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진시황본기>에 대해
기픈옹달
/ 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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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고에서 강의한 자료를 나눕니다.
1. 천하통일天下統一
전국칠웅 가운데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진시황본기> 뒤에 붙은 가의의 글에서는 진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든다. 진은 서쪽 변경에 위치했던 까닭에 동쪽의 여러 나라를 상대할 수 있었다. 천하의 한복판에 위치한 조•위•한이 이리저리 치이면서 고생한 점을 생각하면 지리적 위치가 얼미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초는 남쪽에, 제는 동쪽에, 연은 북쪽에 치우친 나라가 아니던가. 변경에 위치했다는 점에 진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매우 험준했다는 점을 더해야 할 것이다. 길이 많이 정비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진으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좁고 험했다. 함곡관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진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관문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진은 동쪽의 여러 나라를 비교적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지리적 이점 만이 진의 통일을 가능케한 배경이었을까? 여기에 각지에서 불러모았던 수 많은 인재가 있었다는 점을 더해야 하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효공 시절 이미 상앙을 등용하여 진은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체제를 갖추었다. 덕분에 진은 다른 나라와 달리 법이라는 통치이념을 갖출 수 있었다. 공적에 따른 철저한 포상체계는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박차고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전통과 관습으로 철저하게 신분의 위계가 나누어진 사회에서 진의 이러한 체제는 적지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인재등용을 통한 진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진시황 아래에는 이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본디 초나라 출신으로 성공이라는 가치 하나를 위해 진으로 넘어온 인물이었다. <이사열전>에 실린 창고쥐와 화장실쥐의 이야기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그도 타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내쫓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가 진시황에게 올린 글은 매우 흥미롭다. 태산은 흙덩이를 가리지 않으며, 황하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도모하는 사람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품을 줄 알아야한다. 이글을 읽은 진시황은 그를 자신의 곁에 두었고, 그는 통일제국의 기틀을 닦는 인물이 된다.
지리적 이점과, 훌륭한 인재. 그러나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보잘 것 없다면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진시황을 이어 제위에 오른 이세황제 호해를 기억하라. 아무리 좋은 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능력없는 사람의 손에 내맡겨지면 무너지는 것은 금방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의 주요한 지점을 이야기해야겠다. 바로 진시황이라는 걸출한 인물이다. 그 없이 어떻게 천하통일이 가능했을까?
<진시황본기>의 여러 부분에서 진시황의 탁월한 역량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 볼 부분은 그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붙인 부분이다.
“…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 짐이 듣건대 태고 때에는 호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 삼세에서 만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219-220)
천하통일이라는 유래없는 업적을 세웠으니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다. 이에 신하들이 올린 것은 ‘태황泰皇’이라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는 진시황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옛 삼황오제에서 각기 하나씩 따서 ‘황제’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든다. 유래없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뿐인가? 그는 이전에 있었던 시법을 폐지한다고 선언한다. 시법은 시황제의 말처럼 군주가 세상을 떠난 뒤 그 행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호칭이다. 그는 이것이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평가하는 말이라며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다. 자신은 황제 가운데 첫번째이니 ‘시황제’라는 호칭을 쓰며, 이어서 숫자를 세어 붙이면 된다고. 만세토록!
여기서 누구는 신하와 자식마저도 고려하지 않는 그의 독단적인 부분을 꼬집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돌려보면 그는 역사의 흐름위에서 홀로 튀어나와 스스로 자기를 선언하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에 유래 없는 일을 했다. 고로 나는 역사에 평가받지 않는 새로운 인물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당당한 주장인가. 더구나 역사는 그의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의 바람대로 역사는 그를 ‘시황제’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수 많은 황제가 있었고, 그 가운데는 새롭게 천하의 지배자로 오른 첫번째 황제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시황제’라는 호칭을 얻을 수는 없었다.
사마천은 어떤 사람의 삶은 태산보다 무겁다고 논하기도 했다. 역사위에 놓인 인간들은 결코 균일하지 않다. 그 가운데는 우뚝서서 변곡점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있다. 진시황 역시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천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다.
2. 제국의 탄생
‘대륙의 기상’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지. 인터넷에 유행하는 저 말은 중국의 특징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때 쓰인다. 반도 - 대한민국과 열도-일본에 비해 중국은 대륙의 풍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저 큰 나라가 하나의 덩어리로 수천년간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세계에는 중국와 어깨를 겨룰만큼 커다란 나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전부 근대 국가이다. 그 옛날 드넓은 영토를 자랑하던 제국은 역사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째서 저 대륙-중국은 여러 나라로 쪼개지지 않고 하나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해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그 시작은 어쨌든 진시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하나의 틀 안에 중국-천하를 담아내려 했던 인물이다.
천하를 나누어 서른여섯 군을 만들고 군마다 수, 위, 감을 두었다. 백성을 일컫는 말을 ‘검수’로 고쳤다. 천하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에 모으게 한 후 녹여서 종거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일천 석이었으며 궁궐 뜰에 두었다. 법률과 도량의 무게와 길이를 통일했다. 수레와 바퀴 폭을 동일하게 했으며, 문자를 통일했다. (222)
진의 통일은 단순히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시황은 천하를 하나의 행정 체계로 묶었으며,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켰고 도로를 닦아 천하가 서로 통하도록 만들었다.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단순히 진의 몸집을 불린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몸집을 위한 핏줄과 신경까지 놓았다. 각기 다른 조각을 이어붙이지 않고 천하를 하나로 새롭게 변신시켰다.
진시황 사후 진의 몰락이후 다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지만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수백년을 유지한 나라가 진의 성립 이후 별다른 부흥운동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방의 한漢은 춘추전국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름이다. 이는 이미 이전의 제후국으로 나뉜 체제가 그만큼 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진시황이 제시한 새로운 체제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실제로 이후 천하가 몇 차례 나뉘기도 했으나 그렇게 나뉘었던 천하는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진시황은 황제 한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전의 모습을 참고하자는 여러 신하의 의견을 묵살한다. 은이나 주처럼 자식들을 제후로 삼아 변방에 두자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진시황의 브레인 이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새로운 시대인데 어찌 과거를 좇을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몰락한 과거를 따를 필요가 대체 무엇인가?
따라서 옛 성현의 말을 빌어 이 새로운 제국을 평가하려는 자들을 없애야 한다. 과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대체 어느 정도 였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나, 역사는 진시황시대에 고대의 책들을 불태웠던 ‘분서’ 사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천하에 명을 내린다. 관리를 스승으로 삼을 것!
절대적인 권력은 불멸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진시황은 신선을 꿈꾸었으며 죽지 않는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수 많은 돈을 써서 신선이 되는 비법을 얻으러 사람을 내보냈다는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단순히 그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영정’이라는 한 개인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다스리는 천하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가 불사의 방법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반대로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국은 만세토록 가리라!!
그러나 많은 재물과 시간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엉뚱하게 불똥이 뛴 곳은 유생, 훗날 유학자들의 시조격이 되는 인물이었다. 결국 수 많은 유생들이 생매장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갱유’의 사건이다.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폭압적인 정치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광기의 결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진시황은 자신이 그렸던 제국의 모습을 찾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많은 역사는 이런 그의 잔혹함으로 진이 몰락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진은 황제가 휘드른 폭력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 황제 일인의 지배체제 때문에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3. 사슴과 말을 혼동하다
진시황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는 분서갱유를 단행하며 강력한 지배 체제를 만들려고 했으나 천하 변경까지 그의 권력이 미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그는 여러차례 수도를 떠나 여러 지역을 누비며 돌아다닌다. <진시황본기>에는 그가 돌아다니며 썼다는 여러 비문이 실려 있다. 이렇게 그가 많이 돌아다녔던 것은 직접 천하를 누비며 각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죽음을 맞는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에 임박하기 까지 후계자도 제대로 세워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죽음에는 여러 이야기가 떠도는 데 그 가운데는 불사의 약을 구하다가 약물중독에 걸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랬을까? 그보다는 그가 무게를 달아 문서를 처리했다는 데 주목해보자. 그는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일을 직접 처리했다. 그는 너무 많은 업무로 과로사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죽음은 철저히 비밀로 지켜진다. 이는 그의 측근이었던 이사와 조고, 그리고 막내 호해가 작당하여 권력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편지를 거짓으로 꾸며 첫째 아들 부소를 죽게 만들고, 무사히 수도도 돌아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 진시황의 시체는 이미 썩어 그 냄새를 가리기 위해 수레에 생선을 함께 실었다고 한다.
아비가 훌륭하면 자식은 불행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비교당하기 마련이니.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호해는 매우 못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탄탄하게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벌인다. 그 가운데는 아버지 진시황의 무덤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진시황의 무덤은 매우 거대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속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함께 매장 되었다고 한다. 수 많은 후궁들이 함께 순장 당했으며, 무덤을 만든 기술자들도 함께 묻혔다.
상례가 끝나고 보물들도 이미 매장되자 묘로 통하는 길의 가운데 문을 패쇄하고 묘로 통하는 길의 바깥문을 내려 기술자와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다 가둬 다시는 나오는 자가 없었다. 풀과 나무를 심어 묘지가 산과 비슷하게 했다. (244)
그렇게 비밀스러운 묘! 이 전설같은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거대한 무덤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진시황의 거대한 무덤, 진시황릉!
한편 진시황은 거대한 궁전 아방궁으로도 유명한데, 정작 이를 완성하고 이를 즐겼던 인물은 호해였다. 그는 커다란 궁궐을 얻었으나 그만한 권력을 얻지는 못했다. 이에 그는 공포정치를 펼친다. 여러 신하들을 죽이고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도 가차없이 처형했다. 장려의 죽음은 그가 단순히 권력을 위해 목숨을 빼았었다는 점을 폭로한다. 죄없이 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무력을 써서 자신의 권력을 단단히 다지고자 했으나 더 큰 위기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진승이라는 인물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스스로 왕을 칭하였다. 이때 그가 외쳤던 말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말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반란이 들끓어 일어났으나 호해는 제대로 정보를 얻지도 못했다. 단순히 작은 도적 떼가 일어났다 소탕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진승을 이어 패현에서는 유방이 회계에서는 항량과 항우가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도 호해는 조고의 말을 따라 궁궐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겼다. 이제 황제는 조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존재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함께 일을 도모했던 이사를 처형했다. 이제 조고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저 유명한 ‘지록위마’의 사건이다.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모반을 일으키기로 하고는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어 먼저 시험해 보려고 사슴을 끌고 와서 이세에게 바치며 말했다. “말입니다.” 이세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이 틀리지 않았소? 사슴을 말이라 하니 말이오.” 그러고는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를 따르며 아부했다.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는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을 밀려 중상모략 하였다. 이후로 신하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253)
고립무원의 황제. 그는 결국 조고의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반란 군이 아닌! 마지막 순간 그가 환관에게 던진 이 말은 그의 상황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대는 어찌하여 일찌감치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환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이 감히 아뢰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 아뢰었더라면 이미 처형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255)
결국 호해는 ‘당신’이라 불리며 막다를 골목에 몰리다시피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역사에 남은 두번째 황제의 행적치고는 지독히도 초라하다. 호해의 죽음이후 진시황의 손자 자영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조고는 이제 정당성이 없다며 황제라 칭하지 말고 이전의 왕의 칭호를 쓰자고 말한다. 진시황의 제국은 고작 2대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뿐인가? 자영에 이르면 진나라 역시 흔적없이 사라지고만다.
4. 천하의 패권을 두고 다투다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고작 약 20년을 견뎠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황제라는 자리, 천하통일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제 사람들은 진시황이 만들어놓은 그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었다. 그 처음 싸움의 주인공은 항우와 유방이다. 그 둘은 각기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병사를 일으켜 천하의 지배자를 꿈꾸었다.
이 둘의 싸움이 시작되는 계기는 바로 옛 진나라 땅, 관중을 두고 벌어졌다. 본디 유방이 먼저 관중 땅을 차지했으나 뒤늦게 관문을 넘어온 항우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아방궁을 불태우며, 유방에게 항복한 자영을 죽여버린다. 나아가 유방과 일촉즉발의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는데…
항우와 유방의 전쟁은 수많은 이야기를 낳았고, 결국 한편의 소설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초한지>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한편 당대에 활약했던 수 많은 사람 역시 여럿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가장 주목해볼만한 인물로는 회음후 한신이 <회음후 열전>이 있다. 보다 입체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보고 싶다면 이를 참고하도록 하자.
진시황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연 이 뒤를 이어 어떤 인물들이 등장할 것인가? 그들은 어떤 얼굴로 <사기> 속에 모습을 드러낼까? 이점에 주목하면서 다음 <항우본기>를 읽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