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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완독 세미나] 진시황본기 발제
백조 / 2017-02-06 / 조회 3,186 

본문

▷ 진시황의 탄생과 집정 이전의 상황들 [시황 원년 ∼ 8년]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이 조나라의 볼모로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얻어 시황을 낳았다고 하나, 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름은 정(政)이고 나이 13세에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다.
여불위는 재상이 되고, 이사(李斯)가 사인(舍人-상류층 문객)이 되고, 몽오 왕기 표공 등이 장군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린 데다 막 자리에 오른 터라 나랏일을 대신들에게 맡겼다.
[시황 원년 ∼ 8년] 위, 한나라 등을 공격해서 땅을 빼앗는다. 한·위·조·위衛·초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여 수릉을 빼앗자 군대를 보내 다섯 나라 군대를 내보냈다. 동생 장안군 성교가 모반을 일으켰으나 죽음.
노애(嫪毐)를 장신후(長信侯)로 봉함. 일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노애가 결정했다.

 

▷ 진시황의 집정과 여불위의 몰락, 그리고 통일의 과정 [시황 9년 ∼ 26년]

[시황 9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검을 찼다. 장신후 노애가 난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일당이 모두 잡혀 죽고, 그 종족들은 멸족되었다.
[시황 10년]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일에 연루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환의가 장군이 되었다.
제나라 사람 모초의 설득으로 모태후(진시황의 생모)를 함양으로 모셔와 감천궁에 살게 하였다.
대규모 빈객을 쫓아내려 하다 이사의 설득으로 명을 거둠. 이를 계기로 이사가 먼저 한나라를 공격해 빼앗아 다른 나라에 겁을 주자고 해서 이사를 보내 한나라를 함락하게 했다.[한나라 왕이 걱정한 끝에 한비와 함께 진라나를 약화시킬 것을 꾀했다.]
대량 사람 위료가 와서 다른 제후들의 합종에 대비해 재물을 써서 그 제후들의 마음을 사라고 알려주자, 그를 국위로 삼아 결국 그 계책을 썼다. 그리고 이사가 좌지우지했다.
[시황 12년]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몰래 장례를 치렀다. 신하 가운데 장례식에 간 사람들을 벌주고, 이때부터 노애나 여불위처럼 나랏일을 하면서 도를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집안을 노예명부에 기록하고 모두 노예로 삼겠다고 하며 그대로 보여주었다.
[시황 14년] 한비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진나라가 이사의 계략을 좇아 한비를 억류하니 한비가 운양에서 죽었다.
이후 시황 26년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차례로 주변국들과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의 통치이념, 법가사상
법가사상은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전국시대 중기에 현실 정치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의 개념은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춘추시대 정나라에서 제정한 법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진晋에서는 형법 서적을 편찬했다고 한다.
법가는 원래 술術을 중시하는 파, 세勢를 중시하는 파, 법法을 중시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이 세 유파를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년경 ∼ 기원전 233)가 종합해 완성했다. 법가의 기본적인 정신은 성악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을 본래 도덕을 내재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의 다스림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백성을 지배하는 질서는 유가의 도덕이라든가 묵가의 사랑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권력과 지위에 따른 힘 관계의 반영일 뿐이다.  - 중략 -
이렇게 일체의 이상이나 관념을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적인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법가는 다른 사상과 달리 현실정치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륙을 통일한 진의 부국강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앙이 바로 그 좋은 예다. - 중략 -
법가사상은 역사상 유례없이 혹독한 군주 독재 정치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군주의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법가는 철저한 우민정책과 사상통일을 강조했다. 법 이외의 모든 지식은 쓸모가 없고 사람들이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생매장한 진시황의 만행에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 남경태, 휴머니스트, 『종횡무진 동양사』 p. 61-62>

 

▷ 진시황의 주목할 만한 업적

1. 황제皇帝라는 호칭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의 왕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리고 왕이 자신을 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2. 음양오행설 영향
시황제는 오덕(五德 오행)의 처음과 끝이 번갈아 이어지는 순서를 헤아려, 주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었는데 진나라가 주나라의 덕을 대신했으니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라야 하므로 이제부터 수덕水德이 시작된다고 생각해 한 해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의 하례식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했다.
의복과 깃발과 부절의 색깔은 검정색을 숭상했고, 숫자는 6을 기준을 삼게 했으며, 황하의 이름도 덕수德水로 바꾸어 수덕의 시작으로 삼았다.
강하고 엄하며 매몰차고 깊이 있게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결정하고, 각박하게 인애, 은혜, 조화, 감정이 배제되었을 때에야 오덕의 수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법을 엄하게 시행하여 법을 어긴 자는 오랜 기간 사면되지 못했다.

3. 군현제郡縣制
“천하에 전쟁이 멈추지 않아 모두 고통받고 있는 것은 제후 왕이 있기 때문이다. 종묘의 힘을 입어 천하가 막 평정되었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우는 것은 전쟁의 조짐을 싹틔우는 것이니, 안녕과 휴식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다.” (221쪽)

주나라 시대에는 주 왕실이라는 정신적 이념적 중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게 사라졌다. 그러나 복속된 제후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므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중앙집권은 반드시 필요했다. 기존의 봉건질서를 제도적으로 대체해야만 했고, 그 제도가 군현제였다.
군현제는 통일 이전부터 진시황을 충실히 보좌해오던 법가사상의 책략가 이사의 건의로 시행되었다.

4. 법률, 도량형, 문자의 통일

 

▷ 진시황이 동쪽으로 봉선 의식을 위해 순행하다가 공덕비를 세우다 [시황 28년 ∼ 29년]


▷ 진시황의 불로초 구하기와 변방 개척 [시황 30년 ∼ 33년]

[시황 28년] 제나라 사람 서불의 글에 의해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시황 32년] 진시황이 갈석산에 갔다가 연나라 사람 노생을 시켜 신선이라는 선문과 고서를 찾게 했다.
진시황이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신선의 약을 구하게 했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파견되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와 귀신에 관한 일로 『녹도서』를 바쳤는데, 거기에 있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는 글을 보고 장군 몽염을 시켜 북쪽으로 호인을 치게 하여 하남땅을 공략하여 점령했다. (실제 진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이세황제가 된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였다.)
[시황 33년] 범죄자, 노비, 장사꾼 등을 징발하고 서북쪽으로 흉노를 가려 쫓아버리고, 융인들도 몰아냈다.

 

▷ 분서갱유를 단행하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다 [시황 34년 ∼ 35년]

[시황 34년] 박사인 제나라 사람 순우월의 ‘일을 할 때 옛사람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에 대한 승상 이사의 주장은 이러했다.
“지금은 천하가 이미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고, 백성들은 가정에서 농사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유생들은 지금 것을 본받지 않고 옛것을 배워 이 시대를 비난하면서 백성들을 미혹하고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
이런 짓을 금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군주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붕당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마땅히 이를 금지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신이 사관에게 명해 진나라 기록이 아니면 모두 태워 버리도록 청하겠습니다. 박사관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닌데도 감히 『시詩』 『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작을 소장하고 있으면 모두 군수와 군위에 보내 마구 태우게 하십시오. 감히 짝을 지어 『시』와 『서』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저잣거리에서 죽여 보이소서. 옛것으로 지금 것을 비난하는 자는 일족을 멸하십시오.
……
없애지 않아도 될 것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 관련 서적입니다. 만약 법령을 배우려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시황 35년] 진시황은 함양에 인구는 많은데 선왕의 궁전이 너무 작다고 생각해 위수 남쪽 상림원 일대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을 만들었는데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명명하려고 하였으나 완성되지 않고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했다. 또 궁형과 도형을 받은 칠십여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에 능묘를 짓게 했다.
그리고 진시황은 노생의 말을 듣고 악귀를 물리치고 불사약을 얻고자 하여 포악한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후생과 노생이 함께 논의하여 말하기를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적으로 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자기만 내세우는 데다 제후에서 일어나 천하를 병탄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함으로써 예부터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여기었소. …… 황상은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삼는데, 천하는 죄를 두려워하며 녹봉에만 연연할 뿐 아무도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소. 황상은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으니 날마다 교만해지며, 신하들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엎드려 속이고 기만하고 안락함만을 취하고 있소. ……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와 같은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를 위해 선약仙藥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오.’라고 하고 도망쳐 버렸다.
이에 진시황은 크게 노여워하며 유생들을 심문해 법령을 어긴 자 460여 명을 잡아 그들 모두를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에 경고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 진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누어지리라 [시황 36년 ∼ 37년]

시황 36년 화성이 심수心宿를 침범했다. 이는 제왕에게 재앙이 있을 징조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결국 진시황은 재위한 지 37년 10월 순행을 갔다 돌아오다 평원진에서 병이 나 7월 병인일에 사구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러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 비밀로 하고 함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환관 조고는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의 병이 깊어지자 옥새를 찍은 조서를 써서 공자 부소에게 보내려 했던 밀봉 서찰을 뜯어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유조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바꾼 후, 공자 호해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는 다시 서찰을 만들어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주고 그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함양에 도착하여 초상을 알리고 태자 호해가 이세황제가 되었다. 9월에는 진시황을 여산에 안장했다.

 

▷ 이세황제, 온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다 [이세황제 원년 ∼ 3년]

이렇게 조고와 이사 등과 모의하여 황제 자리에 오른 이세황제는 조고를 낭중령으로 삼아 나랏일을 좌지우지하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순행을 하고, 대신들과 관리들 여러 공자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으려 하자 조고와 의논하여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였다. 이에 종실들은 두려워 떨고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비방이라 여기자 고관들은 녹봉을 유지하기 위해 구차스럽게 아첨하려고만 했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다.
이후 아방궁을 다시 지으며 법을 운용하는 것이 더욱 각박하고 심해지자 7월 수자리 병사 진승陳勝(진섭陳涉) 등이 옛 형荊 땅에서 모반을 일으켜 장초張楚라 했다.(중국 최초의 농민반란) 진승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초왕이 되었으며,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점령하게 하였다. 산동 군현의 젊은이들이 자기 지방의 관리를 죽이고 모반을 일으키고 서로 자리에 올라 제후나 왕이 된 후,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하여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무신은 스스로 자리에 올라 조왕이 되었고, 위구는 위왕이 되었으며, 전담은 제왕이 되었다. 유방이 패현에서 일어났고 항량이 회계군에서 군대를 일으켰다.(전국7웅 중 진을 제외한 6국 세력들이 각기 자기 지방에서 들고 일어나 옛 제후국의 부활과 계승을 표방함- 주나라의 봉건제 시스템이 완전히 뿌리 뽑히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이세황제는 점점 더 조고와 모든 일을 결정하고 이사의 간언도 듣지 않고 이사를 처형하는 등 멋대로 하다 결국 조고가 모반을 일으켜 배신하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고는 이세황제 형의 아들 공자 자영을 진나라 왕으로 삼았으나 조고의 계책을 파악한 자영에 의해 죽는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에 의해 진나라 자영은 투항하고, 항량이 죽고 초나라의 상장군이 된 항우가 진나라 장한의 관군을 물리치고 여러 제후의 맹주가 되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항우는 서초 패왕이 되어 명을 주관하고 천하를 나누어 제후왕을 봉하니, 진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오년 뒤 천하는 유방의 한漢나라에 의해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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