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고원〕 제8장 1874년 : 세 편의 소설 혹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발제
반디
/ 2017-02-06
/ 조회 3,116
관련링크
본문
1. 소설과 콩트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다룬다. 또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 콩트의 요소들을 영구히 살아있는 현재(지속)의 변이 속으로 통합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 가지 형식을 시간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후설은 과거는 다시-당김이고 미래는 미리-당김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별은 현재를 활성화하고 현재와 동시적인 상이한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정당한 것인데 하나는 현재와 함께 운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현재)나타나자마자 과거로 내몰리면서(소설) 동시에 미래에 연계시키는 것이다(콩트). 그러므로 콩트 작가와 소설가의 ‘현재’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결코 모를 것이고,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언제나 알 것이며, 이는 소설이나 콩트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취하는 상이한 두 가지 긴장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살아있는 현재가 매 순간 나누어지는 두 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주목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콩트가 진행될 첫 번째 이야기인 반면 소설은 지나간 최근의 소식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시간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다. 소설은 반성이나 기억 행위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망각으로 인해 작동된다. 소설은 ‘이미 일어난 것’이라는 범위 안에서 진행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지각 할 수 없는 어떤 것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얘기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발견되어야할 비밀스런 재료나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이해되지 않은 채 남을 비밀의 형식과 관련을 맺고, 콩트는 발견할 수 있는 게 무언지와는 무관한 발견의 형식과 관련된다. 또한 소설은 주름이나 감쌈과 같은 신체와 정신의 자세를 전면에 두는 반면, 콩트는 가장 예기치 않았던 전개와 발전 같은 태도나 입장을 작동시킨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소설을 과거에, 콩트를 미래에 회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자체 안에서 소설이 과거(일어난 일)의 어떤 것이 갖는 형식적 차원으로 회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소설의 고유한 어떤 특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이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는 특수한 방법이 있다. 글쓰기의 선은 다른 선들 즉 삶의 선, 행운과 불행의 선 등과 결합되며, 글쓰기의 선의 변이를 이루고 글들의 행간에 있는 선이다. 소설은 살아있는 선, 살(肉)의 선들의 기능을 통해 정의된다.
2. 세 가지 선/헨리제임스 <철장 안에서>
1) 경직된 선분성의 선 :: 전신수의 일상생활과 그녀의 약혼자와의 관계에서 살펴 볼 수 있는 선으로 그녀가 받는(기재하는) 전보들, 이 전보를 받는 사람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회계급, 개수를 세어야 하는 단어들, 전신수와 그녀 약혼자의 식료품가게가 이루는 영토의 인접성, 일, 휴가, 집, 장래에 대한 계획과 재단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선들은 극히 계산가능한 일들의 선으로 각 선분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다른 선분으로의 이행을 계산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동일성을 보증하고 통제하기 위한 선이며 동선을 짜고 관계를 제한하고 정체성을 규정한다. 여기에는 많은 대화, 질문과 대답, 끝없는 설명들, 초점 맞추기가 있다.
2) 분자적인 내지 유연한 선분성의 선 :: 부유한 부부의 등장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선으로 이전의 전보가 명확하게 규정된 경직된 선이라면 가명으로 서명된 암호화된 많은 전보들은 양자(量子)로 표현되는 선이다. 전신수와 약혼자와의 관계가 경직된 선분선의 선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남자와의 관계, 그와의 직접적 관계로 인해 젊은 전신수는 낯선 정욕적 공모성을 발전시켜 강렬한 분자적 삶을 펼치게 되는데, 이 또한 유연한 흐름의 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치가 있는데 이는 거시-정치와 미시-정치다. 이 양자는 계급, 성, 개인, 감정을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분명히 규정된 집합이나 원소(사회계급, 남자와 여자, 이러저러한 개인들)를 작동시키는 커플의 고유한 관계가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그 자신에 외재하는 국지화하기 힘든 관계로 이중체(분신)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선분은 탈영토화의 양자처럼 존재하며 바로 이 선 위에서 현재가 정의된다. 이 선은 해석되어야만 하는 침묵이나 암시, 성급한 감 잡기로 이루어져 있다.
3) 추상적인 선(탈주의 선) :: 비밀의 형식-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안에서 전신수와 전보 부치는 사람간의 분자적인 관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해소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녀는 벽을 돌파하며, 검은 구멍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절대적 탈영토화에 도달했다. ‘그녀가 좀 더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주는 어둠은 이제 더 이상 남지 않았으며, 다만 강렬한 빛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일종의 양자의 최대치, 순수한 추상적 선만 있을 뿐이다. 추상적 탈주의 선 위에는 어떠한 형식도 없다. 우리가 더 이상 이해될 수 없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해체하는 것. 고유한 자아를 해체하고는 결국은 혼자가 되는 것, 또 선의 다른 끄트머리에서 진정한 이중체(분신)와 만나는 것, 부동의 여행을 하는 지하의 나그네, 모든 사람처럼 되기, 그러나 이는 바로 누구도 되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기고 더 이상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기다. 이 선은 섬광 같아서 탈주의 선이 달리고 있는 기차와 같다면 이는 선형적인 비약이 있기 때문이며, 문자 그대로 날이 선 풀이파리, 파국이나 충격 등에 대해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어떤 것도 다른 것을 대신할 가치를 가질 수 없는, 도래할 사태를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절단, 균열, 단절/스코트 피츠제랄드 <붕괴>
1) 절단된 선 :: 경직된 선분선의 선과 상응하는 선으로 이는 갈수록 경직되고 메말라지는 선분성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경제위기, 부의 상실, 피로와 노화, 알콜 중독, 결혼의 실패, 영화의 부상,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출현, 그리고 명성과 재능의 상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외부로부터 닥치거나 그런 것으로 보이는 갑작스러운 거대한 타격으로 인해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이행하게 되는 몰적 선분성의 절단으로 설사 변화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에조차 경직화와 노화를 상쇄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2) 균열의 선 : 대규모의 절단이 아니라 접시에 금이 가는 것과 같은 미시적 균열들로 이는 더욱 미세하고 유연하다. 이 선은 오히려 사태가 더 잘 나아갈 때 생산된다. 균열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기지만, 그것은 정말 갑자기 의식하게 된다. 극히 유연하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이 분자적 선은 리좀적인 성질을 갖는 선분화와 더불어 그러하다.
3) 단절의 선 : 여기서의 단절은 절단과 구별되며 도피, 탈옥과도 구별된다. 진정한 단절이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떤 것이고, 복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가 더 이상 존속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단절에서 과거의 질료는 휘발된다. 이 휘발성 질료 안에서 일어나는 형식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지된 여행 가운데 사람은 지각할 수 없고 은밀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제 하나의 선일뿐이다. 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사랑, 그리고 나와 그 이중체(분신)을 맹목적으로 선택할 사랑을, 그리하여 이미 나 말고는 다른 나를 갖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과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사람들은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구제되었다. 사람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화살과 같은 추상적인 선일뿐이다. 절대적 탈영토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지만, 이는 모든 사람과 같아질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다. 사람들은 자신 위에 세계를 그리지 세계 위에 자신을 그리지 않는다.
4. 감시자/피에레트 플뤼티오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
각각의 선분위에는 두 종류의 감시자가 있다. 가까이 보는 자와 멀리 보는 자. 이들이 감시하는 것은 심연에서 발생하는 운동, 격동, 위반, 혼란 및 반란이다. 그러나 감시의 두 유형에는 차이가 있다.
1) 가까이 보는 자 (대충 보는 자) :: 이들은 간단한 망원경을 가지고 테두리를 본다. 거대 세포의 테두리, 이항적인 거대 분할 및 이항대립의 테두리, 교실, 막사, 공단주택, 혹은 비행기에서 본 국토처럼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는 선분들의 테두리. 그들은 또 홈을 본다. 나뭇가지, 사슬, 줄, 기둥, 도미노 등. 이따금 가장자리에서 보기 흉한 형상 내지 떨리는 테두리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은 가공할 광 망원경을 꺼내는데 이것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단하고 재단하기 위해서다. 이 망원경은 몰적 질서를 복원하며 모든 것을 초코드화 한다. 이것은 살과 피 안에서 작동하지만 순수 기하학, 국가적 사업으로서의 기하학에 따르며 이 기계를 사용하는 가까이 보는 자의 물리학에 따른다. 가까이 보는 자는 질문을 하지만 정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정의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경직된 선분성의 선을 그리는 것이 그들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2) 멀리 보는 자 혹은 멀리서 보는 자 :: 그들은 좋고 복잡한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도자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본다. 그들은 미시적 선분성을 보며, 세부의 세부를, 가능성의 육교를, 경계선 상에서 간단없이 일어나는 미세한 운동을, 테두리선 부근에서 그려지는 선들과 동요를, 급격하게 변동하는 선분들을 본다. 이 모두가 리좀이며 재단 기계로서의 기표에 의해 초코드화 되지 않고 특정한 형상이나 집합 내지 요소에 귀속되지도 않는 분자적 선분성이다. 멀리 보는 자는 장래를 점칠 수 있지만 이는 항상 분자적인 질료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입자에서 일어난 어떤 것이 되는 생성의 형식 속에서다.
▶멀리 보는 자가 처하는 양의적 상황 ::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더없이 미미한 미시적 위반을 심연 속에서 발견하기 쉬운 반면 재단하는 망원경의 기하학적인 정의의 미명아래 끔찍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예견하고 타인에 선행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자신들의 예고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분자적 선의 양의성은 마치 두 개의 비탈길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듯하다. 멀리 보는 사람은 자신의 선분을 버리고, 검은 심연 아래 있는 좁다란 육교에 올라갈 것이고 탈주선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할 것이며, 그의 망원경을 부수고는 다른 쪽 끄트머리에서 다가오는 눈 먼 이중체와 만날 것이다.
5. 각각의 선이 갖는 특징, 중요성, 상호 내재성 및 위험성
커플이란 무엇이고, 당신의 분신이란 무엇이며, 당신의 잠행자란 무엇이고, 이것들의 혼합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가 당신 눈 속에 있는 광기의 섬광을 사랑하듯이 당신도 나의 입술에 남은 위스키의 맛을 사랑해 달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복합되는 것은 어떠한 선들이며 반대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선들인가?