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고고학> 후기 -문학과 언어 중 두 번째 강연 +4
에스텔
/ 2017-02-08
/ 조회 2,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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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문학과 언어 중 두 번째 강연”을 공부했습니다. 푸코는 비평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독자와 작품을 매개하는 고전주의적 비평(생트 뵈브 시대의 비평)에서 비평적 행위는 증식했지만, 비평적 인간이 사라지는 모순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비평은 이런 일차적인 언어로서 단순한 독해에서 벗어나 소설, 시, 성찰, 철학으로 옮겨가고, 그 자체로 하나의 글쓰기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는 생트 뵈브식 비평이 아직도 나를 크게 지배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문학에 깃든 철학을, 문학적 언어로 주로 은밀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이름을 단 책들의 표현이 낯섭니다. 번역서의 비문은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마저 약화시킵니다. 문학세미나 회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절로 해결된 내용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또 질문을 하면서 정성스런 대답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들뢰즈와 푸코가 같은 용어를 쓰지 않지만 생각이 일치하는 지점이 많다는 것은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푸코가 각자 진실을 가지고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어떤 텍스트도 정답은 없으며 주체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에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창조하는 주체가 아니라, 진리에 매혹된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푸코 입장에서 보면, 내 생각도 개인이 가진 진실일 수 있겠군요.
세미나를 시작할 때 후기를 쓰겠노라고 발제문 여백에 열심히 메모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미나가 끝나가며 알아보기 힘든 글자만큼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그 때 반장을 비롯한 회원님들이 말씀해주셨지요. 한 문장이라도 꽂히면 건진 거라고요. 오늘 나에게 꽂힌 부분은 “부채와 날개”입니다. 푸코는 말라르메의 언어를 부채와 날개에 빗댑니다. 새가 날개를 펼쳤을 때, 새는 시선으로부터 가려지지만 날개의 풍부함이 보입니다. 부채가 얼굴을 가리면, 부채의 그림 자체가 펼쳐집니다.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언어, 이런 말라르메의 기획이 문학이라지요.
푸코는 문학을 질문하고 다시 문학으로 돌아갑니다. 출발한 지점을 떠나 다시 처음으로 도착합니다. 한 장 한 장, 도대체 무엇을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계속 첫 장의 ‘옮긴이의 앞글’로 돌아갑니다. 끊임없이 제 자신 위로 겹쳐지며 스스로를 벗어나는 말들, “부채와 날개”도 이 문장을 되풀이 하는 것 같습니다...
- -이후로 많은 생각들이 문학을 넘어 삶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채와 날개처럼 허공에서 접혔다 폈다를 반복했습니다. 이쯤에서 후기를 마치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냥 여기까지가 딱 좋겠습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비평이 글쓰기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글쓰기가 어쩌면 비평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에스텔 님의 후기를 보면서 실감합니다.
옮겨온 문장에서도 새로 적은 이의 무엇이 드러나거든요.
그점이 글쓰기의 매력이기도 하고, 우리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지요.
그런 면에서 이렇게 신속하고 내밀한 후기는 저를 무척이나 자극하는 동시에 즐겁게 합니다.
한 가지, 글 안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고전주의적이라는 것과 고전적이라는 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전주의적이라는 것은 고대의 것을 불러와 새로이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고,
고전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상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트 뵈브의 비평은 우리의 관점에서 단순히 시간상 고전적일 수 있지만,
사실은 매우 근대적 비평형태이므로 고전이라거나 고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고대 <호메로스>의 주석에서 비평의 원형을 찾는 푸코의 비평론이 고전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진리에 매혹된 주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루터가 목숨을 걸고 성서를 번역해냈을 때, 번역불가능한 진리는 사라졌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를 믿습니다.
신이 없어도 사라지지 않는 신앙심이고,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진실을 생산하는 주체라기보다 진실을 강요당하는 주체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어린아이처럼,
선거 때마다 1번 찍을 거야, 2번 찍을 거야? 아니면 3번, 4번? 하고 선택을 강요당하는 미숙한 어른들처럼.
진실을 생산하는 일이 진리를 믿는 것보다 인간에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면,
저는 그쪽으로 제 삶을 밀어붙여보고자 합니다. ㅎㅎ
철학이 지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태도라면, 저는 문학 역시 그렇다고 믿습니다.
이게 저의 신앙심이고 이데올로기겠네요.
문학이 언어와 공간이 맺는 관계라면, 그래서 문학의 본질이 언어의 공백이라면
저는 거기에 우리의 진실이 있다고 믿겠습니다. 물론 지금은 말이지요.
문학을 넘어 삶으로 들어온 에스텔 님의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습니다.
제 댓글은 여전히 에스텔 님의 후기에 대한 비평(특권적인 무엇이 아니라 독자의 글쓰기로 확장된)이므로
에스텔 님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순환'이라던 롤랑 바르트의 지령(!)을 기억하고 계시죠? ㅎㅎ
에스텔님의 댓글
에스텔
'고전적'과 '고전주의적'의 차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지적은 참 즐겁습니다.
그리고 전 진리를 자발적으로 믿습니다. 또 그 진리가 제 몸에서 되풀이되기를, 새롭게 생산되기를 바라지요.
강요하고 억압하는 무리는 진리를 왜곡하는 존래라고 보지요.
삼월님과 제가 비록 다른 견해를 갖지만 문학으로 대화하고 연대할 수 있음은 기쁜 일입니다.
자연님의 댓글
자연
제가 이번 장에서 건져낸 문장은
"문학은, 무한히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게 만드는 하나의 무한한 언어다."
쉬운 듯, 쉽지 않은 푸코의 문학에 대한 정의 중 하나입니다.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에서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글이 있어서 옮겨왔습니다.
"그(말라르메)에게서, 그리고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말하는 것은 저자가 아닌 언어이고,
쓴다는 것은 <자아>가 아닌, 언어만이 작업하고 수행하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님의 댓글
자연
<텍스트의 즐거움>이 이렇게 좋은 책인줄 새삼 알게 되네요.
<문학의 고고학> 끝나면 다시 찬찬히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푸코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과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다시 읽으면 바르트와 푸코의 문학에 대한 사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