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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고원] 9. 1933년: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발제문(2/10)
삼월 / 2017-02-10 / 조회 2,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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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분성

인간은 선분적 동물이다. 우리는 모든 곳, 모든 방향에서 선분화되어 있다. 거주, 왕래, 노동, 놀이, 집, 길, 공장 등 모든 체험과 공간도 마찬가지다. 선분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항적 대립을 통해, 점점 확장되는 원환 속에서 순환적으로, 그리고 각 절차의 선분들이 이어지는 선형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항적, 순환적, 선형적이라는 것은 선분성의 세 형상들이다. 각 형상들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포착하거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지나가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 변환되기도 한다. 원래 선분성의 개념은 민속학자들이 원시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문제는 원시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다.

원시적 선분성은 가변적 관계에 기초한 다음성적인 코드의 선분성이며, 국지적 분할에 기초한 순회적 영토성의 선분성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선분성의 조직을 구성한다. 국가는 선분성 위에서 행사되며, 자신의 고유한 선분성을 소유하고 부과한다. 근대의 국가가 중심화되어 있다는 사회학자들의 주장은 오해다. 중심화된 것과 선분적인 것의 대립은 없다. 근대적 정치체제는 중심화되어 있으면서도 선분적이다. 기술지배는 선분적 분업에 의해 진행되며, 관료제는 구획된 사무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근대적 삶은 선분성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더욱 경화시켰다. 선분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의 대립보다는 선분성의 유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분성의 세 형상으로 ‘원시적이고’ 유연한 유형과 ‘근대적이고’ 경직된 유형을 구별할 수 있다.

1) 이항적: 이항대립은 원시사회에 강하게 존재했지만, 원시사회는 이원적 조직으로 존립할 수 없었다. 이항대립은 오히려 결코 이항적이지 않은 기계와 배치의 산물이다. 일대일 대응관계 및 계속되는 이항적 선택으로 기능하는 이원적 기계는 국가사회의 고유한 특징이다. 근대사회는 이원적 선분성을 완전한 조직화 수준으로 상승시켰다.

2) 순환적: 순환적 선분성이 반드시 동심원적이거나 동일한 중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원시의 유연한 체제에서 중심은 이미 매듭으로, 눈 혹은 검은 구멍으로 작용했다. 중심화와 선분성은 함께 나타난다. 근대사회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분성은 경직화되고, 모든 중심이 공명하는 한 모든 검은 구멍은 축적의 점으로, 모든 눈 뒤의 어떤 교차점으로 귀착된다. 중심화된 국가는 선분성의 폐기가 아니라, 구별되는 원들의 동심원화 내지 중심들의 공명을 통해 구성된다. 원시사회가 공명을 금지한다면, 국가사회는 공명기구로 작용하며 공명을 조직화한다.

3) 선형적: 각각의 선분은 자신의 측정단위를 가질 뿐 아니라, 선분들 사이에 등가성과 번역가능성이 있다. 원시적인 기하학은 선분화의 선분들과 분리할 수 없는 조작적 기하학일 것이다. 원이 아니라 둥근 것, 직선이 아니라 줄. 국가의 기하학은 유연한 형성체를 이상적 본질로, 과정중인 선분화를 미리 결정된 선분들로 대체하거나 고정시킬 것이다. 사적 소유는 격자화되고 초코드화된 공간을 함축한다.

 

2.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중심화와 선분적인 것의 대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시적이고 유연한 선분성과 근대적이고 경직된 선분성의 대립도 마찬가지다. 양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고, 서로 속에 얽혀 있다. 원시사회는 경직성, 수목성의 씨 역시 가지고 있고, 국가를 예방하는 동시에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사회의 경직된 선분성은, 유연한 조직체에 잠겨있음으로 유지된다. 유연한 선분성은 우리 안에 남은 야생인의 잔해가 아니라, 경직된 선분성과 뗄 수 없는 현재적 기능이다. 모든 사회와 개인들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두 가지 선분성으로 동시에 가로질러지고 있다. 양자는 분리할 수 없는 동시에 서로 공존하고, 관통하며, 서로가 서로를 전제한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며,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이다. 몰적인 조직이나 경직된 선분성은, 섬세한 선분화의 세계를 가로막지 않는다. 지각, 감정, 대화 등의 미시정치가 이 선분화의 세계를 형성한다.

성이나 계급과 같은 거대한 이항적 집합은 분자적 배치 또한 통과한다. 사회적 계급들은 분자적 조합의 복수성을 통해 동일한 운동이나 분할, 목적과 투쟁방식을 갖지 않는 ‘대중’으로 귀착된다. 그러나 대중을 분자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봉착한다. 계급은 대중들을 분명히 구분하는 동시에 응결시킨다. 대중은 계급으로부터 연원하며 거기서 흘러나온다. 파시즘에 대해서도 몰적인 선분이나 집중화와 전혀 다른 분자적 체제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체주의적 국가는 거시정치적 척도, 경직된 선분성이나 전체화 및 집중화의 특정한 양식이다. 스탈린 독재나 군사독재처럼 파시즘 없는 전체주의 국가도 있다. 독일의 파시즘은 나치의 집권 이전에 이미 분자적 초점들과 분리될 수 없었다.

파시즘은 어디에든 존재하는 미시적 검은 구멍에 의해 정의된다. 중앙의 거대한 검은 구멍 안에서 공명하기 이전에도 그 자체로 존립하며, 다른 구멍들과 소통한다. 전쟁기계가 각각의 구멍에 장착될 때 파시즘이 존재하게 된다. 전체주의 국가의 수립 이후에도 미시-파시즘은 존속할 필요가 있다. 히틀러는 국가가 아니라 권력을 정복했다. ‘사회의 모든 세포에 침투할 수 있는 비교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수단’을 제공해주는 미시-조직들을 장악했던 것이다. 파시즘을 위험하게 만든 것도 미시정치적 내지 분자적 능력이다. 파시즘은 무엇보다 대중운동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권력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게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속임수에 의해 함정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자세, 태도, 지각, 예상, 기호계 등을 모양 짓는 미시적 형성체들을 분자적으로 관통하는 복합적 배치와 관련 있다. 욕망은 무차별적인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라, 정교한 몽타주의 결과요, 고도의 상호작용을 엔지니어링한 결과다. 이미 파시즘적이 된 욕망을 결정하는 것은 극히 유연한 선분성이다. 분자적이고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것과 함께 파시스트가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알고 배양하며, 소중히 껴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는 이미 파시스트이다. 그러면서도 쉽게 몰적인 수준에서 자신이 반파시스트라고 믿는다.

 

3. 흐름에서 양자로

분자적이고 유연한 선분성에 관해 피해야 할 네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가치론적으로, 약간의 유연성이 사태를 좀더 ‘낫게’ 하는데 충분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미시-파시즘으로 인해 위험한 것이 되며, 섬세한 선분화는 가장 경직된 선분만큼이나 해로울 수 있다. 두 번째는 심리학적으로, 분자적인 것을 개인적인 혹은 개인 간의 것으로 돌려버리는 오류이다. 개인적인 선에도 분명히 사회적-실재가 존재한다. 세 번째는 거시와 미시,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구별이 크고 작음 같은 형태의 차원으로 구분된다는 오류이다. 분자적인 것은 몰적인 조직만큼 사회적 장 전체와 외연을 같이 한다. 네 번째 오류는 두 선의 질적 차이가 서로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선은 서로 교차하고 자극하며, 서로 가로막지 않는다.

사실 몰적인 조직의 강화는 요소들의 분자화를 자극한다. 기계가 지구적·우주적이 될 때, 배치들은 소규모화하고 미시적으로 된다. 또한 몰적인 거대 조직은 미시적 불안정성과 짝을 이룬다. 사회의 거시정치는 불안정성의 미시 정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분자적 운동은 완결되지 않으며, 거대한 조직에 반하거나 그것을 헤치고 지나간다. 언제나 탈주선이 집중화를 피하면서 총체화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하나의 사회는 그 모순들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미시 정치의 관점에서 하나의 사회는 분자적 탈주선들에 의해 정의된다. 언제나 무언가가 흘러가고 탈주하며, 공명기구를, 초코드화 기계를 피해간다. 프랑스의 68혁명은 거시정치의 관점에서 지각할 수 없는, 분자적인 것이었다. 분자적인 흐름이 거시정치를 회피하고 점점 커져,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분자적 탈주와 운동이 몰적인 조직(성, 계급, 당의 이항적 분포)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크기, 척도의 차원이 아니라 고려되는 준거 체계의 성질에 의해 구별된다. ‘선’이나 ‘선분’들로 몰적인 조직을 말할 수 있다면, 몰적인 구성을 위해서는 다른 말들을 찾아야 한다. 이제 선은 흐름에서 양자로 연장된다. ‘권력의 중심’은 이 양자의 경계에 있다. 권력은 선과 흐름 사이에서 작동하는 상대적 적응과 변환이다. 중앙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는 권력을 통해, 권력의 중심이 그 능력과 지배보다 회피와 무능력에 의해 더 잘 정의됨을 알 수 있다. 미시경제 역시 작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큼‘(양자화된 흐름)에 의해 정의된다. 선분을 양자에 적합하게 조정하는 일은 전능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강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 무언가가 탈주한다.

 

4.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가브리엘 타르드는 현재 미시사회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를 훨씬 일찍 제기했다. 뒤르켐과 같은 당시의 사회학자들은 이 문제들을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으로 치부했다. 타르드가 주목한 것은 모방, 대립, 창안으로서 표상보다 하위에 있는 모든 질료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아니라 흐름 내지 파동에 관한 것이다. 모방은 흐름의 파급이고, 대립은 흐름의 이항화·이항구조화이며, 창안은 흐름의 결속 내지 접속이다. 흐름은 결국 믿음과 욕망의 흐름이다. 믿음과 욕망은 흐름에서 양자화되면서, 모든 사회의 기초가 된다.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흐름이란 집합적 기표에 의해 초코드화될 수 있는 개인들로 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선분적인 것과 양자적 흐름도 이렇게 구별할 수 있다. 변이적 흐름이란 언제나 코드들을 피하고 빗겨간다. 양자란 탈코드화된 흐름 위에서 탈영토화의 징표·정도를 의미한다. 경직된 선은 쇠약해진 코드를 대체하는 초코드화를 뜻하며, 선분들은 초코드화하거나 초코드화한 선 위에서 재영토화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장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들에 의해 활기를 얻는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탈주이며, 모든 것은 대중의 문제이다. 흐름을 통해 ‘접속’과 ‘결속’의 개념을 구분할 수 있다. ‘접속’은 탈코드화·탈영토화된 흐름이 서로를 활성화하고 탈주를 자극하며 양자를 추가하고 가열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결속’은 상대적인 정체로 탈주를 봉인하고 일반적 재영토화를 작동시키며 초코드화가 가능한 지배 아래로 흐름을 밀어 넣는다.

그러나 재영토화가 일어나는 곳은 언제나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이다. 결국 탈영토화의 첨단이 전체의 재영토화를 작동시킨다고 볼 수 있다. 대중운동은 자극되고 연결되지만, 계급 간에 비약하며, 변이를 거쳐 계급관계를 변형시키는 새로운 양자를 이탈·방사하거나, 초코드화와 재영토화를 의문에 부치고 다른 곳으로 탈주선이 흐르게 하기도 한다. 계급의 재생산 아래 계급의 가변적 지도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정치적 결정은 필연적으로 유혹과 욕망을 통해 미시적 결정의 세계로 침투하지만, 그 결정은 다른 방식으로 예상하고 평가해야 한다. 정치와 정치적 판단은 언제나 몰적이지만, 이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평가이다.

 

5. 지도의 세 가지 선

우리는 세 가지 선으로 지도를 그릴 수 있다. 1) 서로 얽힌 코드와 영토성의 상대적으로 유연한 선. (원시적 영토성) 2) 선분들의 이원적 조직으로, 공명하는 원들의 동심성으로, 일반화된 초코드화로 나아가는 경직된 선. (국가기구) 3) 탈주선·탈주선들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코드들은 탈코드화와 분리할 수 없고, 영토들도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초코드화와 재영토화가 사후적인 것도 아니다. 탈주선이 일차적이라거나, 경직된 선분들이 이미 있으며, 유연한 선분화는 이 둘 사이에서 동요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 가지 선은 부족과 제국, 전쟁기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또한 세 가지 선은 서로 공존하고, 변환되며, 관통한다. 선들은 동일한 집단, 동일한 개인 안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추상기계>의 동시적 상태들을 고려해 보자. 한편에는 초코드화의 추상기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작동하는 변이의 추상기계가 있다. 초코드화의 추상기계가 경직된 선분성, 거시적 선분성을 정의한다. 모든 중심을 공명하게 하고,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연장시키면서 선분들을 생산·재생산하는 이 추상기계는 국가기구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 추상기계가 국가기구 자체는 아니다. 국가기구가 이러한 추상기계와 동일시되는 경향에서 전체주의는 의미를 갖는다. 국가가 전체주의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초코드화가 아니라, ‘자족적 체제’ 내에서 ‘막힌 병’이라는 진공의 책략 아래 재영토화를 수행함으로서 추상기계와 국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작이다.

이와 달리 변이의 추상기계는 탈주선을 그린다. 탈주의 흐름은 자신의 선 위에 전쟁기계를 설치한다. 이때 몰적인 선이 균열과 틈새에 작용을 받기도 하고, 탈주선이 검은 구멍을 향해 끌려가거나, 흐름의 접속이 제한적 통접에 의해 대체되며 양자의 방사가 중심점들로 전환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탈주선들은 접속되고 강렬도를 지속하면서 검은 구멍에서 기호-입자를 분출시킨다. 동시에 탈주선은 미시적 검은 구멍 위로, 탈주선을 가로막는 분자적 통접 위로 끌어내려진다. 또 동시에 초코드화된 중심의 검은 구멍 위에서 안정적이고 이항화된, 동심원화되고 축화된 선분 속으로 들어간다.

권력의 중심 내지 초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이 모든 선들의 착종을 보여줄 수 있다. 공통된 중심점이란 다른 점들이 혼재하는 점이 아니라, 저 너머 다른 모든 점들의 뒤에서 공명하는 점이다. 국가는 다른 모든 점들을 끌어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을 위한 공명통이다. 집중화는 언제나 위계적이지만, 위계는 언제나 선분적이다. 권력의 중심 각각은, 분자적이며 미시논리적인 조직체 위에 행사된다. 권력의 중심은 미세한 선분화에 의해 활동하며, 세부적인 것 안에서 작동한다. 푸코의 ‘규율권력’ 분석은 도피와 탈주가 상충하며 역전이 야기되기도 하는 ‘불안정한 초점들’을 보여준다. 미시적 직물을 갖지 않는 권력의 중심은 없다. 이는 억압의 체계에서 피억압자들이 언제나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정치에서 능력과 무능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정치가란 기호-인도자, 기호-입자들로서 흐름과 접속되며, 검은 구멍을 뛰어넘는 양자를 방사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은 탈주선을 그리는 중이며, 그것을 따라가거나 앞서가며, 때로는 추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 자체를 규제하는 권력이란 없다. 지배자의 이미지, 국가의 이념, 비밀 통치는 우리를 우습고 허구적인 표상에 빠지게 한다. 권력의 중심에 의존하는 것은 이러한 추상기계를 실행시키는 배치, 지배적 선분과 지배되는 선분의 기능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과 흐름을 경직된 선분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배치이다.

 

6. 전쟁기계의 위험

각각의 선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위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 위험들은 공포, 명확성, 권력, 거대한 혐오이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몰적 조직을 안전이라 믿고 수목상에 집착한다. 이로 인해 이항적 기계와 공명, 우리를 지배하는 초코드화 체계를 우리가 욕망하게 된다. 또 우리는 충만한 것 속에서 약간의 유연성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믿고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이러한 유연성과 명확성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유연한 선분성은 경직된 것의 감성과 가식을 소규모 형태로 재생산한다. 사람들은 탈영토화되어 대중이 되지만, 이는 대중의 운동과 탈영토화 운동을 경직·무화시키며, 가장 나쁜 주변적 재영토화를 고안한다. 각자가 자신의 검은 구멍을 발견하고, 그 구멍 안에서 위험한 것이 되면서 작은 불안정성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위험인 권력은 두 가지 선에 동시에 존재한다. 모든 권력의 연쇄와 씨실은 그것을 회피하려는 세계 속에, 변이적 흐름의 세계 속에 침수한다. 권력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이 무능력이다. 탈주선을 멈추게 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기는 위험이다.

네 번째는 탈주선 자체가 죽음이나 제물의 향기가 되어 사람들이 파괴되는 상황이다. 탈주선은 다른 선과 접속하여 파괴와 멸망의 정욕으로 바뀔 수 있다. 탈주선 안에는 탈주의 욕망, 탈주를 그리는 배치가 있고, 그것이 전쟁기계의 유형이다.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모든 창조는 이 전쟁기계를 관통하며, 국가기구와 상반되는 유목적 기원을 갖는다. 그러나 국가는 이 전쟁기계를 고착된 군사제도의 형태로 국가기구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전쟁기계가 변이적 능력을 상실할 때, 남는 목적은 전쟁뿐이다. 이때, 전쟁이란 단지 전쟁기계의 혐오스러운 잔재일 뿐이다. 여기서 전쟁기계는 더 이상 탈주선을 그리지 않으며, 순수하고 차가운 멸망의 선을 그릴 뿐이다.

파시즘의 역설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전체주의의 경우 문제는 국가의 군대이지 전쟁기계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파시즘이 전체주의 국가를 구성한다는 것은 하나의 전쟁기계가 국가를 탈취한다는 의미이다. 비릴리오에 따르면, 파시즘에서 국가는 전체주의적이라기보다 자살적이다. 파시즘에서 강렬한 탈주선은 파괴 내지 순수한 멸망의 선으로 전환된다. 국가 그 자체의 자살 이외에는 어떤 출구도 없는 절대적 전쟁의 흐름이 국가를 관통하는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자신의 통치수단을 확실하게 발견한 것은 일상생활의 공포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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