유한 이름 안의 언어)는 상대적으로 얇은 반면, 비평적 언어(이차적 언어이자 야콥슨에 의하면 메타 언어)는 전에 없이 두꺼운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생트 뵈브 시대의 비평이란, 독자들이 작품을 접하기에 앞서 독자와 작품을 매개하는 일차적인 형식이었다. 오늘날의 비평은 일차 언어와 관련하여 담론적으로 실증성을 확보하려 하는 한편, 이전의 비평과는 궤를 달리 한다. 첫째로 비평은 ‘작품의 창조하는 심리학적 순간’이 아닌, ‘작가의 글쓰기라는 두께 자체’에 눈을 돌렸고, 둘째로 비평이 일차 언어에 대한 단순한 독해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글쓰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평이 일차 언어를 둘러싼 담론이 되고자하며 동시에 제 스스로 글쓰기가 되고자 할 때, 그러니까 이차 언어이면서 일차 언어가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메타 언어란, 언어를 설명하는 특성, 일차 언어와 본성상 다르지 않은 특성으로 상위 언어학적 기능을 하는 언어를 이르는데, 야콥슨은 비평 역시도 문법이나 언어학과 같이 메타 언어로 제시한다. 하지만 비평을 메타 언어로만 한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 문학이 단순히 언어 체계의 지배를 순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위반하는 양상으로 나타나 ‘광기의 빠롤’이 되며, 그 순간에만 문학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랑그 내 확립된 코드로서 언어를 분석할 수 있다는 메타 언어가 ‘위반하는 빠롤’을 결코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타 언어 관념 역시도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력하다면 우리는 문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언어는 문법적 구조 속에서 형태론적 구조 속에서, 즉 언어라는 장소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되풀이 된다. 그럼에도 문학은 이런 되풀이 속에서 무력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품의 중심 자체에 되풀이’ 한다. 서양 문학의 시작인 『오디세이아』 혹은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한 『천일야화』 역시 그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되풀이 한다. 이런 옛 서사들과 근대 문학이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자기 언어의 이러한 두께 안에서’ ‘빠롤의 놀이를 통해’서 라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비평을 단순히 매개의 역할만을 하는 메타 언어라는 해석에서 벗어나 ‘언어 안에 존재하는 되풀이 가능한 그 무엇인가의 되풀이’라고 정의한다. ‘이중/분신들의 담론’, 다시 말해 형태나 문법적으로 반복되는 반면, 동시에 체계에서 벗어나는 자기 언어 사이의 분석이라고 말한다.
비평의 세 가지 형식이라면, 첫째로 수사학, 즉 언어의 형식적 되풀이를 다루는 학문이다. 둘째로 전통적 비평으로 다른 언어들로 하나의 의미를 되풀이하는 것, 주제의 동일성을 다루는 비평이다. 마지막 형식으로 푸코는 문학이 자기 내포, 자기 지시의 해독으로 기능할 공간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한다.
문학적 분석의 두 가지 접근 방식 : 기호론적 층위에 대한 해독과 공간화의 형식들에 대한 분석
- 기호론적 층위
문학은 어쩔 수 없이 기호 체계로 이루어졌으며 이 기호 체계는 단지 언어 내부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맥락에서 기능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이 어떻게 기호 체계 속에서 의미화 되는지 알아야 하는데, 과거의 ‘언어 작품’들은 하나의 기호로써 창조됨과 동시에 소비되는 식으로 의례와 같은 방식의 기표로 작용했다. 이것이 첫 번째 기호론적 층위이다. 두 번째 층위는, 특정한 문화 내부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서 기능하고 있는 언어학적 기호론으로써의 분석이다. 이어서 세 번째 층위는 기호가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차원의 것이다. 이를테면, 플로베르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각기 다른 시제들을 관계 짓는 방식을 말한다. 마지막은, 자기 내포의 층위인데 율리시즈가 자신에 대한 노래를 듣고 우는 것과 같이 애도가 아닌, 어떤 소재들로 인해 촉발되는, 작품의 시간을 초월한 깨달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은 분명 기호로 이루어졌고 기호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한편, ‘다른 기호들을 향해 전개되고 상승하고 확장’된다. 문학이란 ‘유일한 의미론적 표면에 한정되지 않는 한에서만 문학으로 존재하게’ 된다.
- 언어와 공간
문학의 기호적 되풀이, 그것은 또한 공간적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언어는 시간과 밀접하게 연관된 듯이 여겨지지만, 언어의 존재는 공간적이다. 첫째로 단어나 표현의 의미론적 가치가 표의 절단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둘째로는 단어들의 질서나 조화가 건축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기표와 기의가 함께 결합하거나 치환하여 기호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역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어의 공간성은 작품 외부에서 보여지기도 하지만 내부에도 존재한다. 루세는 코르네유의 연극에서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원환의 형식’으로 공간성을 발견했다. 『폴리왹트』의 경우는, 전에 없던 상승 작용, 나선 운동으로 공간성이 구현된다. 때로는 ‘작품 안에 존재하는 언어 자체의 공간성’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말라르메의 시가 이에 해당된다. 부채와 날개라는 가치, 그것은 ‘장막의 순간을 형성하는 동시에 절대적 전시의 순간’이다.
문학적 분석에 있어 기호론적 층위의 해석과 공간적 분석이 항상 평행해야만 할까. 푸코는 이 질문에 대해 ‘기호론적 가치와 그것들이 공간화되는 공간을 동시에 출현시켜줄 언어’가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한다.
애초에 언어는 시간 속에서 기록과 기억에 복무했지만, 문학이 됨으로 인해 되풀이의 장소가 되었고, 그러나 결코 시간에 기대지 않음으로써 새로이 언어의 기원이 되었다.
‘문학은 이 밝혀진, 움직이지 않는, 갈라진 언어, 다시 말해, 지금, 오늘 우리가 사유해야 할 이것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지금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이 문학이라는, 발제문의 마지막 문장이 강하게 다가오네요.
짧고 간명한 발제, 이해한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발제라 세미나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한 만큼 가져가는 사람이 발제당번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중에 <문학의 고고학>을 읽었던 시간을 현님이 추억한다면,
함께 읽었던 우리들과 함께 이 발제의 시간을 떠올리겠지요.
또 비평이 글쓰기라면, 우리의 비평은 이렇게 발제와 후기, 그리고 댓글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그렇게 하나의 비평행위가 현님의 발제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ㅎㅎ
에스텔님의 댓글
에스텔
어제 분명 댓글을 달았는데 사라짐은 어찌된 일인지. . .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하셨지만 성실하게 발제하셨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 성실하다는 것이 별 필요없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참 어리석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실험자들을 지속케하는 것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각자의 성실함이라 생각합니다.
자연님의 댓글
자연
21세기에 살고 있는 저는 생트 뵈브 시대의 비평에서 갇혀 있었더군요.
비평이 일차 언어에 대한 단순한 독해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하나의 글쓰기가 되고 있다는 푸코의 말이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라고 말했던 롤랑 바르트와도 연결되는 지점이어서, 2년전 읽었던 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을 다시 들춰봤습니다. "목소리는 그 기원을 상실하고, 저자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들어가며, 글쓰기가 시작된다."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네요. 꾸준한 책읽기를 통해서 이전 것이 되살아나고, 지금 것은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는 즐거움, 이게 다 문학세미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